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멸의 천사, The Exterminating Angel

영화 <절멸의 천사> 포스터

1.
영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1960년대의 어느 날, 함께 오페라를 본 부르주아들이 노빌레 부부의 호화로운 저택에 초대받아 만찬을 즐긴다. 훌륭한 음식과 우아한 담소, 수준 높은 음악을 충분히 즐긴 부르주아들은 슬슬 집에 돌아가려 하지만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저택을 떠나지 못한다. 가둔 자 없는 감금이 시작되고, 무작정 고립된 부르주아들은 예의와 존엄, 이성을 차츰 잃는다. 그렇게 엉망진창 카니발이 펼쳐진다.

음악이 단 2곡밖에 나오지 않는 이 고요한 영화, 루이스 부뉴엘(Luis Buñuel)의 <절멸의 천사>(Exterminating Angel, 1962)에는 이상하게도 음악에 관한 설정들이 포진해있다. ‘오페라’를 막 보고 나온 부르주아들. 그 안의 피아니스트, 소프라노, 지휘자. 파라디시(P. D. Paradisi)의 <소나타 6번>이 연주된 뒤 부르주아들이 공간에 갇히고 그 상황을 ‘재현’해야 공간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설정,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부르주아들의 입장과 축배사. ‘오페라’로 만들기에 고루 탁월한 조건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매력적인 설정은 동시에 갇혀버리기 쉬운 덫이다. 부뉴엘이 특별히 선택한 이 설정들에 홀려 아무런 전략 없이 이 영화를 ‘오페라 전통’을 충실히 따른 음악으로 직역하는 순간 그 오페라는 부뉴엘이 설치해놓은 조롱의 덫에 자진해서 들어간, 부뉴엘이 구축해놓은 세계 ‘속의’ 오페라로 포섭되어버린다. 어려운 게임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를 동명의 오페라 <절멸의 천사>(Exterminating Angel, 2016)로 만든 작곡가 토마스 아데스(Thomas Adès)는 부뉴엘의 이 미끼를 덥석 문 또 한 명의 ‘부르주아’가 되었나? 아니면 기꺼이 자신이 대표할 수밖에 없는 클래식-오페라 전통을 깔깔거리며 비웃는 자기모순적인 인물이 되어 부뉴엘의 놀이에 플레이어로 동참하는 데 성공했는가? 

 

 <절멸의 천사>,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

  

2.
원작의 흐름을 차근히 극으로 재현하는 이 오페라는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와 동일하게 안전한 세계가 무너지는 순간부터 시작한다. G음의 튜블라벨 소리가 서서히 F, A♭음으로 확장되고, 계속해서 나선형으로 움직임을 키워나간다. 이 음산한 인트로는 본격적으로 사건이 진행되기 전부터 이미 어떤 균열과 균형의 상실을 예정한다. 소용돌이가 조금씩 커지고 빨라지자 ‘절멸’의 전조를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프롤레타리아, 저택의 하인들이 하나둘씩 집을 떠난다.

어떤 운명이 들이닥칠지 아무것도 모른 채 부르주아들이 행복한 모습으로 입장한다. 서주의 음산함이 슬며시 사그라든다. 부르주아들은 한껏 목소리를 치켜세우며 자신을 소개하고, 금관의 불규칙한 리듬은 부르주아의 목소리와 의도적으로 어긋나며 인물들에 대한 가벼운 경멸을 표현한다. 전반적으로 오케스트라는 벨칸토1로 노래되는 부르주아들의 정보값 없는 가식적인 대화를 우습게 대상화하기도, 혹은 곧장 그 거리를 좁히고 부르주아들이 부르는 히스테릭하면서도 아름다운 선율을 뒷받침하기도 한다. 카메라가 디제시스 밖 연출자의 시선을 완전히 숨길 수 없는 것처럼 오케스트라는 ‘오페라 전통’과 ‘부뉴엘’ 사이를 팽팽히 오가는 아데스의 시선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오페라’라는 형식을 선택한 이상 부뉴엘의 조롱조의 시선에만 장단을 맞출 순 없다. 아데스는 극을 촘촘히 따라가면서도 때에 따라 오케스트라와 무대 위의 디제시스를 적절히 분리해 부르주아들을 대상화하고, 또 하나로 엮어 부르주아들을 대변하는 유연한 전략을 취한다.

