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장면

2017년 7월 20일, 조선일보 한현우 주말뉴스부장은 자신의 칼럼 ‘한현우의 팝 컬처’에 청년들이 록 음악을 듣지 않는 이유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그는 세계적인 현상인 록 음악의 쇠퇴가 유독 한국에서 심하다고 진단하면서 ‘한국의 모든 매체는 힙합이나 일렉트로닉 또는 그 둘을 조잡하게 비벼 만든 싸구려 댄스 음악만 틀어준다’라고 규정하고 록 음악에 대해서는 ‘숯불구이를 기다리며 마시는 첫 잔의 술보다도 강렬하다’는 낮뜨거운 표현을 써 가면서 찬양한다. 그리고 비록 록 음악이 현재는 (부모 세대의 음악이기 때문에) 쿨하지 않지만, 지금의 청년 세대가 부모 세대가 됐을 때 록 음악은 사이클을 돌아 다시 쿨해질 것이라 예견한다.

당연히 이 글에 대해서 수많은 반박과 비웃음이 쏟아졌다. 그 이야기를 일일이 이곳에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면, 이러한 시대착오적인 록 순수주의자조차도 부정하지 못한 사실로부터 이 칼럼이 출발한다는 것이었다. ‘록은 쇠퇴했다’. ‘Rock Will Never Die’가 록 음악의 팬들에게 오랜 시간 동안 통용되었던 격언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록이 더 이상 주류의, 혹은 인기 있는 음악이 아니라는 건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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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7일, 미국의 포스트 하드코어 밴드 브랜드 뉴(Brand New)는 그들의 5번째 앨범 [Science Fiction]을 발매했다. 앨범은 다수의 음악 매체로부터 커다란 호평을 받고 빌보드 200 차트 1위에 올랐다. 음반을 들어 보면 대중음악 역사에서 존재했던 모든 종류의 ‘진중한 록’이 하나의 앨범 안에 집대성되어 있다는 인상이 느껴진다. 하드 록, 하드코어 펑크, 90년대 그런지, ‘록 팬’이라고 자처하는 모든 사람이 환희에 잠길 법한 어떤 장르를 대도 상관없다. 소위 말하는 ‘명반’이 갖출 법한 모범적인 조건 – 과거의 훌륭한 역사를 명민하게 엮어내 아티스트의 예술적 지향과 등치시킨다 – 을, 이 앨범은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그러니까 누군가는 이 훌륭한 앨범을 ‘록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근거로 삼을 것이다. 나는? 잘 모르겠다. 단순히 이 밴드가 2018년에 해체할 것이라고 선언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왜 이들은 이모(Emo) 사운드가 이뤄낼 수 있는 가장 빛나는 성취를 달성하고서, 포스트-하드코어와 노이즈 록의 혼란스럽지만 절묘한 조합을 선보이고서, 그곳에서부터 두 보 정도는 후퇴한 듯한 과거의 유산을 레퍼런스로 삼았는가? [Science Fiction]은 훌륭한 앨범이다. 그러나 이 앨범은 ‘전진’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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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의 죽음에 관한 이 글은 이 두 가지 장면으로부터 출발한다. 어떤 장르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구체적인 근거에 의거한 논증이라기보다는 다분히 감상적이고 주관적이며 때로는 마케팅적인 논리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이 장르가 17번이나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이유일 것이다.

때문에, ‘록은 죽었다’는 선언이 불러일으키는 달콤한 묵시록적 울림에 거부감을 가진 록 팬들은 지금 현시대에 존재하는 훌륭한 록 뮤지션을 근거로 록의 죽음을 거부한다. 인디와 언더 씬에서 활발하게 만들어지며 일정한 음악적 성취를 이뤄내는 많은 록 밴드는 그에 대한 좋은 근거가 된다. 애초에 장르가 진정으로 ‘죽음’, 즉 창작자도 소비자도 없는 상태를 맞이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걸 생각해 보면, 이런 주장은 밑도 끝도 없는 ‘록은 죽었다’는 선언보다 훨씬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이 시대 록이란 장르가 생존보다는 느리고 점진적인 죽음에 보다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죽음’만큼이나 빈약한 근거에 기대고 있는 ‘생존’에 대한 거부감에서 비롯된다. 개별 작품의 훌륭함이 장르 전체의 활력을 보장한다는 단순한 가정은 록이 현재 처해 있는 상태 – 상업적, 비평적, 그리고 동시대적 측면에서의 침체를 설명하지 못한다.

