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 미술가 오민으로부터 공연에 연주자로 참여해달라는 드문 제안을 받았다. 설마 피아노 연주인가 싶었지만 다행히 토크에서 모더레이터를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말을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제목은 ‘Three Voices’, 혹은 ‘이시(異時)의 동시(同時)’. 텍스트를 재료삼아 ‘동시성’을 실험하는 공연이었다. 말하기라면 그렇게 무섭지 않다는 생각에 냉큼 제안에 응했으나 본격적으로 연습을 시작해보니 공연 준비는 예상보다 고되었고, 내가 해야 할 일은 그저 말하기에 국한되지도 않았다. 이 글은 그 연습 과정에서 내가 마주했던 과제와 놀라움과 배움과 충격과 질문들을 담은 기록이다.

↑ 오민 〈Three Voices〉 파트 3,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옥상훈 


아르코 창작실험활동 과정과 공유 — 오민 〈이시(異時)의 동시(同時)〉 
일시/장소  2020년 2월 20일 오후 1시 문화비축기지 T6 원형회의실 
준비기간  2020년 1월 10일 — 2월 20일
작곡  오민, 문석민
연주  연극인 심우섭, 무용인 조형준, 음악비평인 신예슬 




1
글과 시간

글을 쓸 때 시간을 염두에 두냐는 질문을 받았다. 시간의 구성을 몹시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술가 오민과 작곡가 문석민과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글과 시간이라니, 나는 이렇게 답했다. 

시간을 전제로 하는 음악에 관한 글을 쓰는 만큼 시간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짧은 음악에 대해 긴 글을 쓰거나, 긴 음악에 대해 짧은 글을 쓸 때면 지면에서 음악의 시간을 길게 늘어뜨리거나 잔뜩 수축시키는 기분이 든다. 카메라 줌을 조정하는 느낌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읽는 시간에는 마땅한 기준점이랄 게 없다. 읽는 시간을 촘촘히 설계하는 것은 내게 불가능하지만 글 안에서 완급을 조정해 보거나 글의 첫 부분에서 적정 템포를 잡아보겠다고 생각하곤 한다. 이 글이 끝까지 읽힐지, 독자가 얼마나 빠르게 읽을지, 읽는 속도가 점점 느려질지, 멈춘다면 어디서 멈출지, 어떤 부분만 읽을지 예측하기 어려웠지만 적어도 첫 한두 문장은 읽어줄 테니, 첫 부분은 최대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도록 간단히 쓰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던 것 같다. (논의의 한복판에서 거대한 돌덩이를 쿵 내려놓는 것처럼 시작하는 글들을 보면 너무 멋지고 부러워서 울고 싶을 지경이다.)

돌이켜보면 내 글쓰기가 오랫동안 분석해왔던 ABA’ 형식이나 모티브를 중심으로 짜인 유럽 음악의 구조에 영향을 받은 것 같기도 하다. 나를 포함해서 서양음악 전공자들이 반복적으로 취하는 뻔한 글의 구조가 있을지, 서양음악계에서 좋은 글의 준거는 무엇일지 점검해보고 싶기도 하다.

조금 다른 곳에 도착할 수밖에 없었던 대화를 나눈 뒤, 오민과 문석민에게 공연자로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아직 정해지지 않은 부분이 많지만 일단은 텍스트의 시간과 동시성을 다룰 것이고, 텍스트가 공연의 재료로 쓰일 것이고, 세 사람이 함께 말을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신나고 초조한 마음으로 함께 하기로 했다.




2
글과 시간, 말을 위한 스코어

스코어가 도착했다. 〈Three Voices〉1 라 명명된 이 작업의 스코어에는 미술가 오민과 작곡가 문석민, 무용인 조형준이 ‘시간’과 ‘동시성’에 관해 한 말들이 적혀있었다. 그들의 말이 곧 가사였다. 연주자들의 일은 적혀있는 가사를 말하거나 그 가사에 대한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이었는데2 이중 음악비평인의 역할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생각만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시간과 동시성에 관한 말들에 대한 말’을 담은 새로운 파트보를 만들어야 했다.3

파트보를 만들 때 가장 신경 써야 했던 부분은 내용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스코어에는 말해야 하는 내용뿐 아니라 말의 순서와 길이에 관한 지시문도 적혀 있었다. 예컨대 음악비평인은 연극인이 말을 마치면 동시에 말을 마치거나, 무용인이 특정 단어를 언급할 때 말을 시작했다가 돌연 중단하고, 때로는 30초 동안만 말해야 했다. 나는 글을 쓰는 동시에 말을 하고 시간을 재며 파트보를 만들었다. 오민과 문석민이 설계한 음악적 구성 안에서 말로 대선율4을 조직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 파트 2 지시사항 일부