천진난만하게 웃고 떠드는 부르주아들에게 불가해한 힘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식사를 마치고 피아니스트 블랑카가 응접실에서 파라디시의 <소나타 6번>을 연주한다. 아데스는 이 중요한 장면을 영화와 거의 동일한 대사로 구성하지만, 부뉴엘의 영화에 내재된 음악적 장치를 고스란히 재현하지 않는다. 아데스는 파라디시의 <소나타 6번>을 그대로 인용하는 대신 망상적인 무조 피아노 독주곡을 짧게 들려준다. 연주를 들은 부르주아들이 한마디씩 덧붙인다. “마에스트로, 파라디시의 ‘피치카토’가 정말 멋지지 않나요?”, “이건 소나타에요, 소나타”, “레티시아도 노래 한 곡만 불러주면 좋을 텐데요”, “오늘은 이미 노래를 너무 많이 해서 피곤해요”, “노래해주기 전까진 저희 안 갈 거예요”, “시간이 꽤 늦었어요. 슬슬 돌아갈까요?” 파라디시의 <소나타 6번> 연주와 레티시아가 노래해주기 전까지 ‘가지 않겠다’는 선언이 이루어진 순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부르주아들은 마음대로 들어온 지인의 집에서 마음대로 나갈 수 없다는 주술에 걸려버린다. 갈 채비를 하던 사람들도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결국 모두들 응접실에 그대로 머문다.

부르주아들의 자잘한 대화가 이어진다. 불평, 사랑, 불륜, 죽음을 앞둔 노인 등 부르주아들이 툭툭 던지는 모티브와 결합된 음악은 얼마간 부뉴엘의 시선을 접어둔 채 슬며시 ‘오페라 전통’을 환기한다. 두어 마디쯤 울리고 사라져버리는 왈츠, 곧장 무조의 심해로 끌어내려지는 낭만주의식 사랑의 이중창, 조금씩 찌그러지는 달콤한 선율의 단편. 아데스가 의도적으로 구성한 이 작은 힌트들은 극과 맞물려 순간적으로 지금 우리가 보고 듣는 이 작품이 어떤 전통에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짧게 명시하면서도 곧장 이를 흩트린다. 중심 추를 가볍게 ‘오페라’ 쪽으로 살짝 기울이는 전략.

이제 남은 것은 끝없는 크레셴도뿐이다. 작은 모티브에 불과했던 것들이 회수되어 더 큰 균열을 만든다. 응접실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각자의 혼란스러운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되는데, 오케스트라는 두 섹션으로 나누어 각각의 이야기를 동시에 쏟아내기도, 짧은 주기로 각각의 이야기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주기도 한다. 노인은 거의 정신을 잃은 채로 “절멸을 보지 않아서 다행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한다. 이어지는 환각과 망상. 가방에서 닭발이 튀어나오고 잘린 손이 응접실을 떠돈다. 조금씩 무너져내리는 사람들의 정신상태는 팽글팽글 도는 듯한 옹드 마르트노의 소리로 적절히 대변된다. 기타, 어린이용 미니어처 바이올린, 실로폰, 공, 문(門), 스틸 드럼, 워시보드, 스프링 코일, 소스 팬, 총소리까지 쓰는 이 화려한 악기편성은 영화에 끼어들었던 초현실적 장면들에 최대한 낯선 음색으로 대응한다. 아데스의 음악은 다시 부뉴엘의 세계를 재현하는 데 집중한다.