 

상업적 측면

2017년 미국 음악 시장을 분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보자. 닐슨 뮤직의 조사에 따르면, 2017년은 미국 음악 시장에서 힙합과 R&B가 처음으로 록 음악의 판매량을 넘어선 해로 기록될 것이다. 이는 1991년 이들이 정기 조사를 시작한 이래 최초의 기록이다. 록(40.1%)이 앨범 판매량 비중에서 힙합/R&B(17%)를 큰 폭으로 제쳤음에도 불구하고, 힙합/R&B(29.1%)는 스트리밍 시장에서 록(16%)을 제압했다. 그리고 그 차이는 전체 음악 시장에서 힙합/R&B(25.1%)가 록(23.0%)을 2.1% 차이로 제치고 1위 장르를 차지하게 만들었다.

앨범 단위로 들어가 보면, 2017년 현재 빌보드 200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 앨범 28작품 중 록 앨범은 4개뿐이다. 린킨 파크(Linkin Park)의 [One More Light]와 아케이드 파이어(Arcade Fire)의 [Everything Now], 그리고 브랜드 뉴(Brand New)의 [Science Fiction]과 푸 파이터즈(Foo Fighters)의 [Concrete And Gold]. 여기에 에드 시런(Ed Sheeran)과 해리 스타일스(Harry Styles), LCD 사운드시스템(LCD Soundsystem)을 욱여넣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록 앨범이 소수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2017년이 극단적인 사례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로 빌보드 1위를 차지한 록 앨범의 비중이 절반을 넘었던 적은 없다. 당해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의 장르가 록이었던 것은 2001년 린킨 파크의 [Hybrid Theory]가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보다 덜 가시적이지만 중요한 지표로, 모든 대중의 뇌리에 각인될 법한 ‘공룡급’ 록 밴드 역시 200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자취를 감췄다. 린킨 파크와 푸 파이터즈, 콜드플레이(Coldplay) 정도를 제외하면, 더 이상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를 받는 록 밴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증거들이 제시하는 바는 명백하다. 21세기의 록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상업적 헤게모니를 잃어버렸다. 물론 개별 밴드가 일정 수준의 상업적 성과를 거두는 경우는 찾아볼 수 있고, 소위 ‘인디 록’으로 분류될 법한 밴드가 깜짝 1위를 차지하는 경우도 발생하긴 한다. 하지만 음악 산업에 종사하는 어느 누구도 그러한 아웃라이어를 가지고 ‘대세는 록이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일자리를 잃었을 테니까.

출처: Pazz & Jop Statistics

 

포크와 컨트리를 록의 범주에 포함시킨다고 쳐도, 록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진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여기에 더해, 해당 년도를 대표하는 앨범은 대부분 힙합/R&B이거나, 혹은 전통적인 ‘록’의 문법을 거스른다. 일렉트로닉과 결합하거나( [Sound of Silver], [Merriweather Post Pavillion] ), 팝-사운드-콜라주를 시도하거나( [w h o k i l l] ), 아예 흑인음악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식으로( [Dear Science] ) 말이다.

이걸 가지고 ‘록은 죽어가고 있다’고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말자고? 틀린 말은 아니다. 수많은 평론가가 참여했다고 해도, 패즈 & 잡 역시 하나의 리스트일 뿐이다. 그리고 훌륭한 록 앨범은 여전히 활발하게 만들어지고 있다. ‘요즘 록은 들을 게 없다’는 일부 록 순수주의자들의 불평과는 달리 말이다. 다만 서두에서 밝힌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고 싶다. 현대의 록 앨범이 지닌 ‘훌륭함’은 혁신으로서의 훌륭함인가, 아니면 완성도로서의 훌륭함인가?

사이먼 레이놀즈(Simon Reynolds)는 그의 저서 『레트로 마니아』에서 현대 대중음악의 풍경에 대해 “언제부턴가 음악 뒤에 쌓인 과거의 질량이 중력처럼 작용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굳이 앞으로 나가지 않고 방대한 과거로 돌아가기만 해도 어딘가로 이동하고 움직이는 느낌을 쉽게, 한결 쉽게 얻을 수 있다”라고 진단하며 대중음악의 ‘레트로 중독’ 현상에 대해 논한다. 리이슈 열풍, 거장들의 컴백, 과거의 위대한 유산을 혼성모방하면서 ‘영리하다’는 평을 얻는 수많은 신인 밴드들의 모습은 한 가지 결론, 혹은 의심을 가리킨다. 록은 자기혁신 없이도 과거의 조합만으로 성립하게 된 장르가 아닌가?

레이놀즈의 논의가 대중음악이 내포하고 있는 ‘현재성’과 ‘혁신성’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의미, 혹은 당위를 부여하고 있는 점은 유의해야 한다. 그렇지만 과거의 전설적인 밴드, 혹은 장르를 단 한 차례도 언급하지 않은 록 음반 비평을 오늘날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21세기의 록 음악은 과거에 천착하고 있고 그것을 숨기지 않으며 그를 통해 ‘훌륭하다’는 찬사를 얻어낸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거쳐, ‘혁신’의 생명력은 록이 아닌 힙합과 일렉트로닉 등의 다른 장르로 넘어가고 있다.


