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내가 ‘음악’이라고 여겨온 범주를 되돌아보고 있다. 내가 왜 어떤 것들을 음악이라 믿어왔는지, 그 믿음은 언제부터 형성됐는지, 그 형성된 믿음 기저에는 어떤 전제가 깔려있는지 알고 싶었다. 유년기의 기억을 복기하던 중, 아동·청소년기에 접하는 국민공통교육으로서의 ‘음악 과목’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그리고 지금은 무얼 배우고 가르치는지 알고 싶어졌다. 적어도 국민공통기본교육 단계에 쓰이는 음악 교과서와 그와 연계된 교육과정이라면, 적어도 국내에서 통용되는 음악의 관념을 일부 형성하거나 재생산하는 데 일조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런 물음을 가지고 나와 같은 7차 교육과정을 거쳐온 음악학 전공자이자 현재 4년 차 중학교 음악 교사인 이현지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고, 나의 짧은 물음을 뒤엎는 이야기를 들었다. 

저는 음악학을 공부할 때도, 음악 비평을 할 때도 ‘이것이 음악이 아닐 이유가 없다’라는 식으로 범주를 확장하려는 태도를 견지해왔는데요. 그러다 보니 점점 음악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어가는 것 같아요. 그런 맥락에서 가장 먼저 질문드리고 싶은 것은, 지금 중학 교육에서 음악이 어떻게 정의되고 있는지입니다. 

저는 경기도 소재 혁신학교(중학교)에 재직하고 있는 4년 차 교사입니다. 인터뷰에 앞서 드리고 싶은 말씀은 교단에 선지 4년밖에 되지 않은 제가 감히 우리나라의 음악 교육 전체를 대표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다만 이번 대화를 통해서 제가 추구하는 음악 교육에 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전국의 수많은 음악 선생님 중에는 저와 같은 철학을 바탕으로 같은 길을 추구하는 선생님들도 계시고, 저와 교육 철학이 다른 분들도 분명히 계실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고등학교 6년 과정은 모두 교육부에서 만든 「음악과 교육과정」이라는 문서에 의거해서 이루어지고, 공교육에서 모든 수업과 평가는 이 문서를 바탕으로 계획되고 실행됩니다. 이 문서가 개정되면 교과서도 이에 따라서 바뀌고요. 그리고 바로 「음악과 교육과정」의 첫 페이지에 궁금해하시는 내용이 쓰여있어요. 

음악은 소리를 통해 인간의 감정과 사상을 표현하는 예술로 인간의 창의적 표현 욕구를 충족시키고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도록 하며 인류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다. 음악 교과는 다양한 음악 활동을 통해 음악의 아름다움을 경험하고, 음악성과 창의성을 계발하며, 음악의 역할과 가치에 대한 안목을 키움으로써 음악을 삶 속에서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교과이다.

그 정의를 수업 시간에 차근히 살펴보지는 않나요? 그 정의 바깥에 관해서 이야기할 여지는 없는지도 궁금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음악 선생님마다 다를 것 같습니다. 음악의 정의 또는 음악 교과의 성격에 대해 살펴보는 선생님도 계시겠지요. 그런데 저는 음악의 정의를 다루기보다는 음악이 학생들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요. 음악이 무엇인지, 음악 교과가 어떤 교과인지를 이야기하는 것보다 학생들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 음악을 통해 위로를 받았던 경험, 신났던 경험 등을 이야기하면서 개인의 삶 속에서 음악이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생각하게 해보는 것이 더욱 의미 있는 음악 교육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음악의 정의를 살펴보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학생들과 함께 음악이 무엇인지에 대해 철학적으로 고민해보는 시간도 분명히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음악 수업이 일주일에 한 시간 정도이기 때문에 적은 시간 안에서 조금 더 학생들을 위한 ‘살아있는’ 음악 수업을 하기 위해 우선순위를 정하다 보면 음악적 개념 그 자체를 분석적으로 사유하기보다는 학생들의 삶 속에서 음악의 의미를 찾는 데 집중하게 됩니다. 

하지만 학교마다 학생들의 상황, 그리고 음악 수업의 시수가 다르기 때문에 여건에 따라서 음악의 정의에 관해 살펴보거나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고 있는 새로운 음악을 소개하거나, 이를 통해 음악의 개념에 대해 사유하는 수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선생님도 계실 거예요. 

실제 교육은 이 ‘교육과정’ 문서에 의거해 제작된 교과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나요? 

교과서는 음악 교육의 중요한 자원 중 하나지만, 음악 과목은 교과서를 그대로 사용하기보다는 학교가 위치한 지역 특성이나 학생 상황에 맞추어 교사가 교육과정을 재구성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생각해요. 저 역시 항상 지금 학생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맞는 음악 수업을 디자인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 음악은 국어, 영어, 수학처럼 전국의 모든 학생이 같은 시기에 똑같이 배워야 하는 하나의 내용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롭게 교육과정 재구성을 하는 편인 것 같아요. 바꾸어 말하면,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학생들에게 알맞은 교육과정을 디자인하는 교사의 역량과 교육 철학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겠죠. 음악 수업을 맡은 교사가 무엇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두느냐에 따라서 수업의 내용과 방법이 결정되니까요. 

