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라이언 이노(Brian Eno)를 연상시키는 평온한 앰비언트, 재기발랄한 소리가 뛰어 노는 댄스 음악, 저 너머에서 길어 온 듯한 불길함이 감도는 노이즈의 범람… 최영의 음악을 들으며 나는 전자음악의 수많은 지대 위에 자신을 걸치고 있는 어떤 비정형의 존재를 상상한다. 듣는 이에게 자신의 모습을 쉽사리 하나로 결정할 수 없게 만드는 그 존재는, 그러나 어느 순간 청자의 마음 속에 스며들면서 각자의 심상과 공명한다. 어느새 내 마음 한 켠에도 자리를 잡아 버린 그 비정형의 존재에 대해 알아보고자, 다재다능하고 활발한 아티스트인 최영과 ‘음악’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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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영어 예명이 ‘Yeong Die’인지가 궁금합니다!
아직도 종종 제 이름은 ‘Young Die’로 표기되곤 합니다. 수정을 요청하는 일은 이제 익숙해요. ‘Young Die’가 한국어로 ‘젊어 죽어’란 말인데, 사실 그 부분을 노린 게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고요. (웃음) 제가 예명을 지을 당시에 공교롭게도 고려의 장군인 ‘최영’과 ‘DIE’라는 말에 꽂혀 있었습니다. 누구와도 겹치지 않는 이름을 원하기도 했고요.
그러고 보니 한국어 활동명이 ‘최영’인 것이네요. 인스타그램 아이디는 ‘lildead19’이고. (웃음) 말놀이 같은 이름도 좋아해서, 이 부분에 대해 질문을 드리고 싶었어요.
‘Forever Young’, ‘Olive Young’, 많은 ‘영’이 있지만, 저는 ‘Yeong’으로 표기합니다. 사람들을 너무 헷갈리게 하는 것 같아서 항상 죄송한 마음이 있습니다. (웃음)

아쉽게도 김민희 작가님의 전시에 제가 직접 찾아뵙진 못했지만, [Parallel Cosmo]를 정말 즐겁게 들었어요. “A.S.C (At Space Court)”의 활기찬 사운드나 “Undead Yede”의 묵직한 킥 소리를 들으면서 앨범 전반적으로 과거 영 님의 작업보다 다이내믹한 부분이 보다 도드라진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김민희 작가와의 협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앨범 작업 과정에 대해서 소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무척 흥미로운 작업이었습니다. 전시장에 틀어 둘 음악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전시 도록 대신 그 음악을 카세트 테이프로 제작하겠다고 하셨어요. 전시장의 절반은 그림으로, 나머지 절반은 음악으로 채우고, 도록 대신 음반을 관람객에게 제시하는 미술가의 시도… 파격적이면서도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흔쾌히 섭외에 응했습니다. 최영과 김민희의 음반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민희 작가의 작업이 담겨 있고, 동시에 최영도 담겨 있는 그런 음반. 그래서 김민희 작가의 작업을 이해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고, 그림이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보고… 그리고 그만큼 제가 생각하는 이 앨범의 세계관을 만들 시간도 필요했죠. 제 이전 음악들보다 좀 더 다이내믹해졌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꼭 [Parallel Cosmo]라서 그랬다기보다는, 제가 그동안 작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달라진 부분이 꽤나 반영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업은 생각보다 정말 빨리 나왔어요. 한 달도 안 걸렸던 것 같은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재미있었고, 또 만족스럽습니다. 한편으로는 정말 내 이름을 건 앨범을 만든다고도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어요.
[Parallel Cosmo]를 들으면서 올해 초부터 – 듀오 살라만다(Salamanda)이기도 한 – 우만 서마(Uman Thurma), 예츠비(Yetsuby) 님과 함께하는 크루 컴퓨터 뮤직 클럽(Computer Music Club)이 떠올랐어요. 예츠비 님이 [Parallel Cosmo]의 마스터링을 맡아 주신 것도 있지만, 영 님께서 만드셨던 트랙들의 에이펙스 트윈(Aphex Twin)적 정신없는 모먼트가 [Parallel Cosmo]와 이어진다는 생각도 들어요.