↑ 파트 2 지시사항 일부 

한편, 파트보를 만들다 보니 결국 어디에서 누구에게 어떤 어투로 말할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청중을 향해 말하는 것인지, 청중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며 연주자들끼리만 말하는 것인지, 혹은 나 혼자 낭독하는 것인지 당장은 모호했다. 누구에게 말하느냐는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왜 말하느냐는 질문과도 직결됐다. 말하기의 목적과 의미를 찾고 싶었다. 할 말이 없으면 하지 말아야 하는데 나는 말을 왜 하는지, 누가 듣는지 모르는데 할 말이라는 것이 성립될 수 있을지를 생각해봤다. 말을 한다고 하면 어떻게든 ‘의미 전달’을 고려해야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가사가 있는 음악을 들을 때 대체로 무슨 말인지 정말 알아듣지 못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의미 전달’을 고민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 같기도 했다. 가사를 이해할 수 없어도 그저 좋았던 음악이 있었던 한편 가사를 이해한 뒤에 완전히 다르게 들렸던 음악도 있었다. 가사가 중요하기도, 아니기도 했다. 오민은 이 공연에서 말해질 내용을 가사라 칭했다. 그렇다면 가사를 말하는 입장에서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까? 이 공연에서 말은 꼭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말의 소리가 더 중요한 걸까? 리허설에 가서 직접 말해보기 전까진 알 수 없을 것 같아서 깜깜한 상태로 어떻게든 파트보를 썼다. 



3
글과 시간, 말을 위한 스코어, 읽지 않고 말하기

첫 리허설은 조형준의 스튜디오에서 열렸다. 총 세 파트로 나뉘는 〈Three Voices〉에서 연주자들은 파트 1에서는 모여 앉아서, 파트 2에서는 떨어져 앉아서, 파트 3에서는 움직이면서 말하기를 수행할 예정이었다. 〈Three Voices〉의 길이는 대략 15-20분 정도였다. 이 공연에 앞서 9분 가량의 영상 〈Three Voices Prelude〉가 상영된 뒤 이 공연이 곧장 이어지는 것이 그날 공연의 전체 계획이었다. 조형준의 스튜디오는 이런저런 움직임도 시도해볼 수 있는 넓은 공간이었지만 첫날부터 당장 움직일 필요는 없어서 리허설은 대체로 따뜻한 코타츠 테이블에 앉아서 진행됐다. 나는 지난 겨울 플랫폼엘 아트센터에서 열린 오민의 〈초청자〉에서 조형준과 심우섭이 공연하는 광경을 봤던지라 (나 혼자) 구면이었고, 이렇게 두 분을 또 뵙게 되어 몹시 반가운 마음이었다. 따뜻한 테이블에 모여 앉아서 두 분과 이야기하듯 리허설을 하다 보니 걱정했던 것만큼 그리 긴장되지는 않았다. 

↑ 조형준의 스튜디오, 따스한 코타츠 테이블에 앉아 말하기를 연습 중인 조형준(좌) 심우섭(중앙) 신예슬(우), 촬영 문석민 

첫 리허설의 목표는 ‘함께 말해보기’였다. 전달받은 스코어에는 거듭 강조된 부분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모든 연주자는 가사를 ‘읽’지 않고 다른 연주자와 대화하듯 ‘말’한다. 말하듯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말한다”라는 거였다. 모여 앉아 실제로 말하다보니 읽지 않고 말하는 것 자체는 생각보다 수월했다. 

그런데 텍스트의 동시성을 다루는 공연인 만큼 연주자들이 ‘동시에’ 말하는 부분이 정말 많았고 말들이 겹치는 포인트가 제각각이었다. 말하면서 듣다 보면 내가 어떤 부분을 말하고 있었는지 하나도 모르겠기도 했고, 듣다 보면 언제 말을 시작하고 멈춰야 하는지 까먹어버리기도 했다. 동시에 여러 소리를 듣는 경험은 대체로 중첩을 통해 형성되는 새로운 맥락을 즐기는 것에 가까웠지만, 동시에 여러 말소리를 듣는 경험은 무언가가 방해받거나 교란되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이제까지 나는 이렇게 차분한 어투로 두 사람 이상이 동시에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보통은 한자리에서 한 사람만 말하는 것이 대화의 암묵적 원칙이었다. 아주 침착한 어투로 ‘대화’가 지켜오던 선을 순순히 넘어가는 기분이 엄청나다고 생각하던 중, 스코어 매뉴얼 끝부분에 있던 질문들이 마침내 체감되기 시작했다. 