음악 교사들이 교육과정을 재구성할 때,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앞서 말씀드린 「음악과 교육과정」입니다. 교사의 철학, 역량, 학생들의 상황과 수준, 학교의 환경에 따라 가르치는 내용과 방법, 도구는 달라지겠지만 음악 교육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동일해요. 현재 교육 현장에서 통용되고 있는 「2015 음악과 교육과정」은 한 마디로 ‘역량 중심 교육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교육을 통해서 학생들의 단편적인 지식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서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삶을 꾸려가는데 필요한 역량을 기르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죠. 「음악과 교육과정」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음악 교과는 다양한 특성을 통해 음악적 감성 역량, 음악적 창의융합 사고 역량, 음악적 소통 역량, 문화적 공동체 역량, 음악정보처리 역량, 자기관리 역량을 기를 수 있도록 한다. 

음악 교사들은 위와 같은 역량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 많은 상황을 고려하며 수업을 디자인해요. 이 과정에서 필요한 부분이 교과서에 있으면 교과서를 사용하고, 교과서에 없지만 필요한 자료가 있다면 교사가 직접 제작하고요. 제 경우에는 우리 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와 다른 교과서를 훑어보면서 제가 재구성한 수업에 필요한 자료가 있는지 살펴보고, 다양한 자료들을 수집, 검증한 후 필요한 활동지를 제작하여 주로 이 활동지를 중심으로 수업을 하는 편입니다. 

이런 역량들을 길러주기 위해 실제로 음악 수업은 어떻게 구성하세요? 저는 7차 교육과정 세대인데, 교육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기억하기로는 이론 수업이 실기보다 조금 더 많았던 것 같아요. 노래도 배우고 단소, 리코더, 소고, 캐스터네츠 등의 악기도 배웠지만 이론을 배우면서 음정 계산하는 방법까지 배웠던 기억이 나요. 

맞아요. 저도 7차 교육과정 세대인데, 저희 때는 음악적 지식을 배우는 시간이 꽤 많았죠. 장-단-증-감음정도 배웠고, 감상 수업도 지식 위주였고요. 하지만 제가 느끼기에 요즘의 음악 수업은 ‘활동 중심 수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식도 배우긴 하지만 그걸 단순히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뭔가를 경험하고, 그 경험으로부터 스스로 무언가를 찾아갈 수 있도록 해요. 노래도 하고, 가야금도 연주하고, 창작도 해봅니다.

창작 수업의 예를 한번 들어볼까요. 이제는 단순히 빈 악보를 주고 기초적인 화성학 지식을 알려준 뒤 작곡해보는 과제를 주지는 않습니다. 대신 제가 비트를 찍고 코드를 녹음해서 학생들에게 반주를 제공하고, 스마트폰의 앱이나 전자 키보드 등 실제 소리를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합니다. 학생들은 제가 제공한 재료와 도구를 자유롭게 탐색한 후 그중에서 필요한 것을 활용해서 멜로디를 흥얼거립니다. 자신들이 흥얼거린 멜로디가 마음에 들면 스마트폰으로 녹음해서 기록하죠. 그럼 제가 가서 아이들이 기록한 멜로디에 반주를 붙여줍니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오늘날의 대중음악 작곡가처럼 곡을 쓰는 경험을 해봅니다. 제가 이런 식으로 창작 수업을 하는 이유는 수업을 통해 아이들이 작곡가라는 직업에 대해 흥미를 갖기를 바라기 때문이고, 또 더 나아가 음악적 감성 역량과 음악적 창의융합 사고 역량, 음악적 소통 역량, 음악정보처리 역량을 기를 수 있길 바라기 때문이죠. 결국 중학생 시절의 학교 음악교육이 학교 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삶과 깊숙이 연결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아이들이 직접 경험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수업을 디자인하기 위해 노력하는 거예요. 

또 감상 수업을 하더라도 체험적 감상 활동을 구성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음악을 함께 듣고 지식을 전달하는 데 초점을 두기보다는 학생들이 직접 음악을 느끼고 경험함으로써 음악적 지식을 체화하도록 하는 데 초점을 둡니다. 예를 들어 베토벤의 음악을 감상할 때 베토벤의 일생이나 시대적 배경, 형식이나 구조에 대한 지식을 말로 전달하기보다는 아이들이 베토벤에 관한 책을 읽고, 베토벤의 음악을 듣고, 그것으로 작은 뮤지컬을 만들어보는 방식으로 베토벤을 ‘감각적으로 느낀 후 지식을 습득하도록’ 수업을 디자인하는 것이 바람직하죠. 그런데 이걸 실제로 다 하려면 한 학기를 다 써야 하겠죠? 수업 시수가 아주 부족하다는 딜레마가 있지만… 어쨌든 지금의 음악교육은 몸을 완전히 거치는 방식을 지향합니다. 

음악적 지식의 전달보다는 경험 설계가 훨씬 더 중요하겠군요. 당연하겠지만 제 경험과는 아주 다르네요.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오랫동안 지식의 영역에서 ‘음악이 무엇이냐’를 질문을 던져온 데는 어쩌면 일찍부터 이론 체계를 배운 것도 조금이나마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어요.

저도 이론과에서 석사 과정까지 마친 후 교사가 되어서인지 임용 초기에는 음악 내적인 것에 아주 집중했어요. 전통음악의 체계와 사례들도 굉장히 많이 가르치고, 악보 보는 법도 가르치고 뭐든 많이 알려주려고 했었다면 요즘은 음악 그 자체보다 음악과 학생들의 삶에 더욱더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학생들의 삶의 밸런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학교에서 학생들은 정말 많은 교과를 동시에 배우고 있으니까요. 또 이 아이들의 미래는 정말 저희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갈 거잖아요. 오늘날 교육이 자유학기 등의 정책을 통해 학업 스트레스를 낮추기 위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아이들의 학업 스트레스가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또 요즘의 학생들이 받는 미래에 대한 스트레스는 지금 이 변화를 겪는 다른 성인들과 별 다를 바 없고요. 

