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씽씽(SsingSsing) EP 앨범 이미지
수상한 찬사
이것은 필시 ‘실험’ 혹은 그와 비견되는 수사가 적용될 현장이다. 서구의 음악과 여타 예술 장르를 전면적으로 포섭하여 주변화된 국악의 권능을 복권하려는 빈번한 시도들, 이질적 요소들이 착종된 무대 위에 그 어떤 반목도, 고집도, 팽팽한 긴장감도 없이 매끄럽게 재단된 국악과 유의미한 음악적 문제의식 없이 새로운 예술적 질료를 발굴하여 과시적으로 병렬하는 무대들 말이다. 서구와 자본이 잠식한 현대의 시공에서 국악으로부터 탈피하거나 국악을 해체하는 시도는 그 실체와 무관하게 언제나 숱한 찬사를 받으며 정당화되어 왔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예술을 혼합하여 이를 국악이라 명명하는 야심찬 집도(執刀)의 현장은 오직 국악의 ‘미래’를 담보하는 긍정의 언어로만 적극 호명되어 온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실험’의 장을 ‘새로운 국악’이라는 이름 아래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다. ‘새로운 국악’은 언뜻 보면 온갖 전형을 과감히 해체하고 급진적인 것을 추구하는 예술의 본질에 부합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국악 앞에 ‘새로운’이라는 형용사를 붙임으로써 기존의 국악, 전통으로서의 국악은 낡은 것이 되어 버린다. 즉 ‘새로운 국악’이란 자신의 역사적 맥락은 배제한 채 대중과 시장, 서구와 자본이라는 욕망 사이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진 교섭의 결과물인 것이다. 사후적으로 획득한 ‘새로움’이 아니라 기획된 구호로서 스스로 소환한 ‘새로움’은 지배적인 힘의 논리에 역행하거나 이 힘에 의해 낡고 조야하다고 규정되는 것을 손쉽게 배격해버렸다. 그럼에도 이 비틀린 구호는 국악계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목표처럼 인식되고 여러 미디어를 통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며 여전히 막강한 힘을 과시하고 있다. ‘새로운 국악’은 단순히 예술적 다양성을 담보하는 중립적 기표가 아니다. 오히려 지배적 이념을 체화한 기표이며, 그 탄생과 이상(理想)에는 정치적인 함의가 뚜렷하게 감지된다.
물론 이러한 현상에 대한 적확하고 시의적절한 비평이 부재했던 것은 아니지만 생산적인 비판과 논쟁은 ‘약자(국악) 보호’라는 프레임에 의해 끊임없이 유보되거나 효과적으로 말소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비판의 목소리를 배제하는 방식을 원동력 삼아 국악계의 정체를 파기하겠다는 선언이야말로 정체를 끝없이 지연시킬 뿐이지 않은가? 따라서 격리된 비판의 정당한 지위를 반문하고 국악계가 몰두하고 있는 찬사의 이면을 살펴보겠다는 기획, 그것의 정당성과는 무관하게 ‘논란’은 어쩌면 예정되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논의를 시작하기 위해 현재 국악계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구체적으로 일별해볼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그 핵심에는 서양음악과의 혼합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국악실내악단 슬기둥을 시작으로 1990년대, 2000년대를 거쳐 2017년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이 주류적 흐름 속에서 이제 씽씽(SsingSsing, 이하 씽씽)이 대중의 이목을 끌고 있다.
씽씽은 어어부 프로젝트, 영화음악감독으로 익숙한 리더 장영규(베이스)를 주축으로 이철희(드럼), 이태원(기타), 이희문(보컬), 신승태(보컬), 추다혜(보컬) 등 6인조로 구성된 민요 록 밴드이다. 주로 경서도 민요, 서울굿 등을 록 음악으로 편곡하여 선보인다. 씽씽처럼 록 밴드나 콰르텟 등 서양음악의 악기 편성에 전통 성악을 포함하는 시도는 현재 국악계에서 두드러지는 양상 중 하나이기도 하다. 씽씽을 특징짓는 하나의 축이 록과 민요의 결합이라면 다른 한 축에는 글램록이라는 화려한 외적 스타일을 통해 이분법적 젠더 구분을 파기하려는 시도가 존재한다. 젠더와 관련된 이슈가 첨예하게 다루어지면서 민요를 소재로 만든 생경한 음악에 드랙 요소를 결합한 씽씽은 독특한 입지를 점유한 듯 보인다.