진짜로 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읽는 것과 외워서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진짜로 가사를 말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사와 말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말하는 동시에 상대방의 말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

어쨌든 리허설이 끝났다. 시작치곤 나쁘지 않았지만, 전문 공연자는커녕 아마추어라 부르기도 어려울 정도로 공연 경험이 없는 나는 자연스레 최악의 실수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떨려서 발음을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가 된다거나, 할 말을 까먹고 모든 것을 멈춰버린다거나 등등. 문석민은 잘했다고 말해줬지만, 아무래도 불안해하는 초심자를 안심시키기 위한 작곡가의 리허설 테크닉이 발휘되는 것 같았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심우섭에게 어떻게 공연을 할 때 떨지 않을 수 있는지를 물었다. 말씀하시길, “나를 보러온 친구들에게 내가 그동안 준비한 걸 한번 보여줄게, 잘 봐, 라는 마음으로 하다 보면 저는 괜찮더라고요. 잘 하실 거예요.” 초심자는 선배님의 따듯한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용기를 냈다. 




4
글과 시간, 말을 위한 스코어, 읽지 않고 말하기, 움직이기

계원예고 음악과에 다니던 시절, 점심시간마다 미술과, 무용과, 연극영화과 친구들을 볼 수 있었다. 나와 친구들의 눈에 그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무용과 친구들의 움직임이었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곧게 걸을 수 있는지, 어떻게 몸의 움직임이 저렇게 생생한지 매번 보고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에 반해 나와 친구들의 몸은 퍼져 있는 데다 몸의 움직임에 그다지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어깨와 팔과 손목에 힘을 빼는 것, 그 악명높은 ‘릴렉스’를 실천하는 데 신경을 쓰긴 했지만 우리의 초점은 언제나 손끝에 고정되어 있었다. 손끝이 아닌 다른 몸의 움직임이 화두에 오르는 경우는 연주할 때 나오는 특유의 표정이나 몸짓을 언급할 때 정도였다(“걔는 꼭 눈 감고 치더라” “페달 밟을 때 거의 일어날 것 같지”). 피아노를 그만두고 음악학으로 전공을 바꾼 후에는 그 미세한 손끝 감각마저 사라졌었다. 연주는 분명 몸을 쓰는 일이긴 했지만 몸의 움직임에 관해서 나는 완전히 문외한이나 다름 없었다. 

그런데 몸을 제대로 잘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 와버렸다. 말하기에 이어 ‘걷기’라는 수행사항이 추가된 것이다. 물론 초심자가 해낼 수 없는 대단히 복잡한 움직임은 아니었다. 파트 1이 끝난 뒤 세 연주자가 각자 다음 의자로 똑바로 걸어가는 ‘이동을 위한 걷기’였지만… 나는 말하기에 완전히 정신이 팔린 나머지 움직임에는 전혀 신경쓰지 못했고, 오민과 문석민이 내 움직임에 대한 피드백을 준 뒤에야 괴상한 자세로 걸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른 움직임도 아니고 여차하면 하루에 만 번이나 해낼 수 있는 ‘걷기’에서 막힐 줄은 몰랐다. 당황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제대로 잘 걸어보려고 노력하자 손짓과 몸짓, 눈짓이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예전에 한 요가 수업에서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가 잘 모른다고 했던 강사님의 말도, 지난 〈초청자〉 공연에서 충격적일 정도로 인상적이었던 조형준의 걸음도 다시 한번 떠올랐다. 이번 〈Three Voices〉 공연을 위한 리허설에서도 역시 멋지게 걷고 있는 조형준에게 어떻게 걸은 것이냐고 물었다. 자연스럽게 걸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정말 그런 것 같았다.5 심우섭에게도 어떻게 걸은 것이냐고 물었다. 다른 두 사람이 하는 말을 들으며 걸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들으면서 걷기라니, 정말 상상조차 못 했지만 나도 조금이나마 노력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세 연주자의 이동 경로(1 → 2)

이제껏 내 움직임이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소리도 표정도 아닌 몸의 움직임이 관찰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체감하니 조금 몸 둘 바를 모르게 되었다. 굽은 어깨가 초라해보일까 봐, 어정쩡한 자세가 우스꽝스러워 보일까 봐, 와중에 말이 꼬일까 봐, 누가 나를 열렬히 관찰할까 봐, 무엇보다 내가 당황했다는 사실을 들킬까 봐 무서웠다.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데 신경쓰기 위해서는 차라리 입에서 말이 줄줄 나오도록 하는 것이 차라리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 지휘자는 무대로 걸어 나올 때부터 음악이 시작되는 것 같다’고 지휘를 하는 한 친구가 말했던 적이 있다. 모 씨가 그걸 노렸는지는 알 수 없고 내가 꼭 그러고 싶었던 것도 아니지만 걷는 것만으로 그런 인상을 줄 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듣기만 해도 멋진 일이었다. 어쨌든 나는 그런 경험이 전무했고 이동을 위해 걷는 것뿐만 아니라 걷는 움직임 자체가 공연의 일환일 때는 어떻게 걸어야 자연스러운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다행히 문석민이 걸음의 템포와 자세를 중간 중간 진단해줬고, 그 말을 들으며 너무나 자연스럽게 잘 걷고 계셨던 다른 두 분을 최대한 따라 걸어 봤더니 조금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연습을 많이 하겠다고 다짐했다. 




