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수강한 ‘소리의 과학과 악기 제작 체험’은 꽤 뜻깊게 기억되는 수업이다. 음향학 기초를 배우고 몇 주만에 바로, 각자의 경험과 지식이 얼마나 됐건 간에 일단 악기 제작에 투입되어야 했던 이 수업에서 나는 또 다른 음악 전공자와 함께 이름 없는 악기를 만들게 됐다. 우리는 호른보스텔-작스의 악기분류법에 애매하게 어긋나는 혼종 악기를 만들어보기로 했고, 그 바람대로 멜로디언의 부속과 팬파이프와 타악기를 결합한 괴악기를 만들었다. 멜로디언을 해체해 금속 리드를 하나하나 자르고, 그 위에 파이프를 달고, 그 파이프 안에 작은 공을 넣어 완성한 그 악기는 숨을 불어넣으면 멜로디언 소리가 나는 동시에 공이 어딘가를 치는 소리가 나는 구조였다. 그러나 연주는 사실상 불가능했고 숨을 불어넣기도 몹시 힘들었다. 관악기라 하기에도 타악기라 하기에도 애매한 이 악기는 듣도 보도 못한 것이긴 했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장점이 없는 악기였다.

그 수업에서 나는 누구라도 악기를 만들어볼 수는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리고 작동가능한, 나름의 의도와 의미를 지닌 악기를 만드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도 배웠다. 나는 책 『음악의 사물들』에서 “사물을 음악적으로 사용한다면 모든 것이 악기가 될 수 있다”1)고 썼고 지금도 그 사용에 관한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악기 제작의 차원에서 그 말에 의지해, 내가 만들었던 것 같은 해괴한 사물을 악기라고 주장하는 건 조금 민망한 것도 같다. 가장 확장된 형태의 악기까지 포괄하는 덕목이 아닌, 조금은 보수적인 차원에서 악기가 가져야 할 어떤 덕목이 있다면 그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소리가 난다는 수준을 넘어 의도한 음향이 실현되게끔 하는 구조 설계, 여러 번의 연주를 견딜 수 있는 내구성, 인체의 고통을 최소화하는 인체공학적 설계, 악기를 만들어야만 하는 나름의 당위 등등. 그리고 이 여러 덕목 중에서도 가장 까다롭겠다고 생각한 건 아무래도 마지막, 당위의 문제였다. 악기가 굳이, 꼭 새로 만들어져야 할까? 자신이 원하는 바로 그 음향을 얻지 못했다면 그건 악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악기를 못 찾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클 정도로 통용되는 악기는 차고 넘쳤다. 수많은 악기가 가상악기로, 라이브러리로 변환되고 있기도 했다. 방법만 익힌다면 소리의 합성과 변조도, 맥스(Max/MSP) 패치로 자신이 원하는 일종의 ‘악기’를 만드는 것도 가능했다. 악기가 아니었던 사물을 악기처럼 쓰는 것도 몹시 흔한 일이었다. 

악기는 소리내는 데 쓰이는 사물 혹은 도구다. 수만가지 사물과 도구가 세계 곳곳에 펼쳐져 있는 지금 악기를 새로 만든다는 건, 어쩌면 불필요할지도 모르는 아주 수고로운 일이었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행착오를 견딜 수 있는 긴 시간과 꽤 많은 재료비와 인력, 그리고 대단히 분명한 목적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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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 속 오르페우스가 리라를 연주했다거나, 중국 창세 신화에 등장하는 여와가 봉황의 모습을 본따 생황을 만들었다거나 등. 악기의 역사는 신화와 종종 연결될 정도로, 그 역사의 첫머리에 발명가의 이름보다는 신적인 존재, 또는 그저 언제부터 어디에서 사용되기 시작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놓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나는 누군가 악기를 발명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조금은 생경하게 느껴왔다. 악기는 마치 게임의 설계자가 마련해둔 아이템 같아서 나의 능력치에 맞는 악기를 잘 찾기만 하면 되는 것 같았다. 간혹 그 쓰임새를 의도와 다르게 사용하거나 해킹해서 써볼 수는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내게 악기는 ‘이미 있는 것’이었다. (음악사 책의 한 구석에서 새로운 악기가 많이 나왔던 시기가 있다고 읽긴 했던 것 같지만, 그게 우리 시대의 일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우리 시대는 이미 만들어진 악기를 개량하거나 기계화하고, 가상악기화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고만 여겼다.)