처음에 저는 음악을 ‘잘 가르치고’ 싶었어요. 그런데 학생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쌓여가고 아이들을 이해하게 되니 이제는 ‘음악을 즐겁게 가르치고’ 싶어요. 어느 순간 적어도 음악 시간만큼은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게 되더라고요. 마냥 노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놀면서 아이들의 음악적 능력과 감성, 역량을 길러주는 ‘유익하면서도 즐거운’ 음악 수업. 물론 너무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학교 교육에서 음악 수업에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적고요. 그러다 보니 우선순위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임용 초기에 아이들에게 난타를 통해서 악보(리듬) 읽는 법을 가르치는 수업을 한 적이 있었는데요. 스스로 난타라는 즐거운 활동을 통해 기보법이라는 지식을 익히도록 잘 설계했다는 생각이 들었었어요. 그런데 한 학기 동안 아이들이 너무나 어려워했고, 아이들이 열심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아이들이 정말 재미없게 난타를 하는 것을 보았어요. 난타 같지 않은 난타였죠. 그때 ‘악보 읽는 법을 가르치는 게 중요했을까? 그보다는 즐겁게 난타를 하는 시간을 제공하여 우리나라 음악의 전통과 현대적 감성이 융합된 난타의 문화적 가치를 알게 수업을 하는 것이 ‘음악적 감성 역량’과 ‘문화적 공동체 역량’을 기를 수 있는 더 적절한 디자인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수업 시간이 학생들에게 음악 지식을 배운 시간이 아니라 이후 삶의 밑거름이 되는 음악활동을 경험한 시간으로 기억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것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제가 음악미학 전공으로 석사과정까지 마친 이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점차 ‘음악이 무엇이냐’에 대한 사유보다는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음악과 함께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도울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게 됐죠. 

저희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학습해온 음악에 대한 개념이랄 것이 있잖아요. 지금 중학생들이 인지하는 음악은 저희와는 많이 다르겠죠? 

그럴 수 있죠. 우리에게 음악이 ‘감상’하고 ‘연주’하는 개념이었다면, 지금 학생들에게 음악은 그런 게 아닐 수도 있어요. 그래서 많은 음악 선생님이 그러실 텐데, 저는 음악이 이들의 삶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지를 고민해요. 경력이 쌓일수록 음악의 개념이나 음악적 지식이나 기능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그런 게 모자라더라도 앞으로 살아가는 데 음악이 이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게 되고요. 또 나중에 진로를 선택할 때 음악시간에 했던 경험이 자신의 적성을 찾는 데 계기가 된다면 정말 좋겠죠. 음악 시간에 음악을 같이 만들더라도 그 결과물의 퀄리티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과정과 경험을 통해서 ‘내가 이런 데 재능이 있네, 내가 이런 걸 즐거워하는구나’ 이런 걸 알아가기를 기대하는 거예요. 

음악미학을 전공할 때는 오래전 서양음악학계에서 일어났던 성악과 기악의 논쟁을 공부하거나 소위 예술음악과 대중음악을 구분 짓고 또 해체하는 작업을 하면서 음악을 사유했고, 그런 사유의 결과가 다시 음악계로 환유되어 음악의 개념이 확장되고 변화하는 순환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음악학도로서의 저는 여전히 사유의 대상으로서의 음악에 관해 생각합니다. 그런데 음악 교사로서의 저는 아이들에게 굳이 음악의 개념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그보다 저는 미래의 청중이 될 오늘날의 아이들과 함께 음악이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깊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래도 음악을 사유할 수 있는 방법을 조금이나마 배워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런 질문 자체가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것일 수도 있겠지만요. 

물론 그런 부분도 중요하죠. 시간이 많으면 수업에서 모두 다루겠지만 현실적으로 주어진 시간이 매우 적으니까요. 또 지금은 모든 교과에서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보다 아이들이 세상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고 표현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예를 들어 저희는 국어 시간에 시를 ‘해석’하는 걸 공부했었잖아요. 저자의 의도는 무엇인지, 이 시어의 상징이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우리의 문학교육이 ‘읽는 수업’이었다면 지금은 ‘쓰는 수업’에 가까워요. 제가 지금 있는 학교가 자연과 가까운 학교여서 더 그렇긴 한데, 바깥으로 자주 나가요. 풀을 만져보고, 색을 관찰하고, 냄새는 어떤지, 이런 걸 계속 감상하는 거예요. 그렇게 많이 느낄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줘서인지 학생들이 경험을 좋아하기도 하고, 또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쓴 에세이를 보면 정말 표현이 주옥같아요. 그래서 최선을 먼저 선택하자면 지식, 개념, 역사보다는 학생이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그 무언가, 음악을 향유하는 태도, 음악을 통해 세상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 같은 일종의 ‘가치’를 가르치고 싶죠.

그런 최선의 가치를 가르치기 위해 실제 수업에서 어떤 내용이 다루어지나요? 사례를 하나 들어주세요. 또 그런 수업 내용의 선택 기준도 궁금합니다. 