5
글과 시간, 말을 위한 스코어, 읽지 않고 말하기, 움직이기, 듣기와 보기

짧은 경험에 의하면 연습에는 전략이 필요했다. 안 되는 부분, 실수할까 봐 무서워서 몸이 뻣뻣해지는 구간을 골라내고, 여러 경우의 수를 만들어 갖은 방법으로 의외의 사태에 대비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연습을 열심히 했던 피아노 전공생 시절에 들었던 말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연습을 해봐야 어딜 못하는지 알지. 일단 해봐야 알 수 있어”(친구), “에튀드 같은 걸 칠 때는 인템포로 세 번은 힘들이지 않고 반복할 수 있을 정도로 쳐야 제대로 칠 수 있는 거야. 한번 치고 힘이 빠지면 아직 준비가 안 된 거지”(선배), “예슬이는 이 부분을 잘 치고 싶지가 않구나. 안 되는 부분을 왜 계속 내버려 두지?”(선생님), “들어야 연습을 하지”(학교에 상주하던 조율사님). 이 말들을 교훈삼아 이런 저런 전략을 세워서 연습을 해봤다. 확실히 연습을 많이 하니 말도 입에 붙고 움직임도 몸에 익었다. 두려움이 완전히 없어지진 않았지만 어쨌거나 저번보다는 낫겠지, 라고 생각하며 다음 리허설에 갔다. 

하지만 가자마자 오민과 문석민에게 뭔가를 들켜버렸다. 말이 너무 입에 붙어서 거의 외워서 말하는 것과 다름없어졌고, 외워서 말하는 것은 그냥 말하는 것과 분명 다르다는 거였다. 그리고 내 할 일에만 너무 열중한 나머지 내가 밖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다는 문제도 발견됐다. 나는 공연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하나도 바라보지 않았다. 시야는 바깥을 향해 있지만 초점은 생각 속 어딘가를 떠도는 그런 상태였던 것 같다. 오민은 여기서 벗어나는 방법을 ‘바깥으로 꺼내다’라고 표현했다. 아마도 오민과 문석민이 지향했던 공연자의 태도는 바로 아래와 같았을 것이다. 

“몇 년 전, 안무가 드 케이르스마커(Anne Teresa De Keersmaeker)의 초기작 〈페이즈(Fase)〉를 극장에서 본 적이 있다. 드 케이르스마커 본인이 젊은 무용수 한 명과 함께 직접 공연했다. 젊은 무용수는 무표정으로 공연하고 있었다. 무용수가 무대 위에 상정한 환영 안에 들어가 있을 때 많이 볼 수 있는 표정이다. 보통 ‘무한대초점’이라 부르는 이 표정은, 특정한 하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보고 있는 상태에서 나타나는 눈빛에 가깝다. 마치 관객과 공연자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하고 그래서 무용수에겐 관객이 보이지도 존재하지도 않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런 표정으로 수행하는 공연자를 보고 있는 관객 역시 그 환영 속 세계를 상상하면서 환영 안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하게 된다. 하지만 드 키어스마커의 표정은 극장 안에 실재하는 무엇인가를 보는 듯, 초점이 살아있었다. 그 초점은 환영의 세계뿐 아니라 내가 앉아있는 바로 ‘지금, 여기’의 실제적 시공간을 함께 인지하게 했다. 나는 그 초점을 따라 환영과 ‘지금, 여기’ 사이를 빠르게 이동하며 광활한 공간감을 느꼈다.”6

오민은 해결방안으로 ‘듣기와 보기’를 제안했다. 남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면서 초점을 눈앞으로 꺼내오는 거였다. 내가 미세하게 감지하지는 못했지만 그 차이는 굉장히 컸다(고 한다). 하지만 단번에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말을 하거나 움직이는 데만 집중하다보면 듣거나 봐야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고, 들려오는 말을 듣다가도 아무것도 듣지 않게 되고, 눈을 뜨고 있지만 아무것도 보지 않게 됐다. 걷기, 듣기, 보기가 이렇게 어렵다니. 공연의 세계에서 만만한 일은 정말 단 하나도 없었다. 하여간 어떻게든 최대한 많이 듣고 봐야 했다. 

