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락 페스티벌 中 김용성 X 박선주 〈실마리〉 포스터

협업의 조건들

《여우락(여기 우리 음악이 있다) 페스티벌》은 현재 국악계에서 조명 받는 음악가나 일련의 창작 흐름을 살펴볼 수 있는 자리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나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이 페스티벌이 ‘국악’이라는 느슨하면서도 꽤나 분명한 테두리를 전략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별 작품의 완성도나 페스티벌의 성패를 기계적으로 판단하는 일보다 《여우락 페스티벌》이 획득하려는 대중적 이미지나 예술적 성취를 확인하는 작업이 훨씬 중요하다.

최근에는 다른 방향의 질문도 생겼다. 《여우락 페스티벌》이 해를 거듭하며 ‘협업(Collaboration)’을 중요한 정체성으로 확립하면서 비평을 위해 고려해야 할 지점이 많아졌다. 그리고 몇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일단 좋은 것과 좋은 것이 만난다고 반드시 더 좋은 무언가가 탄생하는 건 아니었다. 협업은 언제나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겠다는 매혹적인 맹세처럼 들렸지만 이미 검증된 두 예술가가 한 자리에 만난다는 이벤트 자체를 의미할 뿐 그 이상의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주는 경우는 드물었다. 

여러모로 훌륭한 협업의 조건은 까다로워 보였고, 특히 음악가끼리 협업할 때 어려움은 배가 되는 듯했다. 두 음악가 사이의 균형이 무너져 한쪽으로 치우치는 작업이 허다했다. 대개 프로시니엄 극장 공간의 문법에 맞는 스펙터클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음향적으로 불리한 요소가 말끔하게 제거되는 식이었다. 이 과정은 때때로 악의적이라고 느껴졌고 그만큼 잔혹했다. 반대로 둘 중 어느 쪽도 자신의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각각 자신의 기량을 발휘하지만 하나의 공연으로 일관된 흐름을 구체화하지 못하는 작업도 있었다. 협업의 이유를 찾기 어려웠기에 석연치 않은 감정이 들었지만 각자의 본체를 배려하거나 지켜낸다는 점에서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협업의 결과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었지만 위와 같은 사실을 발견하면서 나의 관심사는 차츰 협업의 방식과 태도로 옮겨갔다.

단순히 협업의 결과물이 얼마나 훌륭한지 따지는 비평은 의미가 없어 보였다. 본질적으로 협업이 왜 필요한지, 훌륭한 협업의 조건은 무엇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었다. 협업은 두 세계가 충돌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필연적으로 손실이 따를 수밖에 없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되 타인의 세계를 돕기 위해 때때로 뒤로 물러나거나 가장(假裝)하며 자신을 일시적으로 지우기도 한다. 협업을 위한 협상의 테이블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평등한 협상이란 무엇일까? 평등한 협상은 언제나 멋진 결과물을 담보하는 것일까? 각자 오랜 기간 만들어 왔던 음악의 질서와 규범, 기술과 양식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하나의 공연을 만드는 과정에서 협상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한쪽에게 유리한 협상이 이루어졌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헤아려 보고 싶었다. 그리고 협업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지 질문했을 때 나름의 답을 찾을 수 있는 작업이라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매끄러운 음악회

올해 《여우락 페스티벌》의 모든 공연을 보았고, 예년에 비해 인상적인 작업이 많았다. 그 중 이미 다른 무대에서 초연된 후 피드백을 거쳤거나(무토(MUTO) X 입과손스튜디오 〈두 개의 눈〉) 협업자와 완벽하게 분리되어 각각 단독 무대를 시도한 작업(추다혜 차지스 〈오늘밤 당산나무 아래서〉)은 비평의 대상에서 제외했다. 《여우락 페스티벌》의 정체성이 협업에 방점이 찍혀있다면, 다른 무대에서 시도된 적 없는 새로운 작업에 중점을 둘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기준을 적용했을 때 김용성과 박선주의 〈실마리〉가 문제적으로 다가왔다.