그건 정말 학생들에 따라 달라지는 거라 그때그때 맞춰가요. 최대한 여러 음악을 경험할 수 있게 해요. 저는 첫 중학교에 발령받아 갔을 때 아이들이 초등학교에서 한국전통음악을 너무 잘 배우고 와서, 다들 꽹과리와 장구를 정말 잘 치고 그 장단이 몸에 아주 착 붙어있었어요. 그런 경우 서양전통음악도 경험할 수 있도록 수업을 디자인합니다. 반대로 지금 학교는 피아노 학원에 오래 다닌 친구들이 많아서 서양전통음악을 애호하는 태도가 갖추어져 있기도 하고, 지역 특성상 전통문화가 살아있는 고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금 학교에서는 가야금을 학급의 학생 수만큼 구비해두고 학교 정규교육과정 내에서 음악 교사와 외부 강사의 협력 수업(Co-teaching)을 통해 가야금 연주 수업을 진행하고 있어요. 

그런데 사실 음악의 종류가 너무 다양하잖아요. 「음악과 교육과정」 안에 세계의 음악이 다 들어있는데, 가르칠 시간이 그만큼 안되니까 교사가 지금 학교의 학생들한테 제일 부족한 음악 경험을 위주로 재구성해주는 거예요. 또 지역에 따라 고려할만한 특수한 상황도 있습니다. 다문화 가정이 많은 지역에서는 세계의 민요를 수업에서 다룰 필요성이 더욱 와닿을 거예요. 그걸 통해서 ‘이 나라의 음악은 이런 특징이 있고 이런 구조로 되어 있다’라는 음악적 지식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특별히 그 경험을 통해 ‘문화적 편견’을 없애거나 적어도 편견이 희미해지기를 바라죠. 제가 생각했을 때, 요즘 음악교육은 음악 그 자체 또는 음악의 내적 가치에서 나아가 음악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 음악을 향유하는 사람 같이 음악 밖에 있는 더욱 큰 무언가에 목표를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음악교육의 목표가 음악 바깥에 있다면, 음악을 통해서 다른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이죠. 음악은 그 배움을 얻기 위한 도구고요. 그럼 그 모든 것의 최종 목적지엔 무엇이 있나요? 

이게 제가 고민했던 지점이에요. 저는 대학원에서 미학을 공부했고, 제가 가장 동의하지 않았던 것은 단3도는 슬픔을 나타낸다는 식의 논의였어요. 그런 논의를 확장하다 보면 공동체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어떤 음악을 사용하면 좋다, 뭐 이런 이야기까지 이어지죠. 당시엔 정말 그런 논의에 동조하고 싶지 않았어요. 다른 목적을 위해 음악을 수단화한다니(웃음). 

그런데 현장에 와보니까 음악교육의 목표가 음악의 표현성이나 추상성을 깨닫게 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음악을 경험함으로 인해서 사람을 이해하고, 우리가 소통하고, 협동할 수 있게 하는 거더라고요. 예컨대 체육대회에서 같이 응원가를 부르면서 협동심이 고취되는 거죠. 저는 ‘음악학 석사’라는 이력을(웃음) 지닌 ‘음악’을 가르치는 교사이지만, 교육적 입장에서 우위를 따져야 한다면 음악의 예술성을 가르치는 것보다 협동심을 가르쳐주는 게 낫다고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단이 무엇이 되든, 이 시간을 통해서 학생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길 바라고, 협동하고, 창의성을 기르길 바라고, 삶 속에서 음악을 향유하고 즐길 수 있기를 바라는 거죠. 

정말로 그런 목표가 달성되나요? 예컨대 ‘문화적 편견’을 없애는 것이 음악 교육으로 가능한가, 이런 궁금증도 생겨요. 저의 경험을 복기해보면, 음악 수업에서 최대한 그런 편견 없이 음악을 고루 배웠다기보다는 서양전통음악 중심으로 배웠던 것 같아요. 무엇을 더 많이 배우고 덜 배우느냐, 이런 교육의 무게중심이 느껴지니까 그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내재된 위계가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아직 다문화 교육이 강조되는 학교에 안 가봐서 모르겠는데, 그런 학교에 계신 분들은 정말로 고민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저희가 배웠던 시기에는 확실히 서양전통음악과 한국전통음악의 위계가 있었지만, 제가 봤을 때는 지금 학생들에게서는 그런 게 잘 보이지 않아요. 오히려 역전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더 넓게 봤을 때 한국전통음악과 서양전통음악은 비교적 둘 다 익숙해요. 덜 익숙한 건 그 바깥의 음악들이죠. 

우리도 물론 학생 시절에 ‘라쿠카라차’ 같은 노래를 배웠죠. 안 배웠던 것은 아니에요. 근데 그 배움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른 채 그 노래를 그냥 부른 거죠. 그래서 요즘은 그 음악을 통해서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생각하며 여러 부수적인 활동을 섞어요. 제가 직접 해본 것이 아니라 정확히 말할 순 없지만 세계의 음악을 가르치기 위한 교사들의 노력이 또 엄청나요. 문화적 편견을 심어주지 않으면서,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는 마음을 가르치는 것… 근데 그게 너무 어렵잖아요. 섣불리 할 수도 없고요. 그래서 음악 선생님들이 고군분투하시죠. 

이전에 선생님의 논문(「20세기 중반 이후 서양 작곡가들의 동양 문화 수용에 대한 해석 담론 연구 : 상호문화적 관점을 중심으로」)에 인용된 글 중, 어떤 학자가 여러 문화권의 음악을 자기 음악 안에서 혼종적으로 사용하는 작곡가에 대해 ‘컬쳐 브로커’(culture broker)라고 표현한 것을 봤는데, 어쩌면 그런 학교에 있는 선생님들도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을까요? 

