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소울/R&B 가수 루 롤스(Lou Rawls)는 음악에 대해서 널리 퍼져 있는 구절 하나를 남겼다. “음악은 세계 최고의 의사 소통 방법이다. 당신이 부르는 노래가 어떤 언어인지 사람들이 알지 못하더라도, 그들은 그것이 좋은 노래라는 걸 알 수 있다.” 세계 어디서든 통하는 음악의 위대함을 설파한 이 구절에서 그가 무의식 중에 짚은 것은 음악이라는 예술 형식이 탈언어적 속성을 기본적으로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음, 혹은 파장은 그대로 남아 듣는 이의 뇌를 자극한다. 언어로부터 자유로운 예술 형식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음악의 이러한 특징은 확실히 다른 형식이 지니지 못한 특권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음악이 결코 언어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 가사다. 이것은 대중음악의 영역에서 더 극대화되는 현상이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가사 없는 대중음악을 쉽게 상상하지 못하(거나 그런 건 서양 클래식이나 재즈의 영역에 들어간다고 여기)며, 가사를 음악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손쉽게 받아들인다. 재미있는 것은 보편 대중의 반응이 아닌 음악비평의 영역이라고 가사의 중요성이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국내와 국외를 막론하고, 가사에 대한 분석은 사운드에 대한 분석만큼이나 대중음악 비평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소재 중 하나다.

존재하는 요소에 대한 비평, 혹은 반응이 이루어지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때로 가사에 대한 이 모든 반응이, 음악에 존재하는 다른 부분까지 침식해 들어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면 그건 지나치게 나간 것일까? 가사가 사운드보다 특별히 더 중요할 것이 없다고, 혹은 사운드의 뒤에 온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사람들이 가사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몇 가지 과잉된 상황을 낳는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문학 위에 걸터앉아

“위대한 미국 노래의 전통 하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했다는 선정의 변과 함께 밥 딜런(Bob Dylan)이 201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당연하게도 크나큰 찬사와 함께 그의 창작물이 ‘문학’인지에 대한 거센 논쟁이 펼쳐졌다. 그 논쟁에 참여하는 것은 이 글의 역할이 아니다. 다만 내가 초점을 맞추고 싶은 부분은 이 수상에 대해 음악 매체 및 비평가들이 보낸 지지에 얽혀 있는 일련의 욕망이다.

“새로운 언어로서 끊임없는 의미를 만들어내며 우리가 세계를 인지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위대한 작가가 하는 일이다.”1 “많은 사람들이 지난 수십 년 동안 밥 딜런을 위대한 미국의 시인으로 여겼고, 이제 그것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2 “하지만 그간 문학은 물론이요 고전음악에 비해서도 늘 세속적이며 얕은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대중음악의 운명을 떠올려 볼 때 딜런의 수상은 배경을 떠나 감격스러운 사건이다.”3각자의 방식으로 딜런에게 축하를 보내는 이러한 구절에서 느껴지는 것은 문학의 권위에 대한 대중음악의 선망이다. 생각해 보면, 사람들은 언제나 문학으로부터 음악의 가치를 관개해 오고 싶어했다. 딜런을 수식하는 가장 흔한 표현이자 대중음악에서 그가 본격적으로 시발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는 ‘음유시인’이란 단어는 이후 ‘좋은 가사’를 지닌 수많은 음악을 칭찬하는 수단으로 범람했다. 시적이다, 거리의 시인, 문학적인, 한 편의 운문 등.

이러한 표현은 물론 일차적으로는 시와 가사의 경계가 흐릿했던 과거 문학의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이는 가사의 예술적 가치를 가장 게으른 방식으로 편리하게 찬미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희미한 변명거리에 가까워 보인다. 왜냐하면 가사는 근본적으로 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사는 “정적이란 맥락을 배경으로 삼는 시와 달리 멜로디, 리듬, 악기, 가수의 목소리, 기타 레코딩과 관련된 사항 등 다양한 음악적 정보의 맥락과 함께한다.”4 피치포크(Pitchfork) 에디터 매튜 슈니퍼(Matthew Schnipper)가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해 “그것을 전달하는 소리 없이 그의 가사를 평면적으로 읽는 건 그의 예술을 축소된 채로 경험하는 것이다”라고 건 딜런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혹시라도 이 이야기를 가사가 시가 아니니까 아무리 훌륭한 가사라도 문학적 가치는 없다는 식으로 받아들이진 않길 바란다. 내가 짚고 싶은 부분은 대중음악의 가사를 굳이 문학의 권위를 빌어 ‘격상시키려는’ 게으름이다. 가사가 훌륭한 문학과 같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면 그 때 필요한 것은 그것을 느끼거나 분석하는 것이지, ‘시적인 아름다움’이나 ‘뛰어난 시에 못지않은 가치’ 같은 공허한 수식어가 아니다. 아울러 그것이 시라는 언어의 집합과는 구분되는 음악으로서 기능할 때의 가치를 밝히는 일 역시 필요할 것이다.