↑ 파트 1-2에서는 듣기, 파트 3에서는 듣기+보기에 집중하라는 메모

듣기에 도움이 되는 일은 특정 단어가 들렸을 때 ‘들었다/들렸다’라는 것을 자각하며 더 잘 들어보려고 애쓰는 거였다. 조형준과 심우섭과 내가 동시에 말하고 있을 때는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사실상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세 사람 모두 자크 타티의 플레이타임이라는 말소리만큼은 알아들을 수 있었고 그 단어가 들려올 때만큼은 듣기에 신경을 써보기로 했다. 그건 의미나 맥락이 아니라 순전히 소리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여러 말을 듣고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정말 불가능했던 것일까? 여러 말을 듣기만 한다면 가능할 것도 같았지만, 말하는 와중에 다른 말들을 듣고 이해하는 것은 정말 어려웠다. 어쨌든 말을 소리로 들어도 괜찮겠다는 것을 확인한 뒤 발화를 조금 더 발성에 가깝게 생각하게 됐다. (한편, 멀찍이서 이 중첩되는 말소리를 듣던 오민은 이 말들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은 채 ‘발성’들을 들었지만, 리허설 과정에서 점차 내용까지 들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보기에 도움이 되는 일은 눈을 오래 마주치는 것이었다. 토크나 좌담을 할 때는 그런 적이 없었는데, 여기서는 움직이며 말을 하는 도중에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빠짐없이 당황했다. 눈이 마주쳐도 시선을 회피하지 않고 무던히 쳐다보는 연습을 했다. 심우섭과 조형준의 침착한 표정을 보며 나도 잘 따라하려고 노력하다보니 조금씩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6
글과 시간, 말을 위한 스코어, 읽지 않고 말하기, 움직이기, 듣기와 보기, 사물 줍기

파트 3에서는 움직임을 더하기로 했었다. 작곡 단계에서 오민과 문석민은 마지막 부분인 파트 3에서 말들이 점차 누적되어 쌓이는 구조를 염두에 두었고, 이 부분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움직임을 더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파트 3의 움직임은 조형준이 구성할 예정이었다. 조형준은 목소리를 확실히 변화시킬 수 있을 만한 움직임을 만드는 것이 흥미로울 것 같다고 했다. 이후 조형준과 오민, 문석민이 함께 논의한 결과 세 연주자가 각자 다른 방식으로 변화를 만드는 게 좋겠다는 결론이 났고, 파트 3에는 이런 수행사항이 추가되었다. 

심우섭은 사탕을 하나둘씩 까먹으며 계속 말한다. 
조형준은 몸을 뒤로 서서히 꺾으면서 계속 말한다. 
신예슬은 사물들을 순서대로 주우면서 계속 말한다. 

연습을 계속해가며 조형준은 꺾는 템포를, 심우섭은 사탕의 크기와 종류를, 나는 사물의 종류와 줍는 순서를 조율했다. 심우섭의 사탕은 자두 캔디를 거쳐 최종적으로 청포도 캔디로 정해졌고, 나는 박스, 막대기, 종이, 공, 노끈, 테이프, 말린 종이까지 총 일곱 개의 사물을 순서대로 줍게 됐다. 사물 줍기는 목소리 변화에도 도움이 됐지만 나를 바깥으로 꺼내놓는 데 무척이나 효율적인 방편이었다. 당장 목표물이 눈앞에 놓여있는 상황에서 ‘지금-여기’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릿속으로 할 일을 계속 되뇌이며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은 내가 그럴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먹먹했던 귀와 눈이 조금씩 뚫리는 것 같기도 했다. 

↑ 목소리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조형준, 심우섭, 신예슬과 관객을 연기하고 있는 문석민, 촬영 오민

그렇지만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은 것처럼 느껴졌다. 글과 시간에 대한 생각들이 은근히 갱신되는 와중에 내가 써놓은 말을 위한 스코어를 계속 손에 쥐고 다니면서 보지만 이걸 읽지 않고 말해야 했고 다른 두 분의 말을 들으면서 걷다가 다른 의자에 가서 앉아서 말하고 다시 때가 되면 일어나 말하면서 곳곳에 널려있는 사물들을 주우러 다녔어야 했으며 말하다가 누군가와 눈이 마주쳐도 그렇구나 눈이 마주쳤구나 하며 초연하게 지나치고 다음 사물만을 향해 최적의 동선으로 걸으며 널려 있는 사물들을 다 주울 때까지 말해야 했다. 

