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연희 증강랩(LAB) 과정공유 프로젝트 “매듭” 포스터
작년 여름, 서울문화재단은 동시대 연희1 종합적 지원체계 구축2의 일환으로 <전통연희 증강랩(LAB)>을 설계하고 참여자를 모집했다. 연구실험실의 형식을 빌려 온 이 프로젝트는 ‘결과’가 아닌 ‘과정’에 역점을 둔다는 점에서 여타 지원 사업과 변별된다. 작품의 완성이 아니라 예술가의 역량강화를 목표로 설계된 사업이 부재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선례는 전통연희가 아닌 다른 장르에 특화된 사업이었다. 그렇다면 <전통연희 증강랩(LAB)>이 작품의 완성에 수반되는 비용을 지원하는 일반적인 전통예술 지원사업과 거리를 두며 인큐베이터로서의 역할을 자처한 이유는 무엇인가. 프로젝트의 의도가 명백하게 감지되는 상황에서 이와 같은 질문은 그다지 유효하지 않아 보인다. <전통연희 증강랩(LAB)>은 ‘예술가’에 대한 중·장기적인 지원이 전통예술계의 지형을 바꾸리라는 판단 아래 기획된 청사진이다. 오히려 비평적 관점에서 중요하게 대두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발굴’과 ‘육성’이라는 수직적 위계와 제도의 허영을 허물고 예술가의 내면에 관심을 두는 이 실험은 전통예술계의 유의미한 출발점으로 기능할 수 있는가.
먼저 프로젝트의 주요 골자부터 살펴보자. 전통연희 종목을 실연할 수 있는 참여자를 10명 내외로 선발하고 3개월간 다양한 워크숍을 진행한다. 참여자들은 프로젝트의 말미에 자유로운 형식의 프로토타입 작품을 제작하여 선보이고, 프로젝트의 전 과정은 디지털 아카이브에 축적된다. 참여자에게 주어진 과제는 자신의 질문을 구체화하고 무대로 구현하는 방법을 밀도 있게 고민하는 것이다. 더불어 특정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레퍼런스를 찾아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일은 프로젝트 전 기간에 걸쳐 이루어진다. 그림책의 원리와 구조를 살피며 이미지와 서사를 구축하는 방식을 연구하거나 목재, 종이 등과 같은 일상적 사물을 실험하며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탐색하기도 한다. 자신의 신체를 낯설게 감각하는 워크숍도 마련되었다. 세상의 모든 음악가가 그러하듯 연희자도 여러 기술을 오랜 기간 반복적으로 훈련한다. ‘사물(四物)’로 대변되는 악기뿐만 아니라 노래, 재담, 춤, 기예를 두루 익혀야 하며 때에 따라 복잡하고 가변적인 의례 절차를 외워야 한다. 하지만 기술을 반복적으로 훈련하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 관성화된 몸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기계적인 수행의 의도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숱하게 반복했던 동작을 객관화 하는 연습을 통해 참여자들의 신체는 구체적인 감각들로 채워진다.