 

언어의 중력, 해석의 유혹

‘훌륭한 가사’에 대해 문학에 기대면서까지 그 훌륭함을 증명하려는 시도에는 글의 서두에서 설명했듯이 가사를 다른 음악적 요소보다 특권적인 위치로 끌어올리려는 의도 또한 엿보인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이는 그리 설득력 있는 논거는 아니다. 음악에는 가사 말고도 분석하거나 천착할 수 있는 요소가 한가득 넘쳐나며,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러한 작업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질문을 조금 바꿔 보자. 가사는 음악에서 가장 받아들이기 ‘쉬운’ 요소인가? 그것이 음악을 이루는 다른 재료보다 더 직관적으로 우리의 뇌를 파고드는가? 사람들이 가사에 집중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어쩌면 이 질문에 있을지도 모른다. 음정이나 박자 같이 해석을 위한 고유의 수단을 필요로 하는 멜로디나 비트 등과 달리, 가사는 해당 언어를 알고 있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다가갈 수 있고, 그렇게 다가가 해석한 바를 역시 쉽게 늘어놓을 수 있다. 유튜브에서 어떤 뮤직비디오를 찾았을 때 곡의 박자를 묘사한 댓글보다 가사에 대한 감상을 적은 댓글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언어라는 가장 쉬운 매체에 사로잡히는 것은 사실 불가항력에 가깝다. 언어로 명확히 표상할 수 없는 소리의 영역에서 가사가 발하는 빛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의 촛불처럼 명확하고 확실한 이정표처럼 보일 것이며, 거기에 이끌리는 것은 그 빛에 경계심을 가진 사람조차 무의식적으로 선택하게 되는 과정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음악 비평을 행하는 입장이라면 가사로부터 언제나 거리감을 유지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음악이 사운드의 구성이라는, 혹은 언어와 사운드 사이의 교류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음악을 단지 언어의 집합인 존재로 격하시키는 일에 다름아니다.

피해야 할 그 범실을 저지름으로써 어떤 사태가 발생하는지는 이미 수잔 손택(Susan Sontag)이 “해석자는 예술작품을 그 내용으로 환원시키고, 그 다음에 그것을 해석함으로써 길들인다. 해석은 예술을 다루기 쉽고 안락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5라고 1966년에 명확하게 밝힌 바 있다. 의미를 담고 있는(혹은 그렇게 믿어지는) 언어는 해석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고, 맹렬하게 가사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사운드가 담고 있는 힘은 어딘가로 사라진다. 현재 시점에서 이 광경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건 “~~~ 가사/뮤비 해석”이란 제목(과 높은 확률로 ‘소름돋는’이란 수식)이 붙은 유튜브 영상, 그리고 사용자 참여식 가사 주석 사이트 지니어스(Genius)일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와 <설국열차>,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까지 동원한 “봄날” 가사 해석, ‘How can I paint this picture / When the color blind is hangin’ with you?’라는 두 마디에 기나긴 스크롤에 걸쳐 설명을 늘어놓은 “Bitch, Don’t Kill My Vibe”의 주석을 보면서 느끼는 건 자신이 듣는 음악이 숨겨진 진정한 의미를 갖고 있기를, 그래서 대단하기를,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설명’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열망이다.

 

 

언어에서 소리로

그냥 이 모든 것들이 음악을 즐기는 또 다른 방식일 뿐일까? 하지만 그렇게 넘기기에는, 이 설명을 갈구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어쩐지 강박적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에는 대중음악에서 언어가 소리로 전환되는, 아주 짧은 그 순간에 약동하는 활력이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지독할 정도로 아내의 죽음 이후의 경험을 상세하게 묘사하는 “Ravens”에서 마운트 이어리(Mount Eerie)가 노랫말과 함께 내뱉는 숨소리로 어떻게 슬픔을 전달하는지, 전자적으로 왜곡된 ‘I just leave I I just leave I’라는 외침이 어떻게 레드벨벳의 “I Just”를 팝적 파열과 균열의 상징으로 만드는지, “Minnesota”에서 힘에 부친 듯 고음의 진성을 끌어올려 ‘’Cause it get cold like Minnesota’라고 흥얼대는 릴 야티(Lil Yachty)의 훅이 어째서 그렇게 불안정하면서도 매력적으로 들리는지 같은 것들은, 웹브라우저 화면에 박혀 있는 텍스트에서는 절대로 접할 수 없는 경험들이다.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는 그의 자서전에서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건 멜로디에 관한 것이다. (곡을 만들 때는) 거기에 먼저 집중하고, 곡의 구조가 그 다음이며, 그러고 나서야 가사에 착수한다… 꽤 자주 느끼는 건 내가 만드는 멜로디가 가사보다 더 낫다는 점이다. 난 가사 쓰는 걸 싫어한다”라고 말했다.6모든 뮤지션이 다 그와 같지는 않겠지만, 나처럼 가사로부터 (그리고 그 의미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하는 창작자가 적어도 한 명쯤은 있다는 건 어느 정도 위안이 되는 일이다. 소리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될 때, 언어의 자리가 줄어드는 것이 내겐 크나큰 즐거움이다.

 

* 2019년 1월 발간된 헤테로포니의 비평집 『HETEROPHONY #2』에 실린 글을 온라인으로 공개한다.


정구원 | lacelet@gmail.com
음악웹진 [weiv] 편집장. 대중음악을 듣고 그에 대해 쓰고 있으며, 대중음악의 범위와 효과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각주

  1. Why Bob Dylan Is a Literary Genius, 롤링 스톤(Rolling Stone)
  2. In a ‘radical’ choice, Bob Dylan wins the Nobel Prize in literature, 로스앤젤레스 타임즈(Los Angeles Times)
  3. 밥 딜런의 ‘늦은’ 수상, IZE
  4. The Difference Between Poetry and Song Lyrics, 보스턴 리뷰(Boston Review)
  5. 수잔 손택, 이민아 옮김, 『해석에 반대한다』 p.26, 이후, 2002
  6. Greg Brooks, Simon Lupton, 『Freddie Mercury: His Life in His Own Words』, Omnibus Press,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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