컴퓨터 뮤직 클럽 트랙의 모든 마스터링은 예츠비가 도맡아서 진행했죠. 그간 지켜본 그의 실력을 보고 제가 개인적으로 [Parallel Cosmo] 작업을 의뢰했습니다. 에이펙스 트윈은 전자음악가 만인의 연인이죠. (웃음) 그래서 제 음악에서 잠깐이나마 그를 떠올려 주셨다면야 영광입니다.
abs와의 인터뷰에서 ‘각자 자기들의 ‘본진’과 다른 음악을 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말해 주셨는데, 컴퓨터 뮤직 클럽을 위한 음악을 만들면서 어떤 다른 점을 노리셨는지가 궁금합니다.
저희 세 명 모두 디제잉도 하고, 댄스 플로어 음악을 무척이나 좋아해요. 그렇지만 각자가 직접 만드는 음악들은 그렇지 않거든요. 그런 세 명이 모여 댄스플로어 음악을 만드는 것 자체가 재미있는 포인트가 될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abs 인터뷰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저희가 모이게 된 계기가 씬의 침체를 뚫어보자, 그런 모토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파티 등에서 세 분의 디제잉을 실제로 경험하신 분들은 정말 신난다는 걸 알 텐데, 레코딩으로만 세 분의 음악을 접하신 분들은 그런 면을 잘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것이 컴퓨터 뮤직 클럽의 어떤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네, 그냥 완전히 우리가 하던 거랑 다르게 만들자고 대놓고 이야기했어요. [Vol.2] 같은 경우에는 아예 BPM을 160으로 잡아 놓고 작업하기도 했고요.
쓰레기 더미로 쌓인 컴퓨터나 키보드에 관통상을 입은 모니터를 잡은 앨범 자켓, BPM 하나만 적어넣은 트랙 제목을 보면 얼핏 ‘진지한'(혹은 ‘엄근진’한) 일렉트로닉 음악을 만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음악을 들어 보면 생각보다 훨씬 활기차고 왠지 모르게 그런 ‘진지함’을 뒤튼 듯한 유머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해요. 세 분께서 이런 콘셉트와 이미지를 어떻게 구축하셨는지에 대한 과정이 궁금합니다.
‘컴퓨터 뮤직 클럽’이라는 이름이나 옛날 컴퓨터를 내세우는 90년대풍의 이미지 콘셉트 등을 제가 제시한 건 맞아요. [vol.1]의 시초가 된 INTRO 트랙도 제가 만들어서 ‘얘들아 이거 어때, 이렇게 하자’라고 했었고요. 90년대 콘셉트를 가져온 것은 제가 그래도 조금이나마 알고 있고, 실제로 구현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2000년대생들의 것은 잘 모르기 때문에 (웃음) 제가 잘 알고 할 수 있는 콘셉트를 설정했습니다.
어떤 면에 있어선 유머러스하고 허구적인 구석도 있기를 바랐어요. ‘레이블이지만 레이블은 아니다(Yes, a label, but not really.)’라는 문구도 거기서 나온 건데… 컴퓨터 뮤직 클럽을 기획하면서 저희는 레이블이란 대체 뭘까, 하는 생각∙고민들을 많이 나누었어요. 셋 모두 레이블이 없는 상태에서 앨범을 낼 때마다 다른 레이블에서 발표하는 식으로, 그렇게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레이블의 역할은 무엇이며 좋은 레이블은 뭘까? 큰 레이블에 가면 좋은가? 이런 생각들이 모여서 ‘레이블이지만 레이블은 아니다’라는 문구를 설정하게 되었네요.
제가 제시하긴 했지만, 이런 콘셉트를 [Vol.3]까지 끌고 가면서 확장시킬 수 있었던 건 우만 서마와 예츠비의 역할이 컸습니다. 굉장히 흡수를 잘 해 주었고… 저희 팀워크가 좀 대단해요. 셋이 죽고 못 사는 그런 게 있습니다. (웃음)
[Threshold Value]는 멜버른의 레이블 클립.아트(clipp.art)를 통해 발표되었습니다. 국내에선 박혜진의 [IF U WANT IT]을 선보였던 레이블로 잘 알려져 있는데, 클립.아트와 어떻게 연이 닿게 되었는지를 간단히 소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Threshold Value]를 완성한 후에 20곳 이상 데모를 돌렸는데, 전혀 성과가 없었습니다. 지쳐 있던 차였는데, 뜬금없이 제가 컨택도 하지 않았던 클립.아트에서 연락이 왔어요. [Pizzapi]를 흥미롭게 들었다며 요즘 작업하고 있냐고 물어보더라구요. 그래서 준비되어 있던 [Threshold Value] 데모를 보냈고,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습니다.
