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기 다른 장르를 거점으로 하는 동시에 그 사이를 배회하며 다양한 접점을 자유롭게 탐색한다.” ‘함께 듣고 쓰기’는 헤테로포니의 목표 중 하나인 이 문장을 실천하기 위한 기획이다. 한 명의 필자가 하나의 리뷰 대상을 추천하면, 다른 필자들이 각자 짧은 리뷰를 작성해 합동으로 공개한다. 리뷰의 대상은 공연, 음반, 전시 등 음악과 관련된 것이면 무엇이든 가능하다.

 

 

헤테로포니의 필자들이 케이팝에 대해서 글을 쓴다면 어떤 비평이 나올까? 이것은 ‘함께 듣고 쓰기’라는 기획이 처음 시작될 때부터 내가 가지고 있던 궁금증이자 소망이었다. 나에게는 – 그리고 아마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 너무나 익숙한 음악이지만, 그것이 대중음악 비평이라는 렌즈가 아닌 다른 프리즘을 통과하면 어떤 방식으로 독해될지가 궁금했다. 청하의 첫 정규 앨범은 올해 가장 즐겁게 들었던 레코드 중 하나였고, 케이팝에 대해서 함께 듣고 쓰자는 의견이 모아지자마자 망설임 없이 이 앨범을 추천했다. 이 담대한 앨범을 헤테로포니가 어떤 방식으로 읽었는지, 아래 결과를 확인해 보자. (정구원)

음반의 바깥

일반적으로 음반 리뷰는 음악비평가에게 중요한 일로 여겨진다. 특히 대중음악 비평에서 음반은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는다. 하지만 모든 비평가가 음반을 중심으로 하는 비평 관습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내 관심은 공연 혹은 현장1에 있다. 나는 순간 반짝였다 휘발되는 사건을 다루는 데 익숙하다. 종종 음악가를 조명할 때 음반을 다루기도 하지만 음반이라는 매체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다. 모든 음악가가 음반으로 자신을 표현하거나 입증하는 건 아닌데다 음반이 아닌 공연에 방점을 찍고 작업을 하는 음악가들에게 훨씬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매료된 음악가들은 공연에서 여러 차례 선보인 결과물을 다듬어 음반으로 발매하곤 하는데 이마저도 드문 일이다.

나는 ‘음악’이 어떤 조건 아래 성립하는지 살피려 늘 애를 쓴다. 전통음악에 관심을 갖다보면 귀로 감각할 수 있는 음악적 요소만으로 ‘음악’이 온전해지는지 고민하는 순간이 많은데, 이 과정에서 다양한 매체를 고려하게 된다. 이를테면 음반과 공연은 짜임새를 만들어 내는 방식이 서로 다르고, 음악가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매체도 다르다. 심지어 매체에 따라 음악가가 신체를 훈련하는 방식도 다르다. 그래서 음반에 아티스트가 의도한 세계가 온전히 집약되어 있다고 믿지 않는다. 당연히 트랙의 집합 혹은 트랙의 유기적 연결만을 ‘음악’이라 여기지도 않는다. 음반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음반에서 누락된 부분을 상상하거나 음반의 내·외부를 이리저리 접합해보는 편에 가깝다. 매체에 따라 감각하게 되는 음악의 모양새가 바뀐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다.

다른 필자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지적하듯, 청하의 [QUERENCIA]를 감상하면서 ‘음반의 완성도’라는 말은 내게 모호하게 느껴졌다. 일차적으로 음반의 음악적 구성뿐만 아니라 음악이 만들어지는 생태계, 음악을 소비하는 대상, 그들이 음악을 소비하는 방식, 음악이 유통되는 시장의 속성 등을 고려해 다양한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는 듯 했다. 만약 이러한 맥락을 비평의 중요한 출발점으로 간주한다면, 음반의 완성도를 논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할 것 같았다. 게다가 비평의 대상이 아이돌이라면 난이도는 더욱 높아 보였다.

물론 음반은 음악가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양질의 정보를 제공한다. 음반을 꼼꼼하게 파헤치면서 느끼는 즐거움을 언어화하는 일은 나에게도 중요하다. 하지만 음반에만 천착한 리뷰가 청하에 대한 전반적인 평으로 이어질 때 놓치게 되는 부분은 무엇일까? 질문을 바꿔보자. 음반이 전체적으로 유기적인 짜임새를 갖추었는지, 각각의 트랙이 음악적으로 도전적이나 흥미로운지를 판단하는 비평은 궁극적으로 아이돌 청하의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일까? 음반이 곧 자신의 역사인 음악가도 있지만 음반만으로 자신의 궤적을 온전히 설명하기 어려운 음악가도 있다. 특히 아이돌의 세계에서 아이돌과 음반 사이에는 촘촘하게 채워나가야 할 공간이 많은 듯 했다.