이들은 APAP(Association of Performing Arts Presenters), 글로벌 페스트(Global Fest) 등 해외의 권위 있는 마켓/페스티벌에 참가하면서 본격적으로 미디어와 대중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유수의 해외 마켓/페스티벌 참가 이력이 그 자체로 이들의 ‘음악성’을 담보하듯 소개된다는 것이다. 비평계는 물론 수많은 미디어에서 씽씽에 대한 상찬을 쏟아내고 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한결같다. 씽씽은 ‘세계를 홀린’, ‘외국에서 더 유명한’, ‘미국이 주목하는’, ‘미국 공영라디오에 출연한 한국인 최초’의 그룹이며 이들의 시도는 그간 국악계에 존재했던 무수한 ‘실패’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국악계의 무수한 ‘실패’란 무엇인가? 나아가 국악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이며, 이를 승인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그리고 이러한 가운데 씽씽은 어떻게 ‘성공’의 입지를 획득하게 되는가? 이에 대한 논의가 소거되어 있는 씽씽에 대한 찬사는 어쩐지 수상하기만 하다.
찬사의 이면, 승인의 제스처들
씽씽에게 미국의 ‘NPR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NPR Tiny Desk Concert, 이하 NPR)’ 출연은 하나의 사건이었음에 틀림없다. 2014년 여우락 페스티벌에서 첫 무대를 선보인 씽씽은 그간 꾸준한 음악적 행보를 이어오며 국악계 내부에서도 주목을 받아왔다. 이들의 해외진출 과정 역시 ‘월드뮤직’으로 분류되는 여타 팀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우연한 계기로 NPR에 출연한 후 국내외 언론과 SNS를 통해 씽씽의 소식과 라이브 영상이 확산되면서 이들의 대중적 인지도는 급속도로 상승했다. 물론 이전에도 씽씽은 팬덤이 존재할 정도로 적지 않은 인기를 구가하는 팀이었지만 범대중적으로 씽씽이라는 이름을 각인시키게 된 시발점에는 NPR 출연이라는 이벤트가 존재한다.
실제로 NPR 출연이라는 이벤트의 ‘힘’은 미디어에서도 여과 없이 드러난다. 대중음악비평가 김작가는 <케이팝 일변도 탈피한 새로운 ‘수출상품’>이라는 글에서 NPR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를 아델, 잭 존슨 등 서구의 유명 아티스트들이 출연한 프로그램이라 소개하며 한국인 최초로 이 매체에 출연한 씽씽을 호평했다. 그에 따르면 씽씽의 음악은 국악기나 음계를 사용하지 않은 채 기존 민요를 서구의 어법으로 완벽하게 편곡해낸 국악을 ‘기반’으로 한 결과물이다. 그러나 이것은 보도자료에나 쓰일 법한 씽씽에 대한 대외적 설명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가 씽씽을 호평하는 이유를 좀 더 면밀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씽씽의 음악을 가장 ‘한국적’이면서 가장 ‘보편적’인 음악이라 주장한다. 물론 ‘한국적’이라는 의미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존재할 수 있겠지만 그의 언설에서 가장 ‘한국적’이라는 말은 씽씽의 음악이 민요라는 전통에 기반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서구의 음악적 형식에 따라 전통을 재단한 음악을 가장 보편적인 음악으로 상정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만약 보편의 음악이 대다수가 편안하게 느끼는 서구의 음악을 의미한다면, 그 범주에 포섭되지 않는 음악을 서구의 어법으로 재편하여 이를 낯설고 흥미롭게 소비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상찬을 이어가는 행위는 명백히 타자화 된 전통을 추종하는 행위가 아닌가? 비판적 성찰 없이 서구의 승인을 국악의 ‘성공’으로 연결 짓고 관습적인 언어들을 소환해 찬사를 이어가는 비평의 태도는 과연 온당한가?