사물들을 하나씩 줍고 있으면 몸도 마음도 몹시 불안했다. 사물들은 가끔 내 손에서 미끄러져서 바닥으로 굴러떨어졌고, 사물을 줍느라 안간힘을 쓸 때면 목소리에 이상하게 힘이 들어가고 (고작 3초 정도 힘든 자세를 취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찼다. 사물을 너무 빨리 주워버리면 공연이 조금 허무하게 끝나버릴 것 같았다. 반면 너무 천천히 주워버리면 그 사이에 심우섭이 너무 많은 사탕을 먹을 것이고 조형준이 힘든 자세를 너무 오래 유지할테니 어떤 식으로든 두 분의 건강을 해칠 것 같았다. 몸도 마음도 괴로운 상태로 이쪽저쪽을 신경쓰며 사물을 주웠다. 사물들 덕분에 내 몸과 마음이 불안정해지고 그게 티가 날수록 오민과 문석민은 바로 이거라며 기뻐했다. 불안이 몸을 뚫고 나올수록 고개를 끄덕이는 분들을 바라보며 최선을 다해 위태로워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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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시간, 말을 위한 스코어, 읽지 않고 말하기, 움직이기, 듣기와 보기, 사물 줍기, 공연하기

연습을 더 하고 싶었지만 문화비축기지에서 마지막 리허설을 해야될 때가 와버렸다. 매일 매일 할 일이 하나씩 추가되거나 주워야 할 사물의 색과 형태가 달라지던 와중에 현장 리허설을 해야 한다니,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서 믿을 수가 없었다. 공연이 진행될 문화비축기지 T6 원형회의실은 2018년에 아트 인큐베이터의 초대로 헤테로포니가 첫 좌담을 진행했던 곳이기도 하고, 2019년 ATM 페스티벌의 전자음악 공연 준비를 위해 여러 차례 드나들었던 곳이다. 물론 좌담이나 전자음악 공연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건이 벌어질 예정이었지만, 공간만큼은 친숙해서 다행이었다. 

↑ 〈Three Voices〉 마지막 리허설, 촬영 오민

공간에서 연주자가 앉을 의자 위치를 정하고 동선과 사물들의 위치를 공간에 맞게 조율했다. 다른 곳에서 만들어둔 어떤 공연의 모형을 실제 현장에 얹어둔 뒤 몇몇 데이터를 조정하는 느낌이었다. 현장에 도착해보니, 지금 당장 알 수 없지만 무척이나 중요한 변수는 바로 관객이었다. 관객들이 앉아 있을지 서 있을지, 가만히 있을지 움직일지 예상하기 어려웠다. 어떤 공연에서는 관객들이 공연의 흐름에 따라 자리를 비켜주기도 하지만, 간혹 안 비켜주고 가만히 버티고 서 있기도 한다. 어쨌든 지금 조절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고 세 연주자는 관객이 어디에 있더라도 각자의 동선대로 움직이며 잘 대처하기로 했다. 


그리고 마침내 공연날이 됐다. 공연이 리허설과 완전히 분리되어있는 대단히 새로운 사건이 아니라 그 연장선상에 있는 한 점인 것처럼 느껴졌다. 큰 사고 없이 공연장에 도착해서 최종 리허설을 하고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조형준과 심우섭을 붙잡고 떨리지 않으시냐고 재차 물었다. 조형준은 관객들이 들어오면 조금 떨릴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괜찮다고 답했다. 과연 평소와 다름 없는 차분한 상태를 유지하고 계신 것 같았다. 심우섭도 물론 괜찮다고 답하며, 일전에 내게 들려줬던 말처럼 한번 잘 보여주면 된다고 말했다. 이렇게 마음이 든든할 수가 없었고 새삼 내가 이 두 분과 함께 공연을 하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 실감났다. 영상, 사운드, 옷, 동선, 물건 등등 체크할 수 있는 것들을 점검하고 대기하다보니 어느덧 관객 입장 시간이 됐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관객’들을 하나의 집단으로만 뭉뚱그려 생각했었지만, 사람들이 들어와 자리를 메우는 것을 보고 있자니 관객 한명 한명이 너무 잘 보였다. 갑자기 날씨가 변한 것처럼 눈앞이 생경해지며 정신이 퍼뜩 들었다. ‘지금-여기’를 또 한번 똑똑히 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 오민 〈Three Voices Prelude〉

공연에 앞서 관객들은 어둠 속에서 모두 앉아 한 방향을 바라보며 영상을 보며 텍스트를 읽고 소리를 들었다. 영상 스크리닝이 끝나고 세 연주자는 사람들을 헤치고 무대 중앙으로 의자를 들고 갔다. 다행히 중앙 부분에 작은 공간이 있었고 근처에 있던 관객들이 기꺼이 공간을 내줬다. 예상했던 자리에 잘 앉은 뒤 큰 문제 없이 세 연주자가 대화를 이어갔다.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던 자리를 헤집고 들어갔던 만큼 생각보다 관객들과 거리가 무척이나 가까웠다. 관객의 반응을 너무 즉각적으로 읽고 그에 영향을 받아 휘둘리는 것은 아닌지 싶어 두려운 마음도 들었지만, 모두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관객들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아주 가까이에 계신 분들 중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말소리를 듣는 데만 집중하는 분들도 섞여 있어서 덜 부담스러웠다. 