청하는 2020년 4월부터 “Stay Tonight”, “Play”, “Dream of You (with R3HAB)”, “X (걸어온 길에 꽃밭 따윈 없었죠)”를 차례로 선공개 하며 정규 음반에 대한 단서를 제공했다. 최종 결과물을 미리 치밀하게 계획하기보다 다양한 시도를 하는 과정을 중심에 놓고 음반의 상을 구체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 중 라틴 팝은 [QUERENCIA]의 음악적 정체성을 구축하고, 디바라는 이미지를 더욱 다채롭고 단단하게 다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적어도 나에게 청하의 퍼포먼스는 음악 자체거나 음악을 완전하게 만드는 사건이다. “Stay Tonight”에서 시도한 보깅 댄스는 길고 유연하게 뻗어내는 보컬을 부각하거나 겹겹이 쌓아올린 클라이맥스에서 음악의 전환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빠른 템포의 뎀 보우(Dem Bow) 리듬이 인상적인 “Play”는 라틴 댄스를 근간으로 하고 있는데, 코러스에서 군무와 듀엣 댄스를 배치하면서 음악의 박자와 호흡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감각하게 만든다. 청하의 영상을 보면서 무용수는 작곡가가 의도한 대로 음악을 듣지 않는다고 했던 한 작곡가의 말을 다시 되새기게 되었다. 무용수는 작곡가의 관점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독특한 박자와 소리를 기억하여 춤을 추는 것이다. 같은 음악이라 할지라도 사람에 따라 음악의 기본 단위를 서로 다르게 인식하는 사례는 무수히 많다. 더 깊은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청하의 퍼포먼스는 음악을 더 다양한 방식으로 분절하여 감상할 수 있는 퍼즐을 제공한다.

 

 

공식 뮤직 비디오뿐만 아니라 퍼포먼스 비디오(Performance Video)나 안무 비디오(Choreography Video)를 경유하면 음악을 감각하는 층위가 대폭 확장된다. “Dream of You”의 리듬감은 산재하던 악기의 소리를 순간 거둬내고 굵은 베이스 라인만을 남기거나 다시 복귀하는 매끄러운 과정에서 발생하지만 청하의 표정이나 퍼포먼스에 의해 더욱 극적으로 두드러진다. 또한 첫 번째 벌스와 두 번째 벌스의 음악 구조가 다르지 않지만 장면이 전환된 듯 전혀 다른 분위기로 느껴지는 이유도 청하의 퍼포먼스 덕분이다.

이 글에서 개별 트랙의 음악적 완성도나 음반의 구성에 초점을 두지 않은 이유를 반복해서 설명할 필요는 없을 테다. 퍼포먼스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촘촘하게 엮여 분리될 수 없다면 그건 음악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밀도 있게 장악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우리는 아티스트가 기대에 완벽하게 부응하거나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기대를 뒤엎을 때 환호한다. 반대되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사실 둘은 본질적으로 같다. 청하는 이 간단한 사실을 증명한다. [QUERENCIA]는 자신이 가장 잘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료하게 선언하고, 자신의 영역을 실험하는 진취적인 방식과 태도가 집약된 음반이기 때문이다.

 

열쇠 찾기

아무런 선지식 없이 청하 [QUERENCIA]를 한 차례 완청한 뒤, 내가 얻은 정보는 아래와 같았다.

  • 장장 스물한 개에 달하는 많은 트랙
  • 고결한(noble), 맹렬한(savage), 알려지지 않은(unknown), 기쁨들(pleasures)이라는 제각각의 이름으로 나뉜 네 개의 사이드
  • 간간히 등장하는 라틴 팝의 뉘앙스
  • 쉴 새 없이 바뀌는 장르 혹은 캐릭터

아주 머나먼 옛날 음악이지만… 잘게 나뉜 섹션, 서로 다른 성격으로 이루어진 악장이나 파트, 창작자의 인장처럼 등장하는 특정 요소, 변화무쌍한 캐릭터는 교향곡 같은 유럽 전통에서도 꾸준히 발견되어온 것이었다. 이처럼 크고 다양한 혹은 일견 산만해 보이는 음악을 마주한 연구자들은 그 구조의 비밀을 풀어낼 단 하나의 열쇠를 찾아가곤 했다. 그걸 찾기만 한다면 어떤 힘에 의해 조형됐는지 알 수 없던 소리의 연쇄를 마침내 ‘완결성 높은 짜임새’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열쇠를 음악 속 어딘가에서 찾아내는 것. 그것이 분석의 즐거움이자 묘미였다.

