『스코어 스코어』 커버 (작업실유령, 워크룸프레스 http://workroompress.kr/)

『스코어 스코어』. 오민이 ‘스코어’에 관해 묻는다. 무용 이론가·드라마투르그 김재리, 안무가 권령은, 시각예술가 남화연, 시각예술가 박보나, 시각예술가 자나 이바노바, 작곡가 한스 룰스, 실험 음악가 홍철기가 답한다. 이들의 대화는 음악을 위한 악보, 춤을 위한 무보, 퍼포먼스를 위한 스크립트 등 서로 다른 분야에서 다른 이름으로 불리던 것들을 스코어라는 이름으로 한데 호명하며 스코어의 범위를 유연하게 풀어놓는다.

질문자 오민은 대체로 답변자의 스코어에 집중하지만 비교를 통해 답변자의 스코어를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때는 오민의 스코어, 즉 서양 고전음악의 악보를 언급한다. 스코어에 관한 오민의 관심이 쇼팽 소나타 2번 1악장 1주제의 연습과정을 새로운 음악 공연으로 구성한 <이영우, 안신애, 그리고 엘로디 몰레>(2015)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면 이 책 『스코어 스코어』의 출발점도 서양 고전음악과 그 악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이 개별 사례와 스코어의 확장성에 주목하는 만큼 서양 고전음악의 악보는 다소 제한적으로 논의된다. 악보는 답변자의 스코어가 지닌 개별성을 이끌어내는 일종의 기준점에 가깝다. 꽤 널리 통용되어온 서양 고전음악의 악보 그 자체에 관해서는 더 이상 파헤칠 것이 없을지도 모르고, 그것이 이 책의 목표도 아니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 그러했듯 특정 작업에 사용된 스코어를 이리저리 살펴보는 일이 그 작업에 대해서 뭔가를 더 알려준다면, 마찬가지로 서양 고전음악의 악보도 음악에 대해서 알지 못했던 뭔가를 알려줄지도 모른다. 악보는 본래 음악을 위한 것이 아니던가. 다음의 말은 그 모종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춤에서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 춤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그 시대와 문화가 춤의 본질에 대해 묻는 질문과 같다고 생각한다.”(김재리, 23쪽) 이렇게 바꿔보자. 음악에서 무엇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이 질문이 그 시대와 문화가 음악의 본질에 대해 묻는 것과 같다면, 이에 대한 답이 음악의 본질에 대한 답이기도 할까. 음악의 본질에 관한 희망 없는 질문에 정말로 이 악보라는 사물이 나름의 해답을 줄 수 있을까.

이 말은 질문하는 동시에 한 가지 단서를 암시한다. 스코어는 음악의 일부를 선택적으로 기록한다는 것. 악보와 연주의 차이는 ‘해석’이라는 이름하에 자주 논의되어온 반면, 기보되기 이전의 음악과 악보 사이의 간극은 잘 드러나지 않는 부분이다. 악보는 음악의 모든 것을 기록하지 않는다. 선택적으로 기록된 악보, 그리고 선택적인 수행. 혹은, 기록되지 않은 것까지 복원 또는 창작하는 수행. 기보에는 언제나 어느 정도의 정보 손실이 예정되어 있다. 그 손실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파악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우선 무엇이 기록되었고 무엇이 기록되지 않았는지를 파악하는 일 정도는 가능할 듯하다.

  

악보에 기록된 것

서양 고전음악 악보에 기록된 것들을 살펴보자. 크게 둘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악보의 시스템에 관여하는 기호들이다. 오선, 마디선, 음자리표, 음표. 소리 내야 할 음높이와 음길이를 동시에 보여주는 이 타원형의 기호 ‘음표’는 수차례 형태변화를 겪은 악보의 가장 오래된 구성 요소로, 서양 고전음악 악보를 성립시키는 첫 번째 요소다. 음표는 글을 읽는 방식과 동일하게 좌에서 우로 읽어내려가도록 설계되어있다. 규칙적으로 박자를 나누는 마디선, 가온 다(C)를 중심으로 거울처럼 마주 보는 높은음자리표와 낮은음자리표도 보편적인 기호로 자리 잡았다. 이들은 늘 포함되어야 하는 정량화된 기호들로, 서양 고전음악 악보의 시스템을 지탱한다. 