작년 한 해 동안 [Threshold Value]를 들으면서 저는 이 앨범이 굉장히 ‘일상적’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이따금씩 제가 일상에서 위화감을 느끼는 순간이 있을 때마다 앨범에 실린 곡들이 그 위화감을 증폭시키는 기묘한 우연을 자주 접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밤에 지쳐서 일을 하고 있는데 “Not Necessarily Life”가 곡 셔플을 돌리다 흘러나오거나, “Anywhere Is Fine”을 들으면서 주차할 곳을 못 찾고 빙빙 맴돌거나, “Soism”을 들으면서 멍하니 버스에 갇혀 있는 저를 느끼는, 그런 경험이 떠올라요. 영 님이 이들 곡을 만드시면서 어떤 일상을 결부시켰는지, 아니면 일상과는 아예 딴판인 뭔가를 상상하셨는지가 궁금해요.
일단 이 질문을 받고 나서 ‘정말 아름답고 멋진 장면들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약간 뮤직비디오 같고. (웃음) 저는 [Threshold Value]를 ‘일상적인 앨범’이라고 생각하며 만들지는 않았지만, 구원 님의 질문과 구원 님이 처했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일상적인’이란 말에 동의가 되기도 해요.
[Threshold Value]를 만들면서, 제 음악이 굉장히 듣는 사람을 기다리게 만드는 음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올해 하반기에 나올 앨범을 작업하면서도 이런 부분을 다시금 느끼고 있고요. 앨범의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참는 한계점’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는데, 우리는 언제나 뭔가를 참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항상 뭔가를 참고 있다 – 싫은 걸 참고, 좋은 것도 가끔은 조절해야 하고,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하면서 앨범을 만들었어요.
‘기다리게 만든다’는 말씀이 제가 곡들에서 느낀 바와 맞닿는 게 있고, 그런 부분을 제 개인적으로는 일상의 지속이랑 연관시킨 것이 아닌가 싶어요. 앨범 소개문에서 ‘세 달 동안 매일 아침 9시마다 작업을 했다’고 쓰여 있는데, 이 부분이 혹시 관련이 있나 하는 생각도 있었고요.
그냥 쭉 끌어가는 느낌이죠. 제 일상이, 뭔가 계속 참고 있는 그런 게 아니었나 싶어요. (웃음) 9시마다 작업을 했다는 것은 조금 과장이 섞이긴 했지만, [Pizzapi] 이후 내놓는 첫 앨범이고 뭔가 제대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정말 시간을 많이 할애했고 노력했습니다.
“Anywhere Is Fine”과 “Worstward Ho”의 연속에서 저는 일종의 지독함을 느꼈는데, 이 곡을 들으면서 어떤 견딜 수 있는 정도의 고통, 하지만 사라지지 않는 고통이 청각의 형태로 지속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앨범 소개문에서 이 두 곡에 앨범의 테마가 체현되어 있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어떤 점에서 그러한지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음악이 사람한테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음악을 참고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케이팝이나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 그런 말이 나오잖아요, ‘5초 내로 사람을 사로잡아야 한다’. 그 정반대로 해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이 음악이 나를 어디까지 데리고 가는지, 어떻게 흘러갈지, 언제 끝나는지, 어떻게 끝낼 거길래 이렇게 질질 끌면서 나를 기다리게 하는지… 궁금하게 만들고 싶었어요.
3D 아티스트 을지로 김(uljiro kim) 님께서 이 두 곡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해 주셨어요. 뮤직비디오 제작에 있어 어떤 식으로 의논을 했는지도 궁금합니다.
을지로 김 님께도 방금 말씀드린 것과 완전히 같은 설명을 드렸습니다. 사실 감사하면서도 죄송했던 게, 너무 긴 트랙이잖아요. 비디오를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러닝타임이 길면 힘들어지니까요. 그래서 다른 곡을 의뢰할까도 정말 많이 고민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앨범의 테마곡은 이 두 곡인 거에요. 두 곡 중에 하나만 해도 안 되고, 꼭 이 두 곡을 다 만들어야 할 것 같았죠. 죄송한 마음이었지만, 을지로 김 님께서 제 의도와 비전에 동의해 주셨고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정말 기뻤죠.