그런데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김작가가 국악계 도처에 난립한 ‘퓨전국악’이라는 실패의 전형에서 씽씽을 재빠르게 분리해낸다는 점이다. 김작가는 씽씽의 음악이 ‘억지스러운 물리적 결합’이 아니라 ‘화학적 융합’이 제대로 이루어진 음악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한 ‘퓨전국악’에는 여러 문제점과 논쟁들이 존재하지만 일단은 차치하도록 하자. 김작가에 따르면 ‘잘된 결합’을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은 그저 서양음악과 국악의 자연스러운 조화이다. 그러나 국악과 서양음악의 결합에서 어떤 ‘유창함’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것은 국악과 서양음악 간의 협상이 ‘완벽하게’ 성사되었다는 증거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완벽한 조화를 이룬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갈등도, 마찰도, 결렬도 없이 서구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체화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두 문화가 만났을 때 발생하는 생경함, 부조화, 이질성을 첨예하게 드러내기를 거부하거나 혹은 이를 드러내는 데 실패했다는 뜻이다.
오늘날 서양음악과의 ‘교류’ 혹은 ‘조화’라는 낡은 이상(理想)은 좀처럼 깨지지 않는다. ‘교류’와 ‘조화’는 상호간의 위계 없는 동등성에 근거한다. 그러나 국악을 서양음악의 어법으로 재구성하고 그로 인해 완전히 서구의 것으로 전도되는 국악 특유의 어법과 미감을 떠올려본다면 이 혼합의 장에서 평등하고 조화로운 교류가 일어나리라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잘된 결합’이란 너무나 손쉽게 서구의 승인에 의해 결정되고 이를 승인하는 비평적 주체들의 청각적 경험 역시 서구의 자장 아래 편향적으로 이루어진 탓에 이로부터 파생되는 위험성 또한 쉽게 간과되어 버리곤 한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해외 진출이라는 가시적 성과가 상업적 성취를 기약하는 표식, 즉 시장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국악이 지향해야 할 목표처럼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러한 서구의 ‘승인’은 언제나 ‘음악성’ 혹은 ‘작품성’을 보장한다는 듯 포장된다. 국악과 서양음악의 ‘억지스러운 결합’과 ‘잘된 결합’을 구분해내는 기준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 못하면서 서구의 승인을 곧 음악에 대한 찬사로 연결 짓는 현상은 비단 비평뿐만 아니라 세간에 고착된 관성이기도 하다. 어쩌면 반대로 지배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비평과 포획된 찬사의 남용이 이러한 현상을 고착시켜 왔는지도 모른다.
씽씽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 역시 일관된다. 씽씽처럼 국악을 다른 문화와 접목하는 소위 ‘현대적 재해석’ 시도가 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국악의 ‘발전’을 기약할 수 있고 나아가 서구로 대변되는 ‘세계’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국악에 서양음악 혹은 다른 예술장르를 혼합하는 이른바 ‘현대적 재해석’의 시도는 이미 포화상태다. 놀랍게도 이런 시도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포화상태라고 보는 편이 적절하다. 이는 국악을 서구의 문화와 결합하여 ‘현대적’으로 가공한다고 해서 국악이 ‘대중’들이 즐기는 ‘세계’ 보편의 음악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애초에 국악이 시장으로부터 유리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지루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국악이라는 음악 자체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서구 중심적 헤게모니는 ‘국악은 낡은 것’이라는 오명을 ‘참’의 명제로 귀속시키도록 끊임없이 힘의 분배에 개입하고 이를 조작한다. 이때 가공해야 할 대상으로 언제나 예외 없이 서양음악이 아닌 ‘전통’과 ‘국악’이 호명된다. 그러므로 국악을 변형시키고 해체하는 단편적인 수단을 통해 국악을 대중과 시장의 중심에 놓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를 위해 오히려 바꾸어야 하는 것은 국악이 아니라 거시적 토대들이다. 결국 ‘현대적 재해석’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는 수많은 시도는 국악의 ‘미래’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일그러진 국악의 ‘현실’에 가깝다.
