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테로포니에 관한 네 개의 짧은 글
성혜인
서로 각기 다른 장르의 음악에 관심을 가져온 사람들이 모여 ‘비평’을 모색했다. 비평은 헤테로포니가 선택한 음악을 탐구하는 하나의 형식이다. 당장 이 이상의 부연을 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음악에 대한 저마다의 시선이 가로지르는 이 자율지대에서 표면적으로는 음악에 대한 글쓰기의 결과물을 제시하겠지만, 각 글은 독자들로 하여금 헤테로포니를 결성하고 움직이게 한 동력을 추적할 수 있는 단서를 마련해 줄 것이다. 느슨하지만 큰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 선에서 서로를 독려하며 진취적인 글쓰기를 해나가는 것이 현재의 목표다.
“글쓰기는 변화의 가능성 자체이다. 사회 그리고 문화적인 구조들의 변형을 예고하는 움직임, 전복적인 사상의 도약대가 될 수 있는 공간이다.” (알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출구』) 나는 이 공간에서 일반적인 음악의 정의와 범주, 음악비평에 기대하는 어떤 전형들을 따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음악을 음악으로 구획 짓게 만드는 보편적 체계와 ‘좋은 음악’을 규정하는 기준들을 의심하고 점검하며 그 속에서 전통음악을 바라볼 것이다. 따라서 헤테로포니는 (나에게) ‘목소리’를 괄시하지 않는 환대의 공간,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 내는 가능성의 공간이 될지도 모르겠다.
신예슬
모호한,
그렇기 때문에 여러 음악을 다루기에 편리한 지면이 필요했다. 음악을 가르는 분류의 오차는 점점 커졌고 장르 사이의 음악, 장르를
교차하는 음악, 다른 말로 불리지만 사실 동일한 음악은 물론, 오랜 시간 ‘변칙’으로 취급되는 음악도 점점 늘어났다. 음악이
섞인 지 너무나 오래되었는데 비평의 지면이 장르별로 철저히 갈라져 있을 필요는 딱히 없어 보였다. 비평은 언제나 음악 이후의
것이므로, 제도가 여전히 음악을 이전의 방식으로 가르고 있다면 비평 역시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장르의 동료 비평가들과 ‘음악’이라는 공통분모에 관한 생각을 나누고, 서로 다른 영역의 대변자로서 가시화되지 않았던 음악들
사이의 흥미로운 차이를 짚어보고 싶었다. ‘헤테로포니’라는 텍스쳐는 그런 예상치 못한 모든 충돌을 가능하게 만드는 테두리 없는
테두리이자 일종의 형식적인 답이었다.
매달 서로 어떤 글을 쓸지, 어떤 주제가 공동의 화두로 떠오를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각자의 영역을 늘 주의 깊게 살피며 쓰고 싶은 글을 주기적으로 쓰되, 함께 얘기할 수 있겠다는 믿음을 주는
사안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쌓아보기로 했다. 지면의 성질이나 방향에 대해서 당장 약속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원대한 야망
따위도 없다. 다만 동료들과 함께 뭐라도 꾸준히 써내면서 뻔뻔하게 최대한 오래 버텨보기로 했다.
이승린
“…소리는
내면 깊숙이 침투하여 인체의 리듬을 조종한다. 우리는 행진곡을 들을 때 저절로 발을 맞추고 있는 자신을 쉽사리 발견한다. 이러한
소리의 강력한 효력에 대해 귀는 아무런 방비를 하지 못한다. 귀는 “눈꺼풀이 없”기에 닫을 수도 없다. 듣고자 하지 않을 때
듣지 않을 수 없다. 청취란 근본적으로 불평등한 것이다. 음악은 신체를 사로잡아, 삶을 향해서든 죽음을 향해서든, 어디로든 끌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음악 혐오』, p.289)
파스칼 키냐르 『음악 혐오』의 역자 김유진의 말이다. 나는 이것을 읽고 축제의 퍼레이드 한가운데 서 있는 나를 상상했다. 온갖 소리로 가득한 축제의 장에서 소리를 듣는 내가 어디론가 외로이 향하는.
우리가
헤테로포니로 이름을 정했을 때, 나는 다시 불꽃 축제의 현장에 서 있는 상상을 했다. 높게 솟은 불꽃을 바라보는 우리는 각자
다른 곳에 서 있다. 주변은 축제로 들뜬 사람들이 재잘대는 소리와 온갖 악기 소리들로 가득하다. 우리는 혼자인 듯하지만 퍼레이드에
발맞추는 듯 아닌 듯하며 제각기 어디론가 향한다. 밤하늘의 불꽃만이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볼 것이다. 모든 소리와 음악이
뒤엉켜 있는 세계에서 언제 우리가 마주치게 될지 또 언제 헤어지게 될지는 우리 자신도 모른다.
정구원
신예슬 평론가가 이 비평 콜렉티브의 이름으로 ‘헤테로포니Heterophony’라는 이름을 제안했을 때, 내 머릿속에는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정말 멋진 단어야.” “그런데 이전에 이 단어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
그러니까,
과연 괜찮은 것일까? 음악에 대한 글을 계속 써 왔고 음악, 혹은 소리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건 그보다 훨씬 오래 전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음악이라는 세계 속에는 내가 접하지 못한 개념과 현상이 너무나도 많다.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활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불현듯이 찾아오는 무지에 대한 자각은 어쩔 수 없는 좌절감을 불러일으킨다.
헤테로포니라는 낯선 단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괜찮은 것일까, 이 제안을 받아들여도? 나는 이 멋진 단어에 어울리는, 괜찮은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런저런 좌절감과 불확실함을 뒤로 한 채 나는 지금 헤테로포니의 소개(중 하나)를 쓰고 있다. 일차적인 이유는 그런 좌절감
따위로 거절하기엔 이 단어가 너무 멋있어서이고, 또 다른 이유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 때문이었다. ‘여러 성부가 거의 비슷한
선율을 각자 다르게 연주(내지는 노래)하며 즉흥적인 뭔가를 덧붙이는데 어느 하나가 메인이 아니어서 텍스쳐가 이상하게 엉켜있는
상태’. 소리와 음악에 대해 겹치는 부분이 별로 없는 각자의 필드에서 글을 써 왔던 사람들이 하나의 집단에서 글을 펼칠 때, 그
모습은 어떤 광경일까? 언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걸 감안해도, 그 광경은 어쨌든 지금까지 흔히 볼 수 있었던 비평
매체와는 어느 정도 궤를 달리하는 모습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궁금했다. 그것은 내가 맡고 있거나 익히 알고 있었던 음악 매체의
모습과는 다른, 이상하게 엉켜 있는 상태일 테니까.
한
마디로 단정할 수 있는 소개를 기대한 독자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이 공간이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는 ‘음악과 소리에 대한 여러
가지 비평이 올라올 것이다’ 이외에는 해 줄 수 있는 설명이 없다. 다만 나는 지도학자 데니스 우드Dennis Wood의 글을
빌리고 싶다. “객관성은 피할 수 없는 주관성을 억압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주관성의 침범을 승인함으로써 주관적 읽기를
배제해야 한다는 압박을 덜 때 비로소 객관성은 확보된다.” 지도 제작에 대한 간주관성intersubjectivity을 역설한 그의
이 문장은 비평이라는 행위의 본질을 짚고 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헤테로포니는 네 가지 시선으로 이러한 간주관성을 모색한다.
느슨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