을지로 김 님과는 온라인 전시 《Quarantine Études》에서도 함께 협업했는데, 뮤직비디오 제작은 《Quarantine Études》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어요. 의뢰 자체는 2020년 연초에 했었는데, 레퍼런스 회의가 많았고 을지로 김 님께서 하반기에 굉장히 바빠지셔서 뮤직비디오 릴리즈는 조금 늦어지게 되었네요. 그렇지만 기다린 만큼 너무나도 멋있고 마음에 드는 비디오가 나왔어요.
[Threshold Value]는 전반적으로 몽글몽글한 소리 조각들이 느린 호흡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앰비언트 트랙은 물론이고 상대적으로 다양한 소리와 소음이 담긴 “Mary Rid (reloaded)”나 “Nool The Que”에서도 이런 감각이 느껴집니다. 사운드를 어떻게 만들어 내셨고 어떻게 배치하셨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추셨는지 알려주세요. (코르그 미니로그1에 대한 이야기도요!)
미니로그를 구입하면서 음악적으로 무척 큰 영향을 받았고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이전에는 샘플링을 주로 활용해 프로듀싱을 했다면, 아날로그 신시사이저인 미니로그는 정말 훌륭한 소리를 들려주고, 또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 낼 수가 있어요. 친해지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리기도 했지만요. 마음에 드는 소리를 직접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건 정말 마법 같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바로 전자음악의 매력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Threshold Value]는 특히나 미니로그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음반인 것 같아요. 특히 “Anywhere Is Fine”과 “Worstward Ho” 두 트랙은 다른 악기나 샘플링, 이펙터 없이 오직 오리지널 미니로그 사운드로만 만든 두 트랙이에요. “Much O O”도 오리지널 미니로그 사운드에 노이즈 이펙터만으로 아주 단순하게 구성된 곡인데, “Much O O”는 앞의 두 곡과 달리 많이들 좋아해 주시더라구요. 스트리밍 조회수도 월등히 높아요. 앞의 두 곡이 너무 지독해서 그런가? (웃음) 나머지 트랙들은 샘플링이나 이펙터를 좀 더 다양하게 사용했죠.
[Threshold Value]가 [Pizzapi]랑 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결이 다양한 편이에요. 음반이 한 곡처럼 이어지는 느낌이라기보단 조금 튀는 트랙도 있고, 괜히 딴청 피우는 트랙도 있고. [Pizzapi]를 내놓고 받은 피드백 중에 기억나는 게, 너무 다양해서 하나의 앨범으로 보기에는 어렵다는 이야기가 기억이 납니다. 역시나 [Threshold Value]에서도 한 결로만 가지는 않고 다양한 소리를 시도했네요. 그래도 [Pizzapi] 때보다는 좀 더 성숙해진 느낌, 전체를 하나로 묶어 주는 힘이 있다고는 생각합니다.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듯한 뭔가가 저도 있다고 느껴요.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어찌 보면 앨범 내에서 가장 이질적인, 하지만 이전까지의 영 님의 음악과는 가장 가까운 “Dishes Done”이 첫 트랙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곡이 첫 번째 곡인 이유가 궁금해요.
정말 뾰족한 질문이네요. (웃음) 일단 다른 트랙들이랑 많이 달라서, 앨범 중간에 넣기에는 애매했어요. 그리고 뭐랄까, 길거리에서 나도 모르게 전단지를 받아 버릴 때가 있잖아요? “Dishes Done”은 그런 전단지 같은 게 아닐까. 아까 5초 안에 듣는 사람을 사로잡는 것과는 정반대로 가자고 했지만, 그 ‘5초 안에 사로잡고 싶은 욕망’을 도저히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은 아닌가… (웃음) 이 트랙이 꽤나 대중적이면서도 제 색깔이 드러난 좋은 트랙이라고 생각해서, 사람들을 사로잡기 위해 첫 트랙으로 넣었습니다.
제목도 좋아요. 영 님이 곡에 붙이는 제목을 다 좋아하는데, “Dishes Done”은 ‘설거지 다 끝났으니까 본격적인 음악으로 들어가자’는 느낌이 들거든요. (웃음)
(웃음) 트랙 제목을 정할 때에는 굉장히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직관적으로 짓습니다. “Dishes Done”의 경우에도 큰 이유 없이, 그냥 첫 트랙인데 끝났다는 말이 들어가는 게 재밌다고 생각했어요. 어감도 뭔가 좋았고요.