씽씽이라는 성공적인 경우가 존재하지 않느냐는 반문 혹은 비판도 존재할 수 있겠다. 씽씽의 경우 멤버들 개개인의 음악적 토대와 활동 영역이 다양했고, 민요와 록의 결합이라는 음악적 스타일 이외에 글램록이라는 외적 요소가 존재했다. 민요에서 출발하되 민요 특유의 질감과 이미지를 록의 어법과 화려하고 독특한 의상으로 새롭게 편집해냈다. 이것이 ‘운 좋게’ 서구 유명 매체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이 소식이 미디어와 SNS를 통한 다양한 방식의 확산과 소비가 결합하며 현재와 같은 독특한 입지를 낳게 된 것이다. 씽씽에 대해 대중들이 느끼는 세련되고 독특하고 감각적인 이미지는 서구 매체의 승인, 이를 국악의 성공으로 상찬하는 미디어와 비평, 그리고 SNS을 통한 재생산 등 이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히는 가운데 은밀하게 직조된 매혹에 가깝다. 그리고 이 매혹은 예외적이고 이례적이며 높은 확률로 한시적이다. 결국 우리는 다시금 서구의 위압적인 힘, NPR이라는 매체의 승인에 의해 획득하게 되는 입지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비슷한 시도, 비슷한 음악이더라도 활동의 영역과 승인의 주체가 국내의 극장에서 미국의 유명 공영 라디오 방송으로 변화할 때 그것이 대중들에게 미치는 파급력, 씽씽이 우리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진짜’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좋은 음악의 보편적 기준은 무엇이며, 그 기준은 누구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리고 그 기준은 어떻게 국악이 스스로를 제어하도록 만드는가? 서구 음악시장의 러브콜이란 오직 ‘서구의 기준’을 의식한 채 전통을 전략적으로 취사선택하는 방식을 통해서만 성사되는 것은 아닌가? 국악은 서양음악과 전혀 다른 생태와 맥락 속에 자리한 음악이지만 대부분 서구의 승인에 의해 음악성과 타당성을 인정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전통에 대한 서구의 관용, 승인, 포섭은 많은 경우 서구의 기준을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윤리적인’ 알리바이로 작용하거나 오리엔탈리즘적 소비로 전락하지 않았는가? 이처럼 씽씽을 둘러싼 찬사의 이면에는 수많은 질문들이 내재해 있다.
존중/오해
그런데 씽씽이 서구나 자본의 논리를 강박적으로 의식하거나 이에 함몰된 팀이라고 판단할 경우 몇 가지 난관에 봉착한다. 씽씽의 구성원들이 지금까지 보여준 음악적 행보가 매우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이태원이 이끄는 음악동인 고물1, 장영규가 이끄는 비빙2이 전통음악을 사유하고 존중하는 방식은 신뢰할 만한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여러 인터뷰를 통해 자신들의 음악이 ‘국악’이 아닌 ‘음악’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피력해 왔으며 국악을 둘러싼 여러 담론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아끼지 않았다. 이것이 단순히 음악만을 놓고 그들을 예단하기 어려운 이유이다. 가장 유력한 상상은 단지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음악적 시도의 폭을 확장해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해온 기존의 시도가 국악에 대한 심도 있는 탐구였다면 현재는 밴드 포맷의 음악을 통해 시도의 영역을 넓히는 중이라는 가설을 생각해볼 수 있다. “다른 나라의 앞선 음악과 같은 수준으로 만들어야 외국인도 계속해서 우리 음악을 찾아 들을 것”이라는 장영규의 인터뷰를 보면 여전히 서구의 음악적 기준에 영합하기 위해 국악을 상업적으로 재편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거두기란 어렵지만 “하고 싶어서” 한다는 이희문의 명쾌한 대답은 위의 가설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여우락페스티벌 <씽씽락락> 포스터
앞서 언급한대로 씽씽에 대한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분명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씽씽의 음악이 민요보다 록에 훨씬 가까운 음악이라는 점이다. 물론 ‘민요와 록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피해갈 순 없겠지만 애써 이 둘을 구획 지어 본다면 씽씽의 음악에서 ‘민요적’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그리 많지 않다. 민요의 특징적인 발성과 창법이 두드러지기는 하지만 대중음악의 틀에 맞춰 민요 특유의 불균질한 혼소박 구조를 변형시키고 템포를 효과적으로 조절/제어한 탓에 민요만의 독특한 호흡 체계와 맛을 느끼기란 어렵다. 