두 번째는 부가적으로 기록된 요소들이다. 호흡의 단위를 구획하는 슬러, 약어로 명시된 셈여림, 점진적인 다이나믹 변화와 어택 방법, 특정한 느낌 혹은 정서를 동반한 템포 지시어, 한 악장 혹은 작품의 성격을 지시하는 나타냄말, 손가락번호. 이것들은 대체로 오선과 오선 사이, 음표와 음표 사이 어딘가의 빈자리에 기보된다. 이 기호들은 또다른 단서가 된다. 나타냄말이 악보에 기록되기 시작한 때는 한 작품이 한 감정을 표현한다고 믿었던 바로크 시대이며, 관습적으로 더해지던 꾸밈음은 고전시대에 이르며 정확히 기보되기 시작했다. 낭만시대에 들어서는 본래 ppp에서 fff정도로 쓰이던 다이나믹이 pppppp부터 ffff까지로 확장되었고, 텍스트가 이전보다 더 많이 출현했다. 

이 부가적인 기호들은 음악이 바뀌던 시기와 맞물려 변화하고 출현하며 당대의 음악이 중시하던 가치를 분명히 반영했지만, 음표를 중심으로 짜인 악보의 근본적인 기록 시스템을 바꿀 수는 없었다. 악보는 여전히 음표에 의지했다. 그럼에도 악보의 문법을 깨지 않는 선에서 기록과 실제의 오차를 줄이려는 수많은 시도가 있었다. 상상한 소리를 정확히 기록하려는 창작자의 욕망은 조금씩 커져서 악보에는 그만큼 더 많은 지시사항이 담겼고, 그만큼 그 이후의 상상도 더 구체화되었다. 그 정점은 낭만시대였다. 그로브 사전의 기보 항목은 여러 기호가 혼합되어있는 리스트의 <초절기교연습곡 1번> 도입부를 소개하는데, 이 두 마디의 악보에 사용된 기호는 높은음자리표, 낮은음자리표, 박자표, 음표, 쉼표, 마디선, 임시표(♭, #, ♮), 다이나믹(f), 페달(Ped.), 페달 중지(*), 연주법(rinforz), 언어로 템포 지시(Presto), 메트로놈 숫자로 템포지시(♩=160), 감정지시(energico), 옥타브 위치 변경, 손가락번호, 리듬그룹핑(숫자 19), 슬러, 페르마타, 스타카티시모 기호, 펼침화음, 점점 크게(cresc.), 점점 작게(decresc.)로, 그 종류만 23가지다. (물론 단정한 음표들이 지면의 대부분을 채운 덕에 그 종류의 수만큼 번잡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리스트 <초절기교연습곡 1번> 도입부

작곡가들이 최대한으로 기록한 정량화된 음표와 정형화된 지시사항의 총체는 점차 더 자세한 환영을 만들어냈다. 거의 기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샅샅이 기록한 것에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악보에 기록된 것들이 음악의 본질에 가까울까? 섣불리 단언하기에는 악보 이후에 너무 많은 것이 남아있는 듯하다. 

  

악보 이후의 수행

작곡가는 악보에 온갖 기호를 동원해 소리나야 할 음과 소리내는 방식과 그 음악의 표현을 명시하지만, 연주자에게 악보는 음악의 출발점에 있는 단서일 뿐이다. 악보를 바라보는 기록자의 시선과 수행자의 시선은 서로 다르다. 여기에 시차도 덧입혀진다. 악보는 “과거의 기록이자 미래의 사건이 내재된 상태”(남화연, 59쪽)다. 작곡가와 연주자라는 두 시선에 과거와 미래라는 두 시제가 덧입혀짐에 따라 악보와 수행이 불일치할 가능성도 한층 더 커진다. 물론 악보는 작곡가의 악상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기록되기 이전의 음악’과도 불일치할 것이다. 그러나 기록되기 이전의 음악과 악보 사이의 불일치는 가까스로 추측만 할 수 있을 뿐 판단할 근거가 없으므로, 대체로 그 불일치는 연주 단계에서만 가시화된다.