지금 와서 [PIZZAPI]를 다시 들어 보면 영 님이 지금까지 만든 작업물들에 대한 일종의 ‘원형’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이 레코딩에는 어둡게 귀여운 피아노 소품도 있고(“Lonely And Comfortable”, “Indoor Swimming”) 재잘거리는 전자음의 집합도 있으며(“Woo”, “Meditation For Satan” 불길하지만 몸이 들썩여지는 비트도 있습니다(“Daughter Of The World Snake”, “Digital Weeding For Fellowship”). “12 Jokes Useful When Boarding An Airplane” 이후의 곡들은 감정의 아주 깊은 곳을 건드리는 소리의 연속이고요.
여러 가지 방향성을 탐색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지만, 그 자체로 가벼우면서도 멋진 소리들이라고 생각해요. 3년이 지난 지금 이 앨범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가 궁금합니다.
‘엎어진 물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웃음) [Pizzapi] 앨범은 실용음악과 졸업 직후에 만들었어요. 저는 재즈 피아노 전공이었는데, 배움의 정반대 편에 가서 만든 음반입니다. 제가 실용음악과를 졸업했다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그런 앨범이 나왔죠. 이 앨범도 만드는 데 얼마 안 걸렸어요. 한 달도 안 걸렸는데, 앨범을 처음 만드는 것이다 보니, 제목을 붙이거나 트랙 순서를 조정하거나 하는 정리 단계가 조금 오래 걸렸습니다. 데모를 굉장히 많이 보냈는데, 컨택이 닿지 않아서 셀프 릴리즈로 정리하고 2018년에 발매했어요. 곡을 다 만들었던 게 2016년이니까, 꽤 오랜 시간 붙잡고 있었죠.
왜 기껏 배운 걸 활용하지 않고 반대로 하려고 했을까? 다시 생각해 봤지만 잘 모르겠어요. (웃음)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 같고, 자유롭게 만들었죠. 그때만큼 또 자유롭게 만들지 못할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겁도 없고,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고. 샘플링이라고 하기도 부끄러운 수준의, 개러지밴드 샘플 비트를 조합한 것들이나(Meditation for Satan, Horror Green…), 그 위에 피아노를 얹거나(Room to Cry), 로직 기본 악기를 가지고 1 take로 즉흥연주를 녹음하는 식으로(Lonely and Comfortable, Indoor Swimming, Excercise for Grow…), 대부분의 트랙들이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어요. 엎어진 물이라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마음에 들어요. 마음에 드는 모양으로 엎어져 있는 느낌? (웃음)
앨범 커버도 잘 선택한 것 같아요. 원래는 지금의 토끼 그림이 아니었어요. 곡을 만들고 2년 동안 앨범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어떤 약학 고서적에서 지금의 앨범 커버를 찾았는데, 1917년도에 나온 책이었다고 하네요.
[Pizzapi]는 클립.아트에서 발매된 이후, 만선(maansun)에서 보너스 트랙을 포함해 재발매가 되기도 했습니다. 보너스 트랙이 궁금하시다면 만선을 체크해주세요.
영 님의 음악은 일렉트로닉 음악이라는 대전제 하에 특정한 장르와 스타일에 천착하지 않고 다양한 사운드를 선보이고 있어요. 레코딩 작업뿐만이 아니라, 디제잉에서도 일렉트로닉부터 한국 전통음악에 이르기까지 예측하기 어려운 음악이 한꺼번에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방향을 모색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카테고리화되지 않으려 애쓰는 것 같은데, 그것이 조금은 저의 앞길을 막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웃음) 카테고리화되지 않으면서 유명세를 얻으려면 방법은 이름을 높이 세우는 것뿐이에요. 이름이 유명해지면 제가 원하는 성공이 되는 건데, 그건 아주 좁고 길다란 터널이죠. 운도 많이 따라야 하고요.
직접 활동하면서 그걸 많이 느끼고 있답니다. 카테고리화되지 않기 위해 여러 가지를 선보이고,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까 내가 진짜 힘든 길을 가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카테고리화되면 좋은 부분이 있을 텐데 싶기도 하고요. 어떤 면에서는 내가 너무 애매한 위치, 애매한 스팟에 놓여 있는 뮤지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어요.