씽씽의 주된 음악적 구성은 본래 민요가 가지고 있는 주선율을 이희문, 신승태, 추다혜의 목소리로 전방에 두드러지게 배치하고, 이 주선율을 토대로 록 밴드가 익숙하고 편안하게 낼 수 있는 사운드를 후방에 배치하는 것이다. 그런데 전자의 주선율이 가진 특성 또한 후자의 과정이 수반되면서 많은 부분 각색되는데 이러한 탓에 일반적인 전통 민요에 보다 익숙한 사람들은 씽씽의 음악에 대해 불안정하고 굴절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점은 2017년 여우락 페스티벌 <씽씽락락> 중 명창 이춘희와 씽씽의 합동무대에서 보다 극명하게 드러나기도 했다. 따라서 국악과 록의 ‘완벽한 조화’ 내지는 ‘국악의 미래’로 씽씽의 음악을 명명하는 언설들은 부적절한 찬사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포획된 찬사가 결국은 국악계에 만연해 있는 오리엔탈리즘적 타자화를 지향하고, 부추기고, 소비하는 태도를 끊임없이 정당화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물론 이 글에서 예술가의 자율성을 거부하거나 서양음악과 혼합하는 흐름 자체를 폐기시켜야 한다는 어불성설을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와 서구화는 거스르기 힘든 공고한 체제이고 국악 역시 이러한 현대의 물적 토대 위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강박은 논리적 비약에 불과하다. 예술가의 자율성 역시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특정 결과물을 ‘국악’이라 명명하며 사회에 안착시킬 때는 보다 다층적인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히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서양음악의 형식과 틀에 맞춰 국악의 텍스쳐를 재구조화하는 시도 자체에 무조건적인 찬사를 보내고, 국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 부추기며, 국악에 대한 대중들의 이해를 원천적으로 차단해버리고 이러한 시도 자체가 국악이라 인지하게끔 만드는 미디어와 비평의 태도이다. 이러한 반복적인 매뉴얼이야말로 저지된 국악의 요체일지도 모른다.
필자의 주장은 참으로 오랫동안 민족주의나 본질주의, 순수주의라는 숱한 비난과 오해에 맞서야 했다. 서구의 위압을 완벽하게 제거할 수 없는 오늘날 민족적 기치를 내세워 ‘원형’으로서의 ‘전통’을 강박적으로 구현하는 것은 국악의 또 다른 정체를 약속할 뿐이다. 전통을 소재로 한 음악에서 전통은 어떤 경우든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 굴절되며 일정 부분의 손실과 변형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다만 서구 중심의 헤게모니 속에서 국악을 적극적으로 도구화하고 타자화한 결과물에 대해서는 찬사의 언사들을 쏟아내는 반면 이 문제에 개입하는 ‘힘’에 관한 논의는 너무나도 쉽게 탈락되거나 은폐되어 버렸고, 이러한 현상을 비판적으로 점검하는 행위는 늘 고루하고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진 않았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서양음악에 대한 존중만큼 국악에 대한 이해와 존중도 선행되고 있는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점검하는 태도야말로 숱한 오해에도 불구하고 비평이 끝끝내 지켜내야 할 윤리일 것이다.
성혜인 | apollo_cs@naver.com
전통예술과 민속을 공부했다.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전통을 사유하는 방식을 살펴보는데 관심이 있다.
각주
- 음악동인 고물은 국악과 관련된 역사적, 철학적, 비평적 논쟁들을 ‘공연형 다큐멘터리’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무대화 하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우리의 삶과 음악이 분리되지 않았던 시대의 국악과 현대의 국악이 어떻게 다른지 탐색하며 음악학과 음악이론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언어와 문법을 벗어나 국악을 사유하는 시도를 선보이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가곡에 접근하는 일곱 가지 방법- 한 노래의 삶과 죽음”, “가곡_평양사투리”, “국악에 관한 세 가지 논쟁”, “예쁜 백조새끼”, “음악기하학의 두 가지 풀이”, “국악주의자들” 등이 있으며 매달 연습실 정기연주회를 열고 있다. 박찬경 감독의 영화 “만신”의 음악을 담당하기도 했다.
- 비빙은 궁중음악, 불교음악, 굿, 가면극, 판소리 등 국악계 내부에서도 소외되거나 고립된 전통에 관심을 가져왔으며 이를 세심하게 탐구한 결과물을 시리즈로 발표했다. 대표작으로는 “이(理)와 사(事)”, “이면공작(裏面工作)”, “첩첩(疊疊)”, “피-避”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