<전통연희 증강랩(LAB)>은 참여자들의 잠재된 가능성이 발휘될 수 있는 조건을 나름의 방식으로 배열한 장치일 뿐 작품의 완성이나 탁월함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따라서 프로토타입 작품만을 ‘결과물’로 확정할 수 없다. 오히려 참여자 개개인에게 촉발된 미시적 차원의 변화가 결정적 성취로 부각된다. 경합 상태에 놓인 질문과 정답의 연쇄가 마찰을 일으키며 참여자 내면에 어떠한 균열을 만들어 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참여자들 저마다의 진술은 아카이브 도처에서 발견된다. 누군가는 ‘놀이’ 혹은 ‘제의’라는 전통연희의 본질적 속성에 천착하지 않고 예술적 사유로 연결될 수 있는 작업을 상상했다. 도제식 교육의 관습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고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거나 익숙하지 않은 타 장르 예술가들과의 수평적인 협업 방식을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통을 둘러싼 여러 쟁점도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교차되었다. 전통연희가 이루어지는 ‘판’의 속성을 살피거나 전통의 의미와 본질을 서로 묻고 답했다. 더불어 전통연희에 대한 생각과 자신의 질문을 예전보다 선명하게 언어화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증언은 대부분의 참여자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이 모든 과정은 <전통연희 증강랩(LAB)>의 가장 큰 성취이자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다. 모종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상정했던 전통예술계의 문제적 ‘현재’와 이상적이라 가정한 ‘미래’가 무엇인지 함구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단서는 프로젝트의 전 과정이 함축된 다큐멘터리와 프로젝트의 기획 의도가 제시된 몇 가지 서류로부터 얻을 수 있다. 결론부터 서둘러 이야기하자면, 이 프로젝트는 전통연희의 ‘동시대성’을 모두가 마땅히 지향해야 할 가치로서 의심 없이 전제하고 있다. 책임연구원 김정이는 <전통연희 증강랩(LAB)>이 “도제식 교육과정에서 도달한 지점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새로운 동시대성의 삽입이 가능한가”에 대한 실험이었음을 밝히고, 실험과정에서 유의미한 성취가 있었음을 언급한 바 있다. 게다가 “새롭게 생성되는 과정에 전통은 의미가 있다”는 진술에서 이 프로젝트의 설계자들이 암묵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문제적 ‘현재’도 어렴풋이 유추할 수 있다. 동시대성을 강력한 기치로 내세웠기 때문에 동시대성 담론의 정당성에 관한 치밀한 논쟁은 ‘과정’에 쉽사리 포섭되지 못한 듯 보였다. 당연히 프로젝트의 목표와 지향점을 본질적 차원에서 점검하는 일도 모든 과정에서 희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전통예술계에서 동시대성은 소란 없이 고착된 기표 중 하나이다. 흔히 전통이 획득하거나 회복해야 하는 것으로 상정되며, 다른 장르와 결합하거나 다른 장르의 문법을 피상적으로 답습하는 일련의 시도를 지시하는 데 무분별하게 남용되고 있다. 게다가 적지 않은 기획자와 평론가가 자신의 견해를 정당화하는 세련된 처세술로서 동시대성 담론을 소비한다. 전승의 개념에서 벗어난 모든 시도를 동시대적이라고 선언하고 있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놀랍게도 동시대성 담론을 제도적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장르는 오직 전통예술뿐이며, 이러한 현재는 어떠한 논란 없이 당연시 되고 있다. 예술가의 질문이 무엇인지, 그 질문이 작품으로 정교하게 구현되었는지, 한국의 전통을 전략적으로 취사선택하며 서구의 미적 기준에 부합하는 맥락을 조형하진 않았는지에 대한 논쟁은 소거되어 있다. 작품의 구조나 형식, 심지어는 질문의 내용이 너무 전통적이거나 지역적인 미적 기준을 따를 경우 성공으로부터 자주 배제되는 것이 현실이다. 현재의 동시대성 담론은 끊임없이 서구의 시선 속에서 전통의 유효성을 입증해야 하는 상황에 대한 어떠한 논의도 없이 이를 정당화하는 기제로 활용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만약 이러한 의심에 반박이 어렵다면 동시대성은 그저 잘 다듬어진 이국성의 재생산을 부추기는 담론으로 추락할 뿐이다.
예술가는 자신의 질문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예술적 질료를 선택한다. 그 질료는 예술가의 의도에 따라 적재적소에 동원되어 작품의 외부 혹은 내부를 구성할 뿐이다. 결국 ‘창작’의 핵심은 질문의 본질에 있다. 어떤 질문을 할 것인지, 그 질문을 어떠한 방식으로 발전 시켜 나갈 것인지에 따라 작품의 구조나 형태가 결정된다. 이 모든 훈련은 창작의 기본이므로 전통예술계에서 활동하는 창작자들에게도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시효가 만료된 전통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해서 다른 장르의 결합을 고민하고 이를 동시대적이라 명명하는 것은 문제적 사안이다. 이러한 사고야말로 전통예술을 끊임없이 자신의 존립 근거를 해명해야 할 위치로 몰아넣는다. 게다가 전통예술을 둘러싼 모든 질문의 방향과 예술가들의 실험이 동시대성으로 귀착되거나 그래야만 하는 분위기가 조장되고 있는 상황은 안타깝기만 하다. 동시대성은 무엇이며, 동시대성 담론은 왜 필요한가. 동시대성을 획득하거나 회복해야 한다는 선언의 의미는 무엇인가. 동시대성 담론의 부상으로 미처 발견하지 못하거나 잃게 된 질문은 무엇인가. <전통연희 증강랩(LAB)>은 앞서 나열된 질문을 비판적으로 재고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서 충분히 기능했는가. 마지막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여전히 유보적이다.