처음에는 둘의 만남을 선뜻 상상하기 어려웠다. 각자 지향하는 음악 색깔이 다르기 때문이다. 김용성은 자신의 이름을 내건 산조를 만든 아쟁 연주자이고, 박선주는 ‘가야금 퍼포먼스’라는 장르를 개척한 가야금 연주자이다. 김용성은 전통음악의 문법을 집요하게 탐구하지만 박선주는 영상이나 무용 등 다양한 예술적 질료를 자신의 표현 도구로 삼고 있다. 게다가 박선주의 음악에는 그를 특정할 수 있는 세련된 서정성이 있다. 음과 음 사이를 연결하는 방식이 아니라 가야금으로 연주해야만 완전해지는 독특한 서정성을 만들어내는 음악가이다. 두 음악가 모두 전통음악의 문법이나 악기 본연의 특성에 깊이 천착한다는 교차점이 있지만 각자가 연마한 표현방식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기대와 우려가 있었지만 〈실마리〉는 표면적으로 굉장히 잘 정돈된 공연이었다. 공연은 ‘실’에 관한 문화사를 살펴보는 렉처로 시작된다. 이후 두 음악가는 실제 물레와 누에고치를 사용해 실을 뽑으며 명주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관객은 누에고치에서 뽑아져 나오는 가늘고 흰 실을 침묵 속에서 긴 시간 동안 바라보는 생경한 경험을 하게 된다. 실을 뽑고 나서 직접 악기에 하나 하나 줄을 매고 조율한 뒤 마침내 연주가 시작된다. 〈실마리〉는 시각이나 청각뿐만 아니라 촉각을 극장 공간으로 끌어들인다. 특히 연주자가 하는 일상적인 행위를 공연으로 포섭하면서 줄의 텍스쳐와 장력, 마찰감을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도록 돕는다. 공연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는 연주자의 ‘기본’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므로 정련된 느낌을 갖게 했다. 두 음악가의 음악적 밸런스도 팽팽했다. 연주 시간이 그리 길진 않았지만 서로의 중요한 영역을 해치지 않으면서 각자의 차례를 기다리듯 모든 음악적 협업의 과정이 세심하게 이루어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물레에서 실을 뽑는 아이디어는 올해 여우락 페스티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은 박우재가 박지하와 2019년 문화비축기지에서 함께 했던 〈그대로 보기〉에서 상당 부분 차용한 것처럼 보였다. 공연의 주된 컨셉과 아이디어가 누구로부터 나와 구체화되었는지 단정하긴 어렵지만 협상의 테이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실마리〉는 군더더기 없는 공연이었다. 스펙터클이 배제된 조건에서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악기와 연주자의 관계를 사려 깊게 지켜볼 수 있는 자리였다.

은닉, 위장술 혹은 손실된 것

모든 과정이 너무나도 매끄러웠기 때문일까? 이 공연의 매끄러움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공연의 모든 전략이 촘촘하게 구조화 되어 있어서 틈입하기 어려웠고, 기승전결을 그려내는 방식도 특별한 과잉 없이 원만했다. 다른 공연에서 하나씩은 꼭 찾아볼 수 있었던 요철이나 허점, 굴곡을 찾기 어려웠다. 오히려 베테랑 음악가의 무대에서는 종종 두 세계가 양립하며 첨예한 간극이 날 것 그대로 드러나곤 했다. 우리가 흔히 ‘녹아들지 않는다’고 표현하는 상황이 무대 위에서 적나라하게 발생하곤 했다. 하지만 〈실마리〉에서는 이런 종류의 갈등은 보이지 않았다.

〈실마리〉에서 경험한 매끄러움을 좋은 협업의 결과라고 보아도 좋은지 나름의 답을 내려야 했다. 또한 일반적으로 어떠한 형태로든 가시화되는 충돌의 양상이 〈실마리〉에서 보이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다. 〈실마리〉는 두 음악가의 핵심적인 잠재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효과적인 구도였을까? 이 질문에는 답을 내릴 수 있었다. 〈실마리〉에서 박선주가 잘 하는 것을 박선주의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김용성에게 기대하는 바는 충족이 되었지만 박선주에게 기대하는 바는 모두 채워지지 않았고 여전히 많은 여백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김용성과 박선주가 만나 ‘하나의 공연’을 만드는 과정에서 박선주의 은닉과 위장술이 전략으로 작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박선주는 〈실마리〉에서 자신의 음악적 색깔을 제시했다. 그가 하는 음악이 어떤 길을 걸어 왔고 앞으로 어디를 향해 갈 것인지 또렷하게 알 수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핵심을 지켜내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 나는 이것이 박선주가 가진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박선주의 본래 이미지와 〈실마리〉를 통해 사람들에게 각인될 이미지는 분명 달랐다. 〈실마리〉의 매끄러움은 이 지점을 건드리고 있었다. 나는 박선주가 잘 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다른 방식의 협업을 상상할 수 있다. 

모든 협업의 과정을 섣부른 추측으로 예단하지 않고 열어두려 한다. 다만 두 음악가의 협업이 이제 막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시작한 음악가와 그들 각자의 음악을 조금 새로운 방식으로 소개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라면, 〈실마리〉에서 느낀 매끄러움은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를 한 셈이다. 나는 협업의 결과물뿐만 아니라 협업자의 배경과 그들의 의도를 다각도로 고려하고 싶다. 작품의 내재적 구조에만 매몰되지 않고 협상의 테이블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정치적 이해관계를 역으로 추적하고 싶다. 그곳에 우리가 마주해야할 더 많은 진실이 있다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국악계에서는 여전히 자신의 산조를 만드는 일이 금기시 된다. 전통음악을 공부한 사람이 전통음악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자신의 음악을 하기 위해서는 ‘용기’를 내야하고 때때로 생존에 위협을 받는다. 끊임없이 새로울 것을 강요하며 청년 세대를 호명하지만 정작 청년을 호명한 사람들은 낡은 채로 모든 특권을 누리고 있다. 여전히 ‘전통’은 소수의 사람들이 독점하고 있고, 청년들은 ‘전통’의 바깥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더 많은 연주자들이 자신만의 산조 만들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결국 음악의 생명은 청년을 호명하고 승인하며 서열화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아닌 자신만의 비평적 언어를 갖고 제도의 바깥으로 달려 나가는 사람들에 의해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혜인 | apollo_cs@naver.com
전통예술과 민속을 공부했다.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전통을 사유하는 방식을 살펴보는데 관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