괴상한 내러티브를 따라가며 음악을 채워 넣는 것만으로도 물론 벅차지만, 아데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페라에 꼭 필요한 것을 빼놓지 않는다. 다들 이성을 잃어가는 가운데 피아니스트 블랑카는 환청 같은 아리아 ‘Over the sea’를 부르고, 불안할수록 과격해지는 라울은 견디기 어려운 폭력적인 캐릭터지만 점점 언성이 높아지며 히스테릭하게 불러내는 짧은 독창들만큼은 처절하게 아름다워서 듣는 이를 양가적 감정에 휩싸이게 한다. 레오노라는 푸르스름한 조명을 받으며 기타 반주에 맞춰 고요히 노래하고, 서로를 너무 열렬히 사랑해서 자꾸만 죽음을 결심하는 젊은 연인은 오페라의 단골,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랑의 이중창을 부른다(이들에게는 죽을병도, 죽어야 할 이유도 딱히 없고 이유는 그저 사랑뿐이다). 인물들이 조금씩 엉망이 될수록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음악은 더욱 복잡하고 두터워지며, 고고한 부르주아들이 바닥을 보일수록 노래는 점점 더 아슬아슬하고 높아진다.2 오페라 가수에게 엄청난 비르투오시티와 고음을 요구하는 이 쉼 없는 상승세는 부뉴엘의 영화에서 우습게 그려지는 히스테릭한 모습과 정확히 맞물리며, 갈등의 최정점에서 오페라 전통과 부뉴엘 사이의 중립을 이룬다.

성악가들이 엄청난 고음을 뱉어내는 동안 상황은 더욱 파국으로 치닫는다. 근친, 강간, 주술, 망상, 살육, 살인시도가 이어지고, 오페라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극단성과 음악의 복잡함은 후퇴할 줄을 모른 채 더욱 커진다. 부르주아들은 응접실에 감금되어 있지만 동시에 응접실 바깥의 사람들도 쉽게 그곳으로 들어갈 수 없다. 아데스는 느릿하게나마 두 장면을 전환시켜 보여주며 나름의 교차편집을 시도한다. 경찰과 수많은 시민이 이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려고 집 문 앞에 모여들었지만, 아무도 들어갈 용기를 내지 못한 채 어린 소년을 집에 들여보내려 한다. 오페라에서는 무대와 객석의 시선이 고정된 만큼, 영화에서 근접촬영과 몽타주로 알아차릴 수 있었던 강렬한 감각을 음량의 극적인 대조로 보완한다. 모든 성부가 쉼표에 머무를 때 소년이 짧게 “엄마!”를 부르고, 합창과 오케스트라가 곧장 이에 응수하며 소년의 외침에 힘을 보탠다. 하지만 소년 역시 그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도망친다. 다시 응접실. “거미가 죽어야 거미줄이 풀린다”며 집주인을 살해하려는 시도가 이어진다. 모두가 비명을 지른다.

무기를 휘두르기 직전, 소프라노 레티시아가 응접실에서 수십번씩 자리를 바꿨던 자신들이 어느 순간 파라디시의 소나타가 연주되었던 때와 정확히 같은 자리로 돌아왔음을 알아차린다. 너무나 이상한 이 상황에서 레티시아는 그 순간을 ‘재현’해볼 것을 요청한다. 피아니스트가 떨리는 손으로 파라디시의 소나타를 연주하고, 사람들은 확신 없는 목소리로 똑같은 대화를 주저하듯 이어간다. “마에스트로, 파라디시의 ‘피치카토’가 정말 멋지지 않나요?”, “이건 소나타에요, 소나타”, “레티시아도 노래 한 곡만 불러주면 좋을 텐데요.” 결의에 찬 표정으로 레티시아가 혼신의 힘을 다해 아리아를 노래하고, 주술이 풀린다. 부르주아들이 ‘절멸의 집’으로부터 마침내 도망쳐나간다.

 

3.
엔딩. 부뉴엘의 영화는 부르주아들이 이번엔 훨씬 더 많은 이들과 성당에 갇히는 장면으로 끝난다. 아데스의 오페라도 이와 동일하다. 부르주아들이 마침내 응접실을 빠져나갔지만 바깥도 여전히 똑같은 림보인 것처럼, 응접실의 출구였던 문이 또다시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성당의 문으로 바뀌며 부르주아와 사람들이 그곳에 갇힌다. 또 다른 절멸의 시작을 알리며 오페라가 끝난다.