그럴 수 있겠죠. 논문 쓸 때는 그 말이 참 쉬웠어요. 이치에 맞는 말만 하면 됐는데 현장은 너무 복잡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지금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하고 있는 거잖아요. 보고 있으면, 정말 작은 걸 서로 이해를 못 해서 싸워요. 그러니 어떻게 보면 고작 음악 수업을 통해 문화가 달라서 서로 이해 못 하는 태도를 변화시키고 ‘다름’에 향한 마음을 열어준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죠. 저의 목표는, 이 수업에서 학생들이 싸우지 않고 큰 민원 없이 넘어간다면 성공한 거예요(웃음). 이런 와중에 제 의도를 살리는 수업 설계를 한다는 것은 정말 너무 복잡한 거죠. 그 적은 시수 안에서요. 

계속되는 딜레마네요.

엄청 딜레마에요. 우선순위를 정하고 또 정해야 하니까 뒤로 밀릴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어요. 중학교에서는 그렇죠. 한편 고등학교는 또 달라요. 거기엔 ‘음악 연주’와 ‘음악 감상과 비평’이라는 세부 과목이 또 있어요. 고등학교는 아무래도 직업 선택과 직결되는데, 예슬 선생님처럼 ‘비평가’라는 직업이 있잖아요. 기자도 있고요. 그런 수업에서는 음악에 대한 자기 생각을 글로 써보는 경험을 해본다고 해요. 예컨대 ‘캐논 변주곡’에 대해 배우더라도 그에 대한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음악이 어떤 측면에서 가치가 있기에 400년 동안 보존되어 내려오는가, 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라고도 하는 거죠. 그래서 그 의견을 끌어내는 방법이 중요해요. 음악교과는 질문 대신 발문을 많이 해요. 정답이 있는 게 질문이고, 정답이 없는 건 발문이에요. 힌트를 너무 많이 만들어두면 학생들이 정답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거기에 갇히는데, 또 너무 추상적인 발문을 주면 길을 찾기가 어렵죠. 그래서 정답이 아닌, 자신의 의견을 찾을 수 있게 힌트를 주는 것. 그게 어려운 지점이에요. 

음악을 향유하는 방식은 물론, 음악을 배우고 체화하는 방법은 앞으로 더 빠르게 변하겠지요? 

저랑 같이 근무하시는 다른 선생님은 저보다 윗세대고 성악 전공이셨는데, 당시엔 삶 속에서 음악을 접할 기회가 적었다고 해요. 라디오를 듣는 정도였고, 직접 음악을 해볼 수 있는 시간이 학교 음악시간 밖에 없어서 수업에서 가곡을 불렀던 경험이 굉장히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고 하시더라고요. 반면 저희 세대는 악기를 아예 전공한 음악 교사가 많죠. 우리가 서양전통음악의 황금기라고 하잖아요. 피아노를 배운 사람도 많았고요. 그래서 제 또래들을 보면 기악적인 어법이 강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한편 지금 학생들은 K팝을 아주 많이 듣고 자란 세대라서 그런지 음악을 만들어보라고 하면 제가 깜짝 놀랄 만큼 멜로디가 너무 매끄럽게 잘 나와요. 저는 음악교과에서 얻을 수 있는 역량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게 창의적 사고라고 생각했고, 작곡이라는 건 직업이 될 수 있고 또 재능있는 학생이 있을 수 있으니까 잘하든 못하든 시켜봤어요. 만든 것을 보니까, 지금 학생들의 도구는 노래인 것 같더라고요. 또 이제 더 이상 종이를 거쳐서 음악을 만드는 세대가 아니라, 이제는 컴퓨터에 신시사이저 연결해서 건반 누르면 되니까 딱히 이론을 가르쳐야 할 이유도 없어요. 악보를 가르치거나 화성학을 가르칠 이유가 없어진 거예요. 그런데 저는 아직도 화성학을 배웁니다. 아이들에게 실음 중심의 경험을 만들어주기 위해 저는 대중음악에서 쓰는 화성 어법까지도 배우려고 노력하는 중이죠. 

그런데 평균율로 조율된 열두 반음에 기반한 음악들이 아니라, 애초에 음의 개념부터 시스템이 다른 음악은 어떻게 하시나요? 경험하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될까요? 

그렇죠. 음악을 더 이상 지식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한국전통음악과 서양전통음악에 기반한 어법을 넘나드는 게 너무 자연스러워요. 이번에 초빙한 가야금 선생님께서 수업하는 걸 지켜보니, 학생들에게 그런 시스템은 중요하지 않더라고요. 가야금을 연주할 때도 워낙 오선보를 많이 쓰긴 하지만 학생들이 악보를 완벽히 읽는 게 아니라 위치를 기억하고, 귀로 듣고 현을 뜯어요. 가야금 줄 아래에 붙여놓은 숫자를 보고 외우거나 첫 음만 잡아놓고 음의 간격을 기억해서 하는 거죠. 또 중학교에서는 아무래도 타악 아니면 가창 위주로 배우는데, 아이들이 장단을 듣고 기억해서 사물놀이를 연주하는 것이 정말 자연스럽습니다. 자연스럽게 사물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K팝도 부르고 랩도 하고 작곡도 하고 그러더라고요. 제가 경험한 아이들은 그랬어요. 

말씀을 듣고 보니 어쩌면 공통교육과정에서 더 만들어줘야 하는 것은 몸의 감각, 몸의 기억일지도 모르겠어요. 나중에 혹시라도 그런 경험을 이론의 차원에서 다뤄본다 해도, 결국 그 경험이 필요하니까요. 

물론 저도 이론을 공부했던 사람인지라 이론을 가르칠 때 가장 편해요. 미학적인 토론을 하는 것도 좋고요. 물론 어떤 선배 선생님들은 그런 걸 수업에서 다루시기도 한대요. 사고력 확장을 위해 도움이 되기도 하고, 또 이론을 많이 다루면 지필고사에서도 변별력을 더 가질 수 있어서 그런 걸 다루지 않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고 하고요. 