하지만 악기는 시스템이 마련해준 아이템이 아니고, (아마도) 신이 만든 것도 아니다. 악기는 음악가에 의해, 또는 음악을 가까이해온 이들에 의해 직접 제작되고 변화해온 산물이다. 거기에는 한 사람의 특별한 재능, 예기치 않은 우연, 지난한 노력, 운, 당대의 기술, 그리고 그 악기를 향유해온 시대의 관점이 깊게 관여한다. 음악의 역사가 펼쳐지는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악기가 발명되었을 것이고, 그중 일부가 여러 세대를 거치며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이겠지만, 악기 제작자들의 이름은 많은 경우 사라지거나 있다 하더라도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그래도 비교적 최근에 가까워질수록 제작자들의 이름을 조금 더 잘 찾아볼 수는 있게 됐다. 다시 한번 몇몇 이름들을 기억해본다. 

피아노는 1700년경 이탈리아의 악기 전문가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가 하프시코드의 작동방식을 보완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었다. 글라스 하모니카는 1761년 벤자민 프랭클린에 의해 고안됐다. 색소폰은 1840년대에 벨기에의 악기 제작자 아돌프 삭스가 발명했다. 초기 전자악기로 아날로그 신시사이저의 시초가 된 텔하모늄은 미국의 타데우스 카힐이 1896년경에 발명했다. 테레민은 1920년경 러시아의 음향물리학자 레온 테레민이 발명했고 옹드 마르트노는 1928년 프랑스의 공학자 겸 첼리스트였던 모리스 마르트노가 발명했다. 1952년에는 프랑스의 바셰트 형제가 마찰식 유리 악기인 크리스탈 바셰트를 만들었다. 1950년대 이후 꾸준히 자신의 음악과 함께 선보인 해리 파치의 악기들도 있다. 1968년에는 발명가 현광문이 9년간의 노력 끝에 가야금을 응용하여 피아노로 발전시킨 ‘가야금식 피아노’의 시청회를 개최했다. 2000년에는 손으로 연주하는 타악기 행드럼도 만들어졌다. 수력으로 작동하는 악기 하이드롤로폰(Hydraulophone)은 2005년에는 스티브 만이 연구 끝에 명명‧공개했다. 터키의 괴르켐 셴은 수년간의 개발을 거쳐 2014년경 야이바하르(Yaybahar)를 공개했다. 물론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고 있는 여러 악기 제작사들의 산물, 예컨대 롤리사의 시보드(Seaboard)를 비롯한 온갖 신시사이저들도 빼놓을 수 없다. 아마도 이건 널리 알려진 이야기 중에서도 극히 일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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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 제작의 목표는 악기마다 다르고 그렇게 만들어진 악기들의 운명도 제각각이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조금 더 관심있게 살피게 된 몇몇 악기들이 있다. 그건 상용화와는 조금 멀리 떨어진 악기들로, 창작자들이 자신의 음악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모종의 이유로 만들게 된 악기들이다. 임의로 이들을 분류해보자면 대략 아래와 같다.

하나는 새로운 작동방식과 소리를 필요로 하는 전자음악가들의 악기(예컨대 미셸 와이스비스의 ‘핸즈’, 레티시아 소나미의 ‘레이디스 글러브’를 비롯, 한이삭의 ‘nUFO’ 같은 경우)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음악 체계를 정확히 구현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악기(말하자면 해리 파치의 악기들)이며, 또 다른 하나는, 상징물로서의 악기다. 악기를 제작하게 된 이유와 그 악기의 형태가 소리만큼이나 중요한 경우다. 