정구원 평론가가 제안한 이번 글감 [QUERENCIA]를 듣고, 나는 마찬가지로 이 모든 것을 단번에 이해하게 해줄 열쇠를 찾으려 애썼다. 잔뜩 긴장한 채 음반을 한 다섯 번쯤 정주행한 뒤, 음악 안에서 그걸 찾아내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납득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케이팝 문해력은 떨어지지만 K-인으로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면, 케이팝의 모든 것을 ‘청취’로만 경험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티스트별로 모종의 세계관을 형성하기도 하고, 이미 한 곡 안에서도 파트 간의 인과관계가 꽤 느슨해진 데다 퍼포먼스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 케이팝의 세계를 음반만 듣고 그 안에서 무얼 찾아내려 했다니, 아무래도 잘못 짚은 것 같았다. 특히 케이팝의 영역 안에서도 화려한 퍼포먼스로 주목받아온 청하의 음악을 이 한 장의 음반만 듣고 이해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을 뿐만 아니라 그럴 필요도 없어 보였다.

 

 

그가 근 1년간 꾸준히 공개해온 뮤직비디오와 무대 영상을 하나둘씩 시청한 뒤, 그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Bicycle”의 경우, 신체의 움직임은 부릉거리는 배기음을 모사한 저음부의 파열음에 더욱 묵직한 무게를 더했고, 번쩍거리는 빛들은 목소리를 형형하게 비추는 듯했다. 보깅 댄스와 절묘하게 맞물렸던 “Stay Tonight”은 블랙, 화이트, 골드 톤으로 구성된 세 개의 캐릭터를 계속해서 바꾸어가면서도 시종일관 조형적으로 움직였다. 이 몸의 리듬과 색 전환이 너무 근사한 탓에 나는 이 뮤직비디오를 지나치게 많이 보고 들어버렸고, 이제는 ‘이 밤 향기에 또 취하고. 멈추지 않아도 돼, sta-a-a-ay’라는 대목만 들어도 뇌리에 청하의 눈빛과 안무가 선명히 떠올랐다. 귓가에 맴도는 이어웜은 안무의 잔상까지 꼼꼼히 불러냈다. 이건 더 이상 ‘듣는다’고 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한편 음반 곳곳에 등장했던 라틴 팝의 요소들은 도대체 청하가 라틴팝에 대해 어떤 생각인지, 혹시나 라틴 아메리카나 스페인어권에서 살았던 것인지, 라틴 문화를 좋아하는지 라틴팝만 좋아하는지 등등 내게 크고 작은 물음표들을 남겼었다. 모든 궁금증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Play”의 뮤직비디오는 이 의문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됐다. 투우복을 비롯한 라틴 문화권 복식과 그에 착 맞아떨어지는 청하의 자신 있는 움직임을 보면 청하는 오랫동안 이 캐릭터를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구체화해온 것 같았다. 이 곡에 맞춰 일회적으로 형성된 컨셉이라기엔 라틴팝의 요소는 여러 트랙에서 너무나도 지속적으로 들려왔다. 추측이지만 이 인물상은 음악에 선행하는 것 같았고, 어쩌면 앞으로도 가끔 등장할 것만 같았다. 이어지는 음반 말미에는 청하가 구성한 캐릭터들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청하 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트랙들도 있었다(“X (걸어온 길에 꽃밭 따윈 없었죠)”). 서로 다른 방식이었지만 [QUERENCIA]의 곡들은 모든 것을 음악 안에서 해결하기보다는 인물의 표정과 동세, 움직임, 비주얼 아이덴티티, 개인사와 관계 맺으며 협력하고 있었다.