이 학생들이 사회에 나갈 때쯤에 뭐가 더 중요할까요? 세상을 행복하게 사는 역량이 중요할지, 똑똑한 게 중요할지 정말 모르겠어요. 제가 생각할 때, 제가 만났던 학생들의 기초학력은 예전 세대보다 부족한 것 같긴 한데, 반면 학생들에게 행복하냐고 물어보면 행복하다고 하더라고요. 정말로 그렇다면 그런 의미에서 교육은 성공하고 있는 것 같아요. 학교 교육의 목표가 행복으로 바뀐 지 오래됐으니까요. 어쨌든 학생들이 행복한 삶을 사는 교육은 차츰 실현되어 가는 것 같아요. 

또 요즘 중요한 주제가 융합이에요. 그래서 학교 교육이 어떤 식으로도 이루어지냐면, 수학과 과학 시간에 조율의 원리를 배우고 미술에서 칼림바 디자인을 하고, 기술 시간에 그걸 목공으로 만들고, 음악 시간에 실제로 조율을 하고 음악을 연주해요. 또 자유학기 주제선택 시간에 마을에서 많이 자라는 특산물을 직접 키워보고, 음악 시간에 그걸 수확할 때 부를 노동요를 만들고, 가정 시간에 수확물로 음식을 만들고, 그걸 마을 축제에 가서 팔아보고, 축제에서 퍼레이드도 하고 대취타를 해요. 이렇게 한다고 해서 똑똑해지는 건 아니겠지만(웃음), 어쨌든 재미가 있겠죠. 또 서로 유대감이 생기고 삶을 살아가는 활용적인 지식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이런 경험을 통해 우리 전통에 관한 이해도가 높아질 수도 있고요.

부러워요. 저도 마을에서 대취타 불어보고 싶습니다. 음악과 관계 맺는 다양한 방법을 일찍부터 경험했더라면 지식과 경험 사이에서 느끼는 이질감을 좀 더 빨리 해소할 수 있었을 텐데요. 이론과 현장의 머나먼 거리를 제 안에서나마 좁혀나가고, 몇몇 음악만을 중심화하는 아카데미의 기조에서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았거든요.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실천방안을 모색하는 일이 더는 대학만의 작업이 또 아닌 거예요. 서서히 형성된 그런 기조가 임용고사를 준비하는 예비 교사들에게 반영되고, 그렇게 선생님이 된 사람들이 또 현장에 가고요.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음악 개념의 확장, 음악적 개념의 전복 같은 이런 이슈들이 더이상 학계만의 새로운 논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식을 가지고 가르쳐야 한다고 교육받은 교사들이 이미 현장에서 중, 고등학생들에게 가장 알맞은 방법으로 실천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반대로 제 일생의 목표 중 하나는, 학생들이 나중에 커서 장르가 무엇이든 자기 돈으로 티켓을 사서 공연을 보러 갈 수 있는 감수성을 길러주는 거예요. 그러니 더더욱 음악적 지식을 예전처럼 가르칠 수 없어요. 경험이 무엇보다도 중시되는 교과니까요. 물론 학구열이 높은 지역에서는 아직도 시험을 보긴 하지만, 음악은 정말 지필고사에서 탈피했어요. 

지금 중학생들의 음악적 모국어는 무엇인가요?

단연 대중음악, 케이팝입니다. 제가 지금 만나고 있는 학생들을 보면 중학교 1, 2학년 학생들은 BTS를 정말 사랑해요. 그런데 또 3학년 학생들을 보면 아이유를 좋아하는 학생들, 그리고 김광석과 같은 이전 세대의 가수의 음악을 사랑하는 학생들이 많아요. 저희 부모님들 세대의 가수는 아마도 아이유의 리메이크를 거쳐서 알게 된 것 같아요. 아이들에게 내 인생의 음악에 관해 이야기해보라고 했더니, 99%의 아이들이 케이팝에 관한 에세이를 써왔어요. 아이유의 “셀러브리티”를 듣고 내 인생에도 빛나는 순간이 있기를 바라고, 선미 노래를 들으며 대범함을 배웠더라고요. 그 어린 나이에 음악을 들으며 자신의 인생을 생각하는 거죠. 아이들의 글을 읽으면서 많이 놀랐습니다. 저에게 음악은 ‘사유의 대상’ 또는 ‘잘 해야 하는 무언가’였는데 아이들에게 음악은 위로더라고요. 에세이에서 대부분의 아이들이 음악은 자신에게 위로가 되기 때문에 가치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런 걸 보면서 제 생각이 많이 바뀌고 있어요. 저는 성과를 중요시했고, 지식을 많이 습득하는 삶을 살았었으니까요. 

다시 돌아와서, 교과서의 역할은 아무래도 그리 크지 않겠네요. 