그런데, 너무 하나만 계속 하면 저는 재미가 없어요. 기술적으로도 너무 쉽고. 디제잉을 할 때도 마찬가지에요. 음악을 섞을 때 ‘엇 이렇게? 캬’ 하는 게 너무 좋아서 저는 디제잉을 하는 거거든요. (웃음) 물론 같은 장르의 음악끼리만 섞어도 재미가 없는 건 아니죠. 근데 계속 그렇게만 틀고, 정말 하우스(house) 전문 디제이가 돼라, 그러면 저는 못할 것 같아요.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건데, 잘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네요. 이것저것 다 하고 싶어하는 사람.
여섯 살부터 피아노를 배우셨고, 빌 에반스(Bill Evans)와 브래드 멜다우(Brad Mehldau), 디제이 위력(DJ 威力) 등의 다양한 뮤지션들을 영향을 준 분들로 꼽아 주셨어요. 이렇게 갖가지 영역에 걸쳐 있는 레퍼런스가 위의 다양함의 한 원인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영 님이 성장하시면서 이들을 ‘어떻게’ 접했는지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좋아하는 음악과 음악가들을 어떻게 처음 접하고 들어왔는지에 대해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미담이 있는데, 제 어머니께서 저를 아주 어린 나이에 피아노 학원에 보내셨어요. 그 이유가,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전화 받으러 가신 사이에 다리미를 건드린 거에요. 그래서 손에 화상 흉터가 생겼고, 어머니는 그것이 못내 미안하셨는지 손재주를 길러주고 싶어서 피아노 학원에 보내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웃음) 제가 은근히 소질이 있었나 봐요. 피아노 학원에 가는 게 싫지도 않았고, 중간에 그만두지도 않고 중학교 올라가서까지 학원에 다녔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서구 전통음악의 피아노를 전공했는데, 2학년 때 여러 사정 때문에 피아노를 그만두었어요. 잠시 외도의 시간을 가졌는데, 그것이 제 인생을 바꾸게 했습니다. 그때 서양 전통음악과 가요를 등지고, 세상도 등지고, B급 영화와 홍대 인디씬, 워프 레코드(Warp Records)2의 음악을 보고 듣기 시작했죠. 아마추어 증폭기, 에이펙스 트윈(Aphex Twin), 보즈 오브 캐나다(Boards of Canana), 이런 음악들. 지금까지도 제가 진짜 좋아하는, 영향을 많이 받은 음악들을 그때 피아노를 그만두면서 접했어요.
그렇게 외도의 시간을 보내다 재즈를 접했는데, 이것이 또 피아노를 그만둔 것만큼이나 충격적인 일이었어요. 제 7의 감각이 열렸다고 할까요? 어떻게 정장도 안 입고, 담배를 물고, 엉덩이를 들고 춤을 추면서 피아노를 치지? 너무 멋있었어요. 그래서 실용음악과에 가기로 결심했고, 운 좋게 진학할 수 있었어요. 거기서 더 운이 좋았던 게, 전공 교수님이 거의 빌 에반스와 브래드 멜다우의 전신 같은 분이셨어요. 그 분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디제이 위력은 제가 [Pizzapi]를 만들고 난 이후에 처음 접했던 것 같아요. 이 무렵에 박다함 씨나 주변 디제이들의 공연을 보러 다니고 믹스라는 것을 접하면서, 우와 이런 게 있구나, 굉장한 매력을 느꼈어요. 그러면서 믹스도 찾아 듣고, 직접 만들기도 하고, 그러다 오사카에서 활동하는 여성 디제이인 위력을 알게 됐어요. 이 분은 정말… 믹스라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을 넘어서는 믹스를 만드는 분이에요. 믹스라기보단 사운드 콜라주 같은 느낌. 이 분의 모든 믹스테이프를 다 모아서 가지고 있는데, 아직도 이 분이 실제로 공연하시는 걸 보지는 못했어요. 그렇지만 정말로 많이 들었죠.