한편 악보와 연주의 불일치는 상당히 능동적으로, 그리고 계획적으로 이루어진다. 연주자가 악보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보자. 연주자는 악보에 적힌 기호와 지시를 해체하고 반복하며 습득한다. 음표와 리듬을 읽고, 권장된 호흡과 템포에 움직임을 맞춘다. 수많은 지시사항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후에는 그 이전 단계를 하나씩 배반하며, 혹은 의도적으로 잊어가며 악보에 적혀있지 않지만 빠져서는 안 될 것들을 찾아낸다. 기호로 빼곡한 위의 리스트의 악보에도 모든 것이 적혀있는 것은 아니다. 적절한 음색과 뉘앙스, 루바토나 아고긱 같은 미세한 타이밍 조절, 기보될 필요가 없었던 관습, 언어화될 수 없는 세밀한 아티큘레이션, 무게감, 숨겨진 선율 등. 이들은 기보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연주자의 재량을 더 낱낱이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로, 악보 이면의 논리로 분석하거나 숙련과정을 거쳐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기호로 가득 찬 악보는 충실히 지시를 따르기만 하면 아름다운 음악을 내어주겠다고 약속하는 듯하지만 연주자들은 기호 사이의 행간과 맥락을 읽어야 한다. 

연주는 어느 순간 악보 너머로 나아간다. 필요하다면 이를 위해 나름대로 악보에 새로운 기호를 적는다. 악보의 여백에 적힌 작은 지시 혹은 기록되지 않은 뉘앙스가 가장 주된 기호인 음표들을 압도하기도 한다. 악보에서 가장 중요한 기호와 연주자가 가장 중요히 수행할 요소가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명시된 지시사항만을 따라가는 것이 아름다운 연주를 보장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지시를 위반하는 것은 악보가 제시하는 그 음악으로부터 멀어질 위험이 있다. 문맥에 따라 지시와 수행 사이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연주를 고유하게 만드는 것은 그 선택이다. 그 선택은 특히 악보 위에 부가적으로 놓여 있는 작은 기호들, 혹은 적혀 있지 않은 것들을 통해 가시화된다. 지시와 수행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멀고 가깝냐에 따라 연주는 ‘악보에 충실한 연주’, 혹은 ‘독창적인 연주’, 혹은 ‘자의적인 연주’라는 평가를 얻었다.

여백에 적힌 작은 기호나 애초에 기록되지 않은 요소들이 중요하지 않아서 기록되지 않았다기보다는 서양 고전음악의 기보 시스템이 그것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거나 혹은 애초에 기록될 수 없는 성질이라고 보는 게 더 적합할 것이다. 이를테면 호흡이나 매 순간 변화하는 감정의 밀도, 음표 위에서 요동치는 다이나믹은 음표처럼 중요히 기록되지 않았지만 이들은 음악의 중요한 일부분이며, 마땅히 ‘들려져야’ 한다. 

음악의 본질이 논리 혹은 형식과 같은 것이라면 이는 음표들이 놓인 구조에 내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이 음악을 더 ‘음악적으로’ 만드는가. 그것은 뒤늦게야 악보에 나타난 사소한 기호들, 그리고 악보의 이면에서 연주자가 읽어내길 기다리며 숨어있는 어떤 대상일 것이다. 

  

악보가 말하지 않는 것

악보의 역사는 암시된 것을 조금씩 지면으로 끌어냈고, 악보 이전의 음악과 악보 이후의 음악의 간극을 좁히려고 노력해왔다. 어떤 기호들의 변화와 출몰은 음악이 변화한 시점을 알아차릴 수 있는 단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노력은 영원히 성취될 수 없는 불가능한 시도다. 좁혀지지 않는 한 끗 차이. 음악의 근본적인 번역 불가능성. 지면에 결코 포섭될 수 없는 것들. 음악에서 무엇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우리가 음악에서 앞으로도 계속 귀 기울여 듣게 될, 형용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은 악보가 영원히 기록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신예슬 | shinyeasul@naver.com / http://shinyes.kr
음악학과 현대음악을 공부했다. 음악과 가장 가까운 사물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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