지필고사 시험을 본다면 답의 근거가 교과서기 때문에 중요해요. 그런데 제 주위에는 쓰시는 분이 많지 않아요. 지금은 적어도 저와 제 주위의 선생님들은 교과서의 단원을 그대로 따르면서 단편적으로 가창이나 기악 활동을 하기보다는 장기적인 호흡을 가진 프로젝트 단위로 수업을 재구성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교과 간 융합 수업이 프로젝트 단위로 수업을 재구성하는 좋은 예입니다. 물론 교과 간 융합이 아니라 음악 수업 안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프로젝트를 구성할 수 있고요.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2019년에 여러 교과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마을 홍보송 만들기’ 프로젝트 수업을 진행한 적이 있어요. 거의 1년에 걸쳐 6개 교과가 함께 한 교과 융합 프로젝트였죠. 도덕 시간엔 마을의 역사와 특징을 조사하고, 한문 시간엔 마을의 특징을 드러내는 한자어를 만들고, 국어 시간엔 마을시를 창작하고, 음악에서는 마을 홍보송을 만들고, 체육에서는 그 음악에 어울리는 무용을 창작하고, 영어 시간엔 영문으로 마을 음악회 홍보 포스터를 제작하고, 자유학기 동아리 시간에 마침내 마을 음악회를 개최하는 거였어요. 두 개의 줄기라고 한다면 국어 시간의 ‘마을시’와 음악 시간의 ‘마을 홍보송’ 창작 활동이겠죠. 

마을 홍보송 만들기에는 사실 다양한 음악 활동이 포함되어 있었어요. 시를 노래하는 가곡 감상, 시에 곡을 붙이는 방법 분석, 직접 멜로디를 만들어보는 작곡, 거기에 반주를 붙이는 편곡, 완성된 음악의 연주, 그 연주를 레코딩하는 활동까지요. 특별히 이 해에 아이들이 완성한 음악이 놀라워서 무려 49편의 뮤직비디오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아이들이 지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작곡하는 능력을 익힐 수 있는 1년 프로젝트를 수립할 필요가 있었어요. 

그래서 1학기 때는 의성어나 의태어를 통해 간단한 리듬을 창작하는 실습을 하고 다양한 악기를 가지고 함께 합주해보는 활동을 했습니다. 아이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작곡하고 연주하는 경험을 어느 정도 쌓아 두는 것이죠. 1학기 말에 마을시가 완성되어서 2학기 때는 본격적으로 시를 음악으로 바꾸는 작업, 비교적 장기적인 호흡의 작곡 수업을 실행했어요. 이때 1학기 때 말리듬 창작 경험을 활용하여 시적 언어를 음악적 언어로 바꾸고 미리 구비해놓은 악기, 장비들을 활용하여 멜로디를 쓰도록 했습니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한 시간 안에 해낼 수 있는 작은 과제들을 하다 보면 어느새 노래가 완성되는 것이죠. 

교사의 역량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감이 잘 안 왔는데 말씀하신 일들이 제게는 기획자의 일처럼 보여요. 

맞아요. 기획을 잘해야 해요. 학생들이 경험을 통해 스스로 수업의 목표, 핵심에 도달하도록 중요한 내용을 선별하여 실현 가능한 과제들을 디자인해줄 수 있는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차라리 지식 전달 위주의 과목이었다면 고민이 덜할 텐데, 이런 생각도 해요(웃음). 그래서 더더욱 음악 교과는 교사의 신념과 철학이 중요해요. 저도 참 고민이 많습니다. 스스로 배워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하니까 그 힘을 원동력 삼아 다양하게 기획해보려고 하는데, 체력이 아주 좋은 편은 아니라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저희는 ‘교사가 교과서’라는 말도 해요.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말도 있고요. 교사가 하나의 교육과정이 되는 걸 지향하는데, 여전히 현실적으로 시험이 필요한 지역에서는 교과서 중심의 수업이 이루어지기도 하죠. 그러지 말자는 쪽으로 많이 의견이 모이지만요. 

고등학교에서는 더더욱 교사의 역량이 중요해지는 것 같아요. 고등학교에서는 예술 교과인 음악과 미술 중 학생들이 한 과목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선택을 받아야 해요(웃음). 그리고 입시라는 현실 속에서 음악 수업의 중요성이 낮아질 수도 있고요. 그런 환경 속에서 음악 교사들은 학생들이 잠시나마 학업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즐겁게 음악을 하되 유익하고,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아이들의 미래 직업으로 이어지거나 문화적 감수성 및 가치관 등을 심어줄 수 있는 수업을 디자인해야 하니까요. 

음악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 하여간 교사가 음악의 즐거움과 기쁨이 무엇인지 잊지 않고, 애정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겠죠? 

행복이라는 걸 경험하는 아이들을 보면, 저도 음악을 저렇게 했다면 더 좋았겠다고 느껴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동양과 서양, 문화혼종성의 딜레마, 이런 걸 따졌었는데 이제는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 아이들이 행복해야지. 이런 생각을 해요(웃음). 그 시간이 헛되었다고 느끼진 않아요. 그래도 더 중요한 건 행복이라는 생각은 들어요. 

물론 그런 논문을 썼던 경험을 바탕으로 다문화적인 교육을 시도해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제가 직접 해볼 엄두가 안 나요. 제가 그 본질적인 딜레마를 알기 때문에 더 건드릴 수가 없어요. 제 논문에 따르면 그런 동서양 음악문화의 위계를 고민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뒤섞이는 ‘사이공간’에서 어떠한 무언가가 창출되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상호문화교육이니까요(웃음). 문화가 동등한 위계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사이공간’에 주목해야 한다. 문화의 시간성과 정격성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말은 쉬워요. 당위적이고요. 

선생님의 논문은 결국 어느 시점부터 윤리와 당위에 대한 문제를 다루잖아요. 그건 믿음이 필요한 영역이라고 생각했어요. ‘사이공간’에서 벌어진 일들에서 어떤 고질적인 태도가 발견됐고, 그런 걸 재조정하기 위한 그간의 해석 담론을 차곡차곡 점검해나가는 과정이 저에게는 많은 공부가 됐었어요. 실제로 현장에서 어떻게 실천할 것이냐는 문제는 또 완전히 다른 문제겠지만요. 