동시대적 측면

시대와 호흡하고 있는가의 여부는 한 장르의 죽음을 논하는 데 있어서 엄밀하게 적용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시대와 호흡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사람에 따라 제각각일뿐더러, 대중음악이 반드시 시대와 호흡함으로써 자신의 역할을 증명해야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이는 대중음악에 ‘만들어진’ 당위적 효용을 부여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음악 역시 사회적 산물이고 사회가 지닌 이데올로기를 좋든 싫든 반영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논의를 무작정 회피하는 것 역시 온당치 않다. 록이 오랫동안 청년 및 하위 문화를 해석하는 중요한 문화적 요인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더욱.

21세기의 록이 시대정신과의 연결고리를 상당 부분 상실했다는 것은 힙합 및 R&B를 위시한 흑인 음악과의 대조를 통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는 흑인 음악의 총본산인 미국에서, 2010년대 이후로 특히 두드러진다. 포스트-오바마 시대에도 흑인에 대한 공권력 및 전사회적 차원의 인종차별이 여전히 공고하게 남아 있다는 것이 마이클 브라운 총격퍼거슨 소요찰스턴 교회 총기난사 사건 등의 극단적인 사례로 밝혀졌을 때, 흑인 음악 씬은 해당 이슈에 대해 가장 즉각적으로 반응하면서 명작들을 쏟아냈다. 비욘세 (Beyoncé), 솔란지 (Solange), 디안젤로 (D’Angelo), 켄드릭 라마 (Kendrick Lamar), 자넬 모네 (Janelle Monáe), 런 더 주얼스 (Run The Jewels), 블러드 오렌지 (Blood Orange)… 자신의 음악을 통해 인종차별에 저항하고 정치성을 직조하는 흑인 음악가들의 행렬은 끝없이 이어진다.

이것은 단순히 ‘힙합/R&B은 정치적이지만 록은 정치적이지 않다’는 차원을 넘어선다. 현재의 흑인음악이 보여주고 있는 폭발력은 1960년대 록이 격변하는 사회와 긴밀하게 맞물리면서 급격한 예술적 성취를 이뤄냈던 시절의 모습과 유사한 흐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비틀즈(The Beatles), 벨벳 언더그라운드(The Velvet Underground),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 등의 록 뮤지션들이 자신들의 장르에 이뤄낸 혁신은 68혁명과 베트남전, 새로운 청년 문화 등의 키워드로 대표되는 사회 전환과 연결되었고, 그것은 음악이 사회와 벌이는 상호작용이 가장 극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었다. 2010년대를 대표하는 흑인음악 뮤지션 역시 자신의 사운드적 혁신과 예술적 자의식을 첨예한 사회적 갈등을 도화선 삼아 터뜨리고 있으며, 그것은 동시기의 록이 결코, 어쩌면 다시는 이뤄내지 못할 극점이다.

바꿔 말하면, 이는 어쩌면 록 음악이 그 자신의 역사상 최초로 특정한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유리된 시기를 맞이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위에서 논의한 상업적 측면과 비평적 측면은 이상할 정도로 그 징후를 보여주고 있다. 대중의 관심으로부터는 서서히 멀어지고 있으며, 선대의 아티스트들처럼 대중문화의 거대 담론과 결부되는 대신 그들의 스타일을 모방하는 데에 그치는 것. 자신의 역사에 함몰되어, 스스로를 가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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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 모든 분석은 다만 쇠퇴하고 있을 뿐인 록이란 장르에 대한 침소봉대일지도 모른다. 서론에서 말했듯이, 한 장르가 죽음을 맞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급격하게 늘어난 록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은 – 그것이 그에 대한 긍정이든 부정이든 – 이제까지 록을 들어 왔던, 혹은 록을 대중음악을 듣는 데 있어 ‘기반으로 삼았던’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위기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록은 정말로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대중음악 역사상 최초로 실제적인 무게감을 가지고 다가오고 있다.

이 글에서 아직 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면 그 ‘위기감’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왜 사람들은 록의 죽음에 대해 위기감을 느끼는가? 사실 그런 건 쓸데없는 일이 아닐까? 어쩌면 정말로 중요한 것은 록이란 장르 자체가 아닌,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정구원 | lacelet@gmail.com
음악웹진 [weiv] 편집장,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대중음악을 듣고 그에 대해 쓰고 있으며, 대중음악의 범위와 효과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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