디제이 위력의 믹스가 제 작곡에도 영향을 많이 끼친 것 같아요. 저는 믹스를 만드는 게 사실 곡을 쓰는 것과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소리를 이렇게까지 다양하게 섞고 연결해도 아름다울 수 있다, 이런 걸 느껴서 팬이 되었어요. 이 분을 알게 된 순간부터 진짜 ‘미쳤다!’ 하면서 좋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반면에, 이렇게 여러 가지 사운드를 듣다가도 ‘아, 영 님의 음악이네’라고 느끼게 되는 부분도 분명히 있습니다. 방대하고 화려하다기보다는 오밀조밀하면서도 가라앉아 있는 소리들, 그 소리들이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순간에 마음을 쿡 하고 찔러 오는 경험, 그리고 언뜻언뜻 비어져 나오는 실없는 유머 같은 것이 제가 영 님의 음악에서 느끼는 ‘최영의’ 순간인데, 영 님께서는 다양한 장르와 사운드 속에서 어떤 부분을 자신을 드러내는 요소로 염두에 두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제 음악은 마치 듣는 이를 관찰하려는 것 같아요. 제가 듣는 사람의 주변을 360도로 아주 천천히 돌면서 관찰 카메라로 찍는 광경이라고 할까요? 그런 상상을 하면서 음악을 만드는 것 같아요. 피드백을 많이 받아 보진 못했지만, 저는 사람들이 제 음악을 어떻게 듣는지 궁금해요. 제가 말을 할 때, 듣고 있는 상대방의 표정을 세세히 관찰하고 있는 느낌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제 자신의 말이 안 중요하다는 건 아니고, 잘 정리된 말을 하고 있는데 이 사람이 어떻게 듣고 있는지가 저한테는 제 말만큼 중요한 거죠.
그리고 ‘의외의 요소’를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그것을 넣는데… 제 음악을 듣는 이가 듣고 있다가 ‘앗 깜짝이야’ 하는 순간이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그런 모습을 보고 싶기도 하고요. 저는 되게 장난꾸러기인 것 같아요. (웃음)
영 님께서 음악을 만들면서 ‘아, 이건 내가 생각해도 정말 장난꾸러기 같다’ 하는 모먼트를 혹시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웃음)
[Parallel Cosmo] 같은 경우는 앨범 전반적으로 꾸러기처럼 만든 것 같아요. “A.S.C”도 그렇고 “Kudo”도 그렇고, 굉장히 기분이 좋아지는 트랙을 만들었네요. 사람이 밝아졌구나 싶어요, [Threshold Value]에 비해서. (웃음)
그리고 [Threshold Value]에서는 “Mary Lid (reloaded)”죠! 다소 과격한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제 딴에는 장난이에요. (웃음)
2021년도 절반이 지났는데,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 어떻게 되시는지 간단히 예고 부탁드리겠습니다!
10월 초에 레이블 엔모스드(ENMOSSED)에서 세 번째 정규 앨범이, 그 이후 레이블 사이킥 리버레이션(Psychic Liberation)에서는 EP가 발매될 예정입니다. 이 두 레코드는 둘 다 연초에 작업을 마쳤어요. 저도 굉장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 7월 말에 개관하는 여수 아르떼뮤지엄 사운드 팀에 합류해 작업하고 있습니다. 아르떼뮤지엄의 전반적인 사운드를 만드는 작업이에요. 그리고 제 개인적으로도 기금에 선정된 프로젝트가 있어서, 하반기에 디제잉에 대한 연구 및 발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연말 즈음 진행될 것 같고, 공연도 한 회차 정도 진행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때는 상황이 좋아져서 관객분들과 만날 수 있었으면 하네요.
최영 | https://linktr.ee/lildead19
뮤지션. DJ. 비주얼리스트. 우스꽝스럽고도 씁쓸한 것, 무섭지만 끝까지 보고 싶은 것을 만든다. 앨범 [Pizzapi] (2018), [Threshold Value] (2020), [Parallel Cosmo] (2021)을 발매했고, 2019년부터 음악감상 방식에 대한 실험 《だいだい 다이다이》시리즈를 진행해오고 있다. 웹 컨텐츠 《Quarantine Études》(2020), 공연 《CENTERS(중심들)》(2020)에 뮤지션과 총괄기획자로 참여했다.
정구원 | lacelet@gmail.com
음악웹진 [weiv] 편집장,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대중음악을 듣고 그에 대해 쓰고 있으며, 대중음악의 범위와 효과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