그게 제가 잘하는 것이면서도 또 한편으론 쉽게 했던 거예요. 추상적 사고가 현장에서 발로 뛰는 것보다 더 쉬웠어요. 현장에서는 아이들이 복잡하게 받아들이면 안 되고, 단순하게 해야 해요. 그래야 몸에 익으니까요. 단순함 끝에 깨달음을 얻게 설계해야 하니까 교사 혼자 복잡해야 해요. 물론 제가 공부한 건 다문화가 아니라 상호문화니까 그걸 바탕으로 교육한다면 여러 문화가 엮인 상태를 체험시켜 줘야겠죠. 어떻게? 모르겠어요. 그래서 못 하겠어요. 차라리 이론 정립은 너무 쉽지만, 현장에서 그걸 반영하는 건 너무 어려워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은퇴하기 전에 알 수 있을까요?(웃음) 

이미 학생들도 어떤 음악이 만들어지고 있는지 모두 다 접하고 경험하고 있을 텐데, 특정 사례에 대해 질문하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요? 예를 들어 이날치의 음악에 대해서 묻는다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할까요?

그런 게 바로 ‘사이공간’에서 나올 수 있는 음악이겠죠? 저도 모르겠어요. 가야금 연주를 통해 한국전통음악을 배우니 야심차게 최근 사례를 다뤄보자는 마음으로 창작판소리, 창작국악에 대해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했는데 어떻게 할지 모르겠는 거예요. 그래서 ‘어설프게 할거면 차라리 하지말자’라고 결심하고 계획에서 뺐어요(웃음). 단순히 소개하는 건 가르치는 게 아니잖아요. 고민이 한참 필요한 문제인 것 같아서 일단은 접었어요. 

대신 수행평가가 끝난 이후에 학생들이 원하는 걸 해보자고 주도권을 학생들에게 넘겨봤더니, 제비뽑기를 준비해오더라고요. 걸린 사람이 나와서 뭐라도 하는 건데, 누구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하고, 누구는 쭈뼛대다가 피아노로 선율을 짧게 치는데 학생들이 정말 크게 환호해주면서 서로를 격려해주더라고요.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보니 교육을 안 하는 것도 때로 교육이구나 싶었어요. 

음악의 영역이 계속 바뀌는 건 맞아요. 물론 저도 현대음악 공부를 했고, 서양현대음악의 구체음악이나 우연성음악, 음악을 새롭게 인지하게 만드는 그런 장르들도 교육현장에서 다 해요.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있고요. 한 번쯤 경험해보면 좋은 음악으로 실습해볼 순 있지만 이게 이들의 인생에 남는 음악이 될까를 고민해보면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런 고민을 하면서 제 안에서 우선순위가 정해지는 거예요. 자유롭게 음악 안에서 놀 시간을 주는 게 중요하고, 다른 과목과 연계해서 경험을 확장해보는 게 중요하고요. 

교사에 따라, 학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모든 음악 교과에서 이건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여기는 부분이 있을까요?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이지 않을까요? 모든 교사가 여기에는 동의하지 않을까 싶어요. 학생들의 인생에서 음악이 하나의 원동력이 될 수 있기를 바라죠. 꼭 이 부분을 가르치자는 합의가 아니라 음악교육을 통해 인간을 기르자는 합의가 있으니까요. 음악이 학생들의 삶 속에서 의미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왜 음악 수업 시간에 이걸 해요?’는 질문을 했을 때 ‘그냥 하자면 하는 거야’라고 아이들의 질문을 무시할 게 아니라 교사가 정말 대답을 잘해야 해요. 더 근본적으로는 그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게 즐거운 음악 활동을 만들어야죠. 그 활동 끝에 아이들이 ‘아, 이래서 음악을 하는구나’라고 스스로 생각하도록 수업을 디자인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현지 | 음악 교사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이론)와 사회과학대학 연합전공 정보문화학을 졸업한 후, 동대학원에서 “20세기 중반 이후 서양 작곡가들의 동양 문화 수용에 대한 해석 담론 연구”로 음악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경기도 공립 중학교의 음악 교사로 재직 중이다. 음악 교사로서 행복한 삶을 위한 음악 교육의 방향과 음악 교육 정책 및 교육평가 사이의 딜레마에 관해 고민하고 있고, 음악학도로서 오늘날의 사회문화적 현상과 음악의 관계, 특히 음악적 글로벌리즘과 글로컬리즘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교향시 고구려에 나타난 문화적 기억의 형상과 글로벌 시대의 문화정체성”(2017)(『한국을 노래하는 세계의 작곡가-작곡가 정태봉 음악 연구』에 수록), 옮긴 글로는 “함께하는 이 순간: 국악 그룹과 작곡의 과정”(2015)(『글로벌 시대의 동아시아 현대음악』에 수록), “해석으로서의 분석 : 상호작용, 지향성, 창안”(2018)(『그래도 우리는 말해야하지 않는가- 음악의 연주, 분석, 작품의 해석』에 수록) 등이 있다. 2019년 경기도교육청 학교예술교육 우수수업 공모전에서 수상하여 교육감 표창을 받았다.

신예슬 | shinyeasul@gmail.com
음악학과 현대음악을 공부했다. 서양음악의 전제와 규칙을 두루두루 재고하고 있다.

이미지: 지학사 고등학교 음악교과서(2015년 개정)
https://reading.jihak.co.kr/tb/book/book_list_h.asp?listType=list&skwamok=H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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