최근 내가 가까이에서 살펴보며 곱씹어온 악기들은 바로 이 마지막 분류에 속한다. 백정기와 이금희의 ‘촛불발전기와 전자첼로’, 김재훈의 ‘PNO’, 진유영의 ‘신목’, 프로토룸의 ‘스몰빅’(SmallBig_SØ) 등. 이들은 다른 악기와 마찬가지로 연주를 위해 만들어졌지만 여기에는 그 이상의 맥락 또는 질문들이 내재한다. 전자첼로는 첼로의 본래 재료와 더불어 3D 프린터로 제작한 재료들을 단단히 결합해 만든 첼로로, 독립적인 악기로도 연주될 수 있지만 백정기의 촛불발전기와도 함께 연주된다. 전자첼로와 연결된 촛불발전기는 촛불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로 악기 소리를 증폭하는 소형 앰프를 작동시킨다. 그 과정에서 촛불의 열에너지뿐 아니라 촛불에 담긴 어떤 염원의 마음, 상징적인 힘이 첼로 소리를 증폭하는 힘으로 쓰이고, 촛불의 흔들림은 소리의 작은 변화로도 이어진다. 촛불의 힘으로 증폭되는 전자 첼로 연주는 음향적으로도, 감각적으로도 결코 보편의 첼로 연주와 같지 않다. 김재훈의 PNO는 업라이트 피아노를 해체해 만든 악기로 피아노의 작동방식과 그 악기가 가져온 여러 맥락들을 하나둘 역전한다. 가정용 악기가 아닌, 제의에서 쓸법한 외양으로 (의도적으로) 탈바꿈한 그 악기는 제 모습처럼 거친 소리를 낸다. 그건 때때로 상아를 뺏긴 코끼리의 울음 같은 소리를 내기도 한다. 프로토룸의 스몰빅은 질문을 품은 악기다. “1KB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부터 만들어진 이 악기는 여러 리듬 패턴을 생성하는 1KB짜리 데이터들로 이루어져 있고, 조작방법도 그에 상응하듯 아주 간단하다. 이 악기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이 1KB짜리 데이터들을 엮어 만드는 약 30분간의 꽤 거대한 퍼포먼스를 보는 것이다. 악기 이름이 ‘스몰’에서 멈추지 않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이 악기들은 그간 내가 이해해오던 악기의 역할에 꼭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가 가져왔던 “서구 중심의 시각인 연주를 위한 기구, 음악에 사용하기 위해 소리를 만드는 측면에서 악기를 인식하고 사용”2)하는 관점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들의 악기는 일차적으로 연주를 위한 도구로 쓰이고 또 이전과 분명히 다른 소리를 생산하지만, 이 악기들의 역할은 결코 소리 경험을 만드는 데 국한되지 않는다. 소리낸 뒤 그 몫을 다하고 누군가의 시야에서 사라져도 상관없지 않은 이 악기들은, 그들이 몸체를 울려 만들어낸 소리만큼이나 그들 자신에 대한 주목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작동하며, 왜 이런 형태가 되어야만 했는지 등. 이 악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소리와 더불어 그와 연결된 이야기를 함께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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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난다는 수준을 넘어 의도한 음향이 실현되게끔 하는 구조 설계, 여러 번의 연주를 견딜 수 있는 내구성, 인체의 고통을 최소화하는 인체공학적 설계, 악기를 만들어야만 하는 나름의 당위 등등. 이 기준에 맞추어 봤을 때 앞서 언급한 악기들 중 일부는 꽤 취약하다. 하지만 이 악기들에서 찾을 수 있는 나름의 당위와 질문, 생각들은 내가 보수적이고도 서구적인 관점에서 상상해온 악기의 덕목들을 슬며시 지나치게 만든다. 나아가, 악기 제작자라고 부르긴 어색하고 연주가나 작곡가라고 부르기에도 좀 빠듯한, 어떤 음악 창작자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게 한다. 제각각의 악기들이 만들어진 이야기와 맥락을 살피는 일은 그들의 ‘음악’을 대하는 일과도 유사한 것 같다. 

일년 전쯤 나는 이 창작자들의 악기를 다른 지면에 짧게 소개하며 이렇게 썼다. “한 악기의 역사를 해체하고 재구성하기, 나의 음악 활동의 목표와 정확하게 맞물리는 악기를 만들기, 인간과 악기가 맺어왔던 몸의 관계를 바꾸기, 소리의 생산 구조를 바꾸기, 다른 주체자를 통해 연주하기 등. 지금 새로운 악기를 만드는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쩌면 ‘소리 그 자체’가 아니라 악기라 불리는 사물의 물리적 구조를 바꿈으로써 다른 음악을 상상하고, 사물 및 소리와 다른 관계를 맺고, 그로부터 생겨나는 다른 사유를 담아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들의 작업은 우리의 필기도구가 사유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을 넘어, 다르게 사유하기 위해 새로운 필기도구를 만드는 과정과도 닮았다.”3)

그리고 짧게나마 고민을 더 해본 지금은, 필기도구에 비유했던 그 악기가 아무래도 음악 바깥의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지금 나는 그들의 악기를 음악과 같은 선상에 놓아보게 된다. 만들어지는 방식은 물론 다르지만 악기 또한 마찬가지로 음악적 창작물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악기가 어떤 전통을 어떻게 따를지를 결정하고, 그 전통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 선택하며, 어떤 방식으로 소리낼지 그 음향적 구조를 고민하고, 어떤 몸짓으로 연주하게 될지를 살펴보는 과정은, 그 대상이 물질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음악적인 고민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음악을 통해서도 할 수 있었을 일을 어떤 이들은 악기를 통해서 한다. 누군가는 음악보다 더 분명하게 어떤 음악적 의지를 드러낼 수 있기 때문에 악기를 만든다. 그런 사례들로부터 나는 음악을 위해 만들어진 도구가 아닌, 창작물로서의 악기를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내가 ‘음악’이라 여겨온 것의 범위와 그 중심점이 조금씩 재조정된다. 

