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치閾値
1. <물리> 일반적으로 반응이나 기타의 현상을 일으키게 하기 위하여 계(系)에 가하는 물리량의 최소치. 보통 에너지로 나타낸다.
2. <생물> 생물체가 자극에 대한 반응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도의 자극의 세기를 나타내는 수치.
– 『표준국어대사전』
음악을 조금 더 진지하게 듣기 시작했을 무렵인 십 대 시절 나는 하나의 결심을 세웠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요즘 음악은 들을 게 없어”라는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을 것. 음악 감상의 매개체가 급격히 디지털화되고 있던 2000년대 중반이었고, 자고 일어나면 쏟아지던 새로운 음악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던 무렵이었다. 여기에 몇몇 음악 커뮤니티에서 잊을 만하면 한 번씩은 보이던 ‘꼰대’들의 불평이 거슬렸다. 요즘 음악은 들을 게 없다, 옛날 음악이 훨씬 듣기 좋았고 지금 나오는 것들은 옛날 음악을 반복하는 것뿐이다… 흔해 빠졌고 게으른 볼멘소리라고 생각했다. 왜 지금도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 훌륭한 음악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거지?
그 당시는 그것을 분명한 언어로 표현하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대중음악의 동시대성을 포착하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경멸이었다. 아케이드 파이어(Arcade Fire), 윌코(Wilco), 라디오헤드(Radiohead) (의 [Kid A] 이후 앨범), 매드빌런(Madvillain), 우리는 속옷도 생겼고 여자도 늘었다네, 불싸조, 버벌 진트, 그 외 내 십 대의 귀를 즐겁게 해준 수많은 뮤지션들. 장르가 한쪽으로 편중된 감이 없지 않지만, 어쨌거나 그 음악들은 새로운, 그리고 지금 이 순간과 시대를 규정하는 소리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소리가 담고 있었던 ‘혁신성’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다. 디지털 시대의 파도를 음악의 형태로 받아들이며, 아직도 퀸(Queen)이나 메탈리카(Metallica) 같은 ‘고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과 자신은 다르다고 믿기.
십 년 이상의 시간이 지난 지금 그 시절을 다시 돌아보는 것은 꽤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십 대 시절의 철없음’을 (약간의 추억 섞인 쌉싸름함과 함께) 회고적인 태도로 돌이키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내 과거를 장식했던 음악이 지니고 있다고 믿었던 동시대성이 어느 순간 더는 동시대의 것이 아니라고 느껴질 때, 그리하여 그것들이 ‘진짜로’ 과거의 음악이 되어 버렸을 때, ‘지금 현재’의 감각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하는 사람은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정확한 시점을 특정할 수 없지만, 그 순간은 나에게도 찾아왔고, 그때 왜 사람들이 과거의 음악에 천착하게 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흡수하던 젊은 시기의 동시대를 함께했던 음악이 전달하는 쾌감, 취향이란 것을 처음 형성하게 만든 창작물이 개인의 내면에서 행사하는 권위, 개인적 경험과 서사가 결합한 과거 음악의 후일담적 강렬함. 어떤 식으로 설명하든, 그것은 굴복하기 어려운 종류의 무게를 지닌다.
대중음악을 비평하는 데 있어서 “일정한 물리적인 나이를 먹게 되면 지금의 음악을 동시대의 음악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진다”1는 최민우의 말은, 기실 내가 가장 피하고 싶어하는 상황이었다. 그것은 그의 말마따나 지금 현재의 대중음악에 대해서 “자기가 평하는 것에 대해 확신을 하기 어려워”2지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보다 개인적으로는 나 자신이 현재의 대중음악이 선사하는 즐거움을 느끼기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데 기인하는 바가 크다. 그리고 이것은 음악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음악을 많이 들어야만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훨씬 불리한 게임이다. 대중음악은 이미 과포화될 정도로 쌓아 놓은 자신의 역사에 계속해서 새로운 음악을 쌓아 나갈 것이고, 그에 따라 역사를 상호참조하는(혹은 좀 더 비하적으로, 과거에서 끌어오는) 경우도 빈번해질 것이다. 디지털화는 그 아카이빙과 참조가 난무하는 불구덩이에 빛의 속도로 기름을 투하한다. 극도로 가속화된 취향의 형성이 보편화된 곳에서 새로움이란 즐거움을 경험하는 것은 나 자신의 음악적 경험이 쌓여 나가는 것과 반비례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새로운 음악적 경험의 역치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높아져 버렸다.
아직은 이 상황에 대한 답을 내지 못했다. 사이먼 레이놀즈처럼 “미래가 주는 흥분”을 기억하며 “새로운 형식이 주는 순수하고 강렬한 희열”이 도래할 것을 수도 있겠지만3, 그조차도 새로움과 동시대성이 주는 자극을 끊임없이 갈구하며 취향적 기반을 망각하는 행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내가 십 대 시절 그토록 경멸하던 과거에 머무른 꼰대, 혹은 과거를 아카이빙하고 디깅하며 스노비즘적 도취에 빠진 유사-꼰대가 되고 싶지는 않다. 가장 우울한 대안은 망각에 기대는 것이다. 더는 흥미를 가지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던 과거의 음악을 ‘재발견’하거나, 새로운 음악적 경험을 갈구하는 모두가 망각하거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과거의 유산이 마치 다 고갈된 금광에서 백금 지층을 발견한 것처럼 터져 나오거나.
어쨌거나, 나는 지금 펠리시아 앳킨슨(Félicia Atkinson)과 입스 튜머(Yves Tumor), 21 새비지(21 Savage), 오스브레이커(Oathbreaker), 그리고 레드벨벳을 즐겨 듣는다. 이것은 신기한, 혹은 기만적인 경험이다. 음악으로부터 새로운 경험을 더는 얻을 수 없을 거라는 불안감에 시달리면서도, 여전히 동시대적 새로움을 담은 음악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진짜로 ‘전례가 없었던’ 것인지를 의심하면서도 이들 음악에서 즉각적으로 느껴지는 활력을 포착하는 것. 그리고, 내가 십 대 시절에 추구했던 강렬한 동시대성을 다시 경험할 수 없다고 해도, 최소한 그것이 분명하게 이동하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 내가 역치의 상승에 대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은 그러하다. 만족스러운 답은 아니지만, 어차피 만족스러운 답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건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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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18년 3월 23일부터 25일까지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진행된 <한 줄도 쓰지 않았어요>(기획: 박준우, 전대한)에 전시되었습니다.
정구원 | lacelet@gmail.com
음악웹진 [weiv] 편집장,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대중음악을 듣고 그에 대해 쓰고 있으며, 대중음악의 범위와 효과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