앞서 질문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했듯 나는 <전통연희 증강랩(LAB)>이 참여자에게 던지는 질문의 방향을 조금 비틀어 볼 것을 제안하고 싶다. ‘동시대성’이 아니라 ‘전통예술’에 대한 더욱 적극적이고 맹렬한 질문이 수반되었으면 한다. ‘전통’과 ‘창작’을 둘러싼 첨예하고 시급한 문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전통을 유지하며 관객에게 본질을 전달하는 방식을 고민하기 위해 무대의 형식이나 다양한 매체를 탐구할 수 있다. 우도농악이 지닌 가락과 진풀이의 호흡을 시각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현대무용의 문법이나 오디오비주얼을 연구하는 것도 가능하다. 역사적 텍스트가 달라붙어 신화화된 봉산탈춤의 ‘원형’을 해체하거나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성 속에 형성되는 판의 원리를 실험할 수도 있다. 최근 나에게 무엇보다 중요하게 다가왔던 문제는 연희자의 신체이다. 대부분의 연희자들은 남성중심적 위계질서 속에서 훈련받는 동시에 자신이 습득한 전통의 윤리성을 의심하고 점검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청 앞에 놓인다. 기존의 수행을 관성적으로 답습하지 않는 새로운 주체를 선언하거나 자신의 신체를 무대 위에 재맥락화 하는 방식을 고민하는 일은 오늘날 수많은 연희자가 당면한 과제이다. 이처럼 자신의 몸과 몸을 둘러싼 사회로부터 시작된 질문을 정면으로 돌파해볼 수도 있다. 전통연희라는 렌즈를 통해 던질 수 있는 화두는 무수히 많고 앞서 열거한 예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가장 급진적이고 논쟁적인 담론은 “밖”이 아닌 전통예술의 가장 깊숙한 “안”에서 시작될 수 있다고 믿는다.
비판적인 시선에서 진단하긴 했지만 <전통연희 증강랩(LAB)>은 신중하게 설계된 프로젝트인 것만은 확실하다. 활동 전반에 걸쳐 이루어지는 다방면의 활동과 리서치, 서로를 존중하는 대화는 ‘창작’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강력한 도제식 시스템 아래에 작동하는 전통연희의 생태계를 고려하여 상하 관계의 모순이 발생하기 쉬운 기존의 멘토링(mentoring) 시스템과는 확실하게 선을 긋기도 했다. 대신 다방면의 ‘조력자’가 참여자와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프로젝트를 함께 만들어 나갔다. 다만 서구에 끊임없이 말을 걸어야 하는 전통예술계의 현 상황에 대한 논의는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고, 이러한 시선 아래에서 모든 활동과 레퍼런스의 비판적 해부가 이루어져야 한다. 전통예술의 동시대성 탐색이라는 목표를 비판적 관점에서 재점검한다면 질문의 기술이나 다양한 매체들에 대한 탐구에도 구체적인 힘이 실릴 것이다. 곧 두 번째 <전통연희 증강랩(LAB)>이 예정되어 있다. 동시대성에 매몰되지 않은 예리한 질문을 더 많이 만나고 싶다. 이 글은 <전통연희 증강랩(LAB)>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기보다 기존의 진로를 방해하거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게 만들기 위해 완성되었다.
성혜인 | apollo_cs@naver.com
전통예술과 민속을 공부했다.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전통을 사유하는 방식을 살펴보는데 관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