짧은 첨언: 악기의 무대에 관한 생각

내가 생각하기에 아무래도 이런 악기를 만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은 소리가 가장 위력적일 수밖에 없는 음반도 아니고 특정한 음향에 꼭 맞게 설계된 콘서트홀도 아니다. 이 악기들에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은 온갖 매체와 무대언어가 공존할 수 있는 넓은 의미의 극장인 것 같다. 이 악기가 어째서 만들어졌고, 왜 이런 형태가 되었으며, 나의 음악과는 어떤 관계를 맺는지 그 안팎의 이야기를 모두 드러내기 위해서는, 이것이 보편적인 악기의 관습을 넘어선 만큼 음악의 관습을 넘어선 곳으로 향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다.

어쩐지 나는 이 악기의 존재를 ‘공연예술로서의 음악’과 늘 연결해서 떠올릴 뿐만 아니라, 악기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건 그 음악가들이 여러 장르의 공연예술에서 오랜 시간 경험을 축적해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내가 떠올리는 공연예술로서의 음악은 콘서트를 넘어서지만 음악극은 아닌 어떤 것인데, 조금 더 직접적으로는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아르코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여우락, 세종문화회관 싱크넥스트 등등의 무대에서 만날 수 있는 음악가의 공연들이다. 꽤 대규모 예산이 투입되어 여러 무대 언어를 다룰 수 있으면서도 그래도 장르상 음악이어서 일단 음악이 중심에 놓이는 사례들이다. 

이런 ‘공연예술로서의 음악’이 필요로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인 듯하다. 첫째는 구심점이 되어줄만한 서사. 둘째는 무대의 온갖 장치들로 만들어낼 수 있는 스펙터클. 음악극이 아닌, 목소리 없는 연주 중심의 공연에서는 잘 다뤄지지 않던 것들이다. 음악적 스펙터클은 팝 음악가들의 공연 속 화려한 퍼포먼스로도, 대형 공연장 전체를 빠방하게 울려대는 관현악의 음향으로도, 대단히 눈을 사로잡는 오디오-비주얼로도 종종 성취되지만 1인 연주자나 소편성 앙상블을 주로 다뤄온 음악가들이 얻기는 다분히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서사는, 결국 이 모든 것이 음악 바깥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아주 쉽게 받게 하는 얄궂은 것이어서,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다뤄야 음악이 중심에서 밀려나지 않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요소다. 

새로운 악기의 탄생, 그리고 그것을 조율해나가는 창작자의 이야기는 이 모든 것을 절묘하게 돌파하게 해주는 유용한 주제처럼 보인다. 새로운 악기에 관한 이야기라면, 음악을 중심에 두면서도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엮어나갈 수 있고, 여전히 ‘퍼포먼스’에 집중할 수 있게 할 수 있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연주되는 물건인가?’라는 궁금증이 생겨날 것이므로). 나아가 음악으로 담아낸다한들 잘 소통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어떤 생각을, 눈앞에 보이는 사물에 다 담아 내놓을 수도 있다. 악기는 곧 그들의 서사고, 동시에 무대 위에서의 스펙터클을 담보한다. 이 일은 너무 매력적이고 위력적이기 때문에 조금 아슬아슬해보이기도 한다. 결국 음악에 관한 이야기가 음악을 뒤덮어버리는 것은 아닐지, 혹은 음악보다 음악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욱 흥미진진하게 다가오는 것은 아닐지… 물론 이런 물음 자체가 그 정체모를 ‘음악’을 어떤 식으로든 떠받들고 보호하려는, 몹시 낡은 관점이라는 생각도 든다.

내게 음악은 울린 뒤 사라지기 때문에 아름답다. 하지만 어떤 순간엔 음악이 어딘가에 남아있기를, 그것을 보고 만져볼 수 있기를 바라게 되기도 한다. 아마도 내가 이 악기들을 바라보는 이유는 그런 마음 때문일 것 같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악기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조금씩 팽창하고 있는 음악의 무대를 나란히 생각해본다. 시대가 음악에 기대하는 것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그리고 음악에서의 악기와 연주, 공연의 개념이 어떻게 뒤엉키며 흐려지고, 넓어지는지 살펴야 한다는 마음이 남는다. 


1) 신예슬, 『음악의 사물들』, 작업실유령, 2019, 81. 
2) 세계민속악기박물관, 『인간과 악기: 악기 인류학』, 모노폴리, 2016, 29. 
3) 신예슬, “악기 만드는 창작자들”,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 24』, 2024, 104.
*이미지 제공: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서초 / 촬영: 백스텝포워드

신예슬 shinyeasul@gmail.com
배움을 위해 가끔 글을 쓴다. 

*이 원고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비평활성화지원(개인)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