↑ 〈Three Voices〉 파트 1,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옥상훈 

한데 모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첫 파트가 끝나고 다음 파트를 위해서 공간을 가로질러 두 번째 자리로 이동했어야 했다.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적정 템포로 이동하며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관객들을 헤치고 지나가면서 알게 된 무서운 사실은 관객들의 앉은 키에 가려 내가 마지막 파트에서 주워야 할 사물들이 어디에 있는지 한 눈에 보이질 않는다는 거였다. 하지만 이제와서 뭘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두 번째 자리에 무사히 도착한 뒤 어떻게든 될테니 눈 앞의 할 일에나 집중하자는 생각으로 알 수 없는 곳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 〈Three Voices〉 파트 2, 순서대로 조형준, 신예슬, 조형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옥상훈

그리고 가장 어려웠던 마지막 파트가 됐다. 적극적으로 관객 사이를 비집고 걸어다니며 예정된 일들을 해내야했던 탓에 조금 뻔뻔한 마음이 되었던 것도 같다. 평소였다면 ‘죄송합니다 지나갈게요’ 라는 말을 수십번도 더 했겠지만 너무 바빠서 죄송한 마음이 들 틈도 없었고 그저 최적의 동선을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여전히 나는 사물에 시선을 꽂고 그쪽으로 직진했고 끊임없이 말했다. 사물이 손에서 떨어졌을 땐 한번 정도는 다시 주워봤지만 두 번 이상은 줍지 않았다. 

↑ 〈Three Voices〉 파트 3,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옥상훈

사물을 줍는 동안 심우섭은 계속 사탕을 입 안에 넣으며 조금 더 웅얼거리는 발음으로 말을 했고, 조형준은 계속 몸을 뒤로 꺾으며 목에 힘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말을 했고, 나는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와중에 ‘자크 타티의 플레이타임’은 곳곳에서 작은 심벌 소리처럼 들려왔다. 공연은 박스-막대기-종이-공-노끈-테이프-말린 종이를 모두 주운 뒤 내가 말을 멈추면 끝날 예정이었고, 마침내 나는 어느 순간 말을 멈췄다. 심우섭과 조형준도 소리가 사라졌다는 것을 들은 뒤에 말을 멈췄다. 모두의 말소리가 멈추자 나는 들고 있던 사물들을 바닥에 내려놓고 심우섭도 사탕 먹기를 중단하고 조형준도 다시 직립 자세로 돌아와 세 사람 모두 아무 표정 없이 출구로 직진했다. 그렇게 공연이 끝났다. 끝나고 나온 직후 조형준과 심우섭과 함께 ‘아… 끝났네요’ ‘고생하셨어요’ 정도의 말들을 주고받았던 것 같은데, 이제는 뭘 해야하나 싶어서 어안이 좀 벙벙했다. 




8
글과 시간, 말을 위한 스코어, 읽지 않고 말하기, 움직이기, 듣기와 보기, 사물 줍기, 공연하기, 피드백

어쨌든 공연은 큰 탈 없이 끝났고, 오민과 문석민과 조형준과 심우섭과 나는 한데 모여앉아 ‘재밌었다’ ‘잘 했다’ ‘무사히 잘 끝났다’ 등등의 피드백을 주고 받았다. 

하지만 정말 잘 하기만 했을 리가 없다. 끝난 일을 굳이 계속 생각할 필요도 없고 아마도 내가 다시는 공연을 할 일도 없을테니 더 이상 개선을 위한 피드백을 받을 이유가 딱히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조금 허전했다. 매일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며 사태를 개선해나가던 도중에 일들이 중단된 것 같았다. 내가 마주한 과제들에 비해 나의 연습과 공연 경험이 턱없이 부족했어서 그랬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공연이 끝나자 무언가 일단락되어버리고 마는 것 같았고, 충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들과 그 개선방안도, 그에 대한 새로운 질문도 함께 묻혀버리는 듯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가 관객 입장일 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일전에 공연 리뷰를 쓰는 일이 “공연에 대한 결론을 유보한 채 이 공연의 형식이나 방법론이나 그에 잠재된 근본적인 질문들을 조금 더 생각해보자고 나 자신을 설득하는 과정에 가깝다”7고 말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연주자로 참여한 것이긴 하지만, 시선을 넓혀 관객 입장에서 다뤄볼 법한 이 공연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생각해볼 수도 있었다. 

그러던 중 관객들이 쓴 공연 리뷰들을 읽게 됐다. 작품 감상, 작품 발전 제언, 기타 의견까지 세 파트로 구성된 여섯 편의 작품 의견서를 오민 작가로부터 공유받은 것이다.