단 한 번을 주춤할 줄 모른 채 끝까지 몰아치는 이 영화를 택한 아데스는 영화에 내재된 음악적인 설정을 딛고 ‘영화의 오페라화’라는 것의 자연스러움을 획득한다. 아데스의 음악은 이 오페라를 둘러싼 주변의 것들을 모두 관망하면서 극의 여러 층위에 빠르고 유연하게 반응한다. 이 매끈한 움직임과 하나에 귀속되지 않은 넓은 시각, 그리고 음악 자체의 탁월함이 이 오페라를 오래 들여다보게 한다.

물론 ‘오페라’라는 장르의 유효성을 묻지 않을 수는 없다. 부뉴엘의 영화 <절멸의 천사>를 굳이 이제 와서 ‘오페라’로 바꿀 필요가 애초에 있겠냐는 회의적인 질문. 하지만 반대로 그런 의미에서 부뉴엘의 <절멸의 천사>라는 소재가 나름의 답변을 내어준다. 여전히 ‘벨칸토’와 ‘오페라’와 과시적인 ‘드레스’와 ‘격양된 목소리로 교양을 뽐내는 어투’까지, 이 영화에는 오페라의 원천이 될 수 있는 대상화된 캐릭터들이 생생히 살아있고, 동시에 이들에 대한 조롱의 시선이 담겨있다. 오페라를 즐긴 부르주아들에 대한 부뉴엘의 조롱 섞인 회의적인 시선은 오페라 <절멸의 천사>의 성립 조건이다. 아데스가 오페라에서 부뉴엘의 시선을 완전히 거두고 그저 영화 안의 세계를 파고들었다면 이 오페라 또한 부뉴엘의 세계에 영문도 모른 채 갇혀버린 놀잇감이 되었을 것이다.

오페라라는 형식과 오늘날의 관객 사이의 시차를 줄이고, 이 오페라에 나름의 동시대적 당위를 부여하고, 관객이 이 오페라에 더 쉽게 진입하게 해주는 것은 아데스가 기꺼이 동참한 이 비웃음이다. 오페라와 오페라를 즐기는 이들을 ‘부르주아적’이라며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완전히 부정할 수도 없다. 이 오페라는 스스로에게 자조적 농담을 기꺼이 던짐으로써 오페라라는 특수한 장르, 때로 부르주아적 장르라 일컬어지는 이 제도를 오늘날에도 유효하게 한다.

동시에 아데스는 부뉴엘에게서 한 발짝 떨어진다. 여전히 누군가는 ‘오페라’가 탄생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오페라하우스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아리아가 있어야 하고, 오페라 글래스를 쓰고서도 잘 보이지 않지만 반드시 실황으로 무대를 목격해야 하고, 단 한 명도 무너지지 않은 채 극을 실시간으로 지탱해야 한다는 이 까다로운 오페라라는 퀘스트. 어떤 이들은 이 번거로운 무대를 여전히 사랑한다. 오페라에 대한 애정과 이 음악의 전통, 부뉴엘의 부르주아에 대한 조롱처럼 오페라를 우습게 바라보는 이들, 자조적인 농담. 아데스의 음악은 부뉴엘의 함정을 가볍게 뛰어넘고, <절멸의 천사>와 오페라를 둘러싼 이 교차하는 시선들을 모두 고려하면서도 부뉴엘의 영화와 배배 꼬인 우정을 맺는 데 성공한다.

오페라가 끝나고 관객들은 깔깔거리며 무사히, 그리고 때늦지 않게 오페라하우스를 탈출한다. 아데스의 오페라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또다시 성당에 갇힌 채 끝나는 부뉴엘의 림보를 제대로 끝맺기 위한 도돌이표다. 그리고 꽤나 오페라다운 오페라다.

2017년 10월 23일 Metropolitan Opera House, Dress Rehearsal
2017년 11월 18일 BAM Rose Cinemas, Live in HD


신예슬 | shinyeasul@naver.com / http://shinyes.kr
음악학과 현대음악을 공부했다. 음악과 가장 가까운 사물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다.

각주

  1.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으로, 18-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널리 쓰였던 기교적 창법을 지칭한다.
  2. 성악가 레티시아 역을 맡은 소프라노 오드리 루나(Audrey Luna)는 이 오페라에 나오는 고음부 A음을 노래한 것으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의 최고음 기록을 갱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