공연 방식, 목소리의 크기, 텍스트의 내용, 텍스트의 전달방식, ‘관객과의 대화’의 필요성, 공연에 임하는 자세와 성의, 공연에서 난잡하게 뒤엉켰던 말들에 대한 비판, 오히려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텍스트가 혼란스럽게 엉켰으면 좋겠다는 견해까지. 관객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지만 대체로는 ‘소통’과 ‘구현/전달방식’에 대한 비판적 언급이 주를 이루었다. 무엇이 어떻게 소통되어야 하는가, 라는 문제를 곰곰이 생각하다보니 이 공연에 참여하며 가장 먼저 고민했던 부분인 ‘의미 전달’이 다시 뇌리에 떠올랐다. 처음에는 말을 한다고 하면 어떻게든 ‘의미 전달’을 고려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계속해서 겹쳐지는 말들로 호모포니를, 폴리포니를, 헤테로포니를 만드는 과정에서 나는 이 공연에서 내가 할 일이 발화를 빙자한 발성인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됐었다. 적어도 나는 이를 발성으로 인지했던 만큼 전달되는 것을 꼭 말의 의미로 한정될 필요는 없겠지만, 이 피드백들을 계기로 다시 한번 ‘전달’에 대해 생각해보며 새로운 물음들을 만나게 됐다. 

만약 이것이 말 없는 목소리였더라면 소통이 더 잘 되었을까? 말은 이해가 되어야 하는가? 자크 타티의 플레이타임은 도대체 왜 그렇게 잘 들렸는가? 관객들도 그걸 잘 들었을까? 관객들이 직접 발화자/발성자의 입장으로 참여해볼 수 있었다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까? 관객에게 분명하고 명쾌한 감각을 선사하는 것이 아무래도 더 좋은 공연일까? 공연은 관객에게 무언가를 선사하기 위한 것일까? 혹은 그저 발생하는 사건으로서 의의가 있는 것일까? 공연으로부터 질문을 얻어가는 것이 좋을까? 답을 얻어가는 것이 좋을까? 나는 공연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사람들은 공연을 왜 만드는가? 나는 이 공연에 왜 참여했나? 나는 공연에 왜 가는가?
 




신예슬 | shinyeasul@gmail.com
음악학과 현대음악을 공부했다. 서양음악의 전제와 규칙을 비판적으로 재고하고 있다.

각주

  1. 제목에서 말하는 이 세 목소리는 스코어에 적혀 있던 오민과 문석민과 조형준의 목소리일수도, 공연에서 들려왔던 심우섭과 조형준과 신예슬의 목소리일 수도 있겠다.
  2. 스코어에 적혀있던 말하기 지침은 다음과 같았다. “각 연주자는 다른 방식으로 가사를 말한다. 연극인 심우섭: 가사의 내용을 그대로 말한다. 실제 말하듯 연주하기 위해 각자의 말투를 고려하여 말하기에 자연스러운 표현으로 바꿔 말한다. / 무용인 조형준 : 가사의 화자가 조형준인 부분은 그 내용대로 말하고, 그 외의 부분은 내용과 관련한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 음악비평인 신예슬: 가사 내용과 관련한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3. 이를테면 나는 문석민의 말 “다수의 음이 비동시적으로 울렸더라도 이들이 하나의 소구조에 속한다면 이를 동시라 부르는 것이 가능하다”에 관한 나의 의견을 “서양음악에서 ‘동시’라고 불릴 수 있을 만한 시간의 단위는 아주 짧은 찰나나 단 하나의 음에 국한되지 않는다”라는 새 문장으로 써냈다. 타인의 말과 주제상 연결되면서도 완전히 같지는 않은 내 의견을 보여주어야 했다. 동시대 무용에서는 공연자들이 본인이 수행할 움직임의 ‘파트보’를 직접 만드는 경우가 많다고 오민에게 들은 적이 있지만, 음악에서는 그리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닌 듯했다.
  4. 주선율(main melody)을 보완하거나 꾸며주는 선율.
  5. 오민은 이 ‘자연스러운 걷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초청자〉 공연에서 다른 공연자의 걷기를 함께 살펴주던 조형준 씨께서, 공연자의 입 속에 공간이 벌어져 있는지 없는지를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걷는 것과 입 속의 공간, 언뜻 연결짓기 어려운 이 두 가지 사이에 놓여 있을 그 무수한 것들이 떠오르면서 정말 짜릿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납니다. 자연스러움의 감각은 몸 전체에서 드러나며(심지어 닫힌 입 안의 혀 상태로도), 언뜻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이 ‘자연스러운 상태’에 신체적으로, 이성적으로 접근하여 관찰과 연습을 통해 조정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다시 한 번 확신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6. 「좌담: 공연의 새로운 문법을 만드는 창작자들 — 라예송 · 박민희 · 배승빈 · 신지수 · 오민 · 조은희 · 성혜인 · 신예슬」,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 15호 (서울: 예솔, 2019), 25.
  7. 신예슬, 「레지던시 일지: 아트 인큐베이터 인 뉴욕」 http://shinyes.kr/residency-in-new-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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