같은 이유로 어떤 이들은 ‘음원 혹은 노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식의 평을 내놓았다. 퍼포먼스를 함께 보고 듣지 않고 음악만 들었을 때 그 힘이 약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과연 퍼포먼스 없이 이 음반에 대해 한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지, 그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지, 이런 물음이 찾아왔다. 내게 [QUERENCIA]는 여러 퍼포먼스와 떨어질 수 없어 보였고, 음악에는 응당 퍼포먼스와 행위자의 이야기가 들어갈 여유공간이 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만약 음반으로 들을 수 있는 소리 안에서 모든 것이 완결되어 버린다면 어쩐지 청하의 세계에서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QUERENCIA]가 시각적 자극을 최소화한 채 소리 구현에 주력하는 음악도 아니거니와, 유기성과 완결성에 주목하는 ‘하나의 곡’도 아니니 말이다. 또 나처럼 ‘분명 뭔가 더 있지 않을까…’라고 추측하며 퍼포먼스를 찾아본 뒤, 그 힘과 멋과 매력에 반해버리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아쉬울 일이었다.

청하의 무대와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들은 뒤, 내게 이 음반을 듣는 일은 단순히 들려오는 소리만을 듣는 것이 아니라 ‘음반을 들으며 음반 바깥의 것을 계속해서 떠올리는 일’에 가까워졌다. [QUERENCIA]는 내게 완결된 어떤 것이 아닌, 유연하게 음반 외부와 연결되는 열린 형태로 다가온다. 그 안에서 맴돌지 않고, 퍼포먼스 혹은 뮤직비디오 혹은 청하가 시도해온 여러 캐릭터 혹은 청하라는 한 사람을 상기시키는 트리거로서의 음반. 그 다양한 움직임과 장르, 캐릭터를 환대하는 케이팝 세계의 음반이 더욱 촘촘히 계획해야 할 것은 완결성이 아니라 이같은 연결 가능성이었던 것은 아닐까… [QUERENCIA]에 ‘소리만으로 이루어진 세계’의 비밀을 풀어줄 작은 만능 열쇠는 없다. 대신 여기에 열쇠 비슷한 무언가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불필요하게 음반과 그 바깥을 갈라냈던 문들을 열 수 있는 열쇠 꾸러미에 더 가까울 것이다.

 

야심작의 무게를 다시 생각하기

엄정화, 보아, 이효리, 손담비, 현아, 선미의 뒤를 잇는 댄스 팝 기반 케이팝 여성 솔로 아티스트 계보에 청하를 올려놓는 것은 더는 어색하지 않다. [QUERENCIA]는 그 위상에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이들을 설득하기 위한 논증문처럼 꽉꽉 차 있다. 21곡, 네 개의 사이드. 빌보드를 노린 듯한 서구 취향의 빵빵한 사운드부터 R&B, 퓨처 하우스, 댄스홀, 미드 템포 발라드까지 총망라하는 팝의 소리들. 영어 가사는 물론 스페인어 가사까지 포함한 폭넓은 글로벌 타겟층. 숨길 필요도 없이, [QUERENCIA]는 야심으로 가득 찬 앨범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이런 종류의 팝 레코드가 그런 ‘야심’을 톺아보는 류의 비판에 노출되기 더 쉽다는 의미이기도 한다. 너무 많은 것을 시도해서 정작 앨범 전체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다, 이도 저도 아닌 백화점식 구성이다, 21곡 다 듣기 솔직히 지친다, 그런 류의 비판들.

팝 음악에서 ‘야심작’의 흐름이 끊기지 않는 이상 그런 류의 비판은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며, 나 역시 야심작이 어쩔 수 없이 동반하는 피로감에 덩달아 피곤해질 때가 있다. 그렇지만 [QUERENCIA]를 천천히 들으면서, 나는 ‘야심작 비판’이 하나의 정형화된 형판(template)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품게 된다. 그것이 야심의 압력마저 뛰어넘는 활기가 빛나는 순간 – ‘이 아름다운 별빛을 따라’ 상승하는 “Luce Sicut Stellae”의 목소리나, “Stay Tonight”에서 음압을 순간적으로 거둬들이는 지점이 만드는 짜릿함, ‘날 아주 헷갈리고 짜증 나게 만들어’라고 숨도 돌리지 않고 쏘아붙이는 “짜증 나게 만들어”의 호흡, 바스락대며 쏟아지는 모래알처럼 빛나는 “X (걸어온 길에 꽃밭 따윈 없었죠)”의 질감 – 덕분일 것이다. 이 순간들이 자아내는 감흥을 다른 모든 야심작에 대해서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QUERENCIA]는 야심작 비판이라는 형판이 어느 순간부터 내재화하고 있는 게으름, 앨범이라는 전체에 대한 ‘총체적이고 균형 잡힌’ 평결(이자 기준)을 추구하려는 타성에 대한 균열을 내며, 그로 인해 놓치고 지나갔을지도 모르는 매력을 반성적으로 되돌아보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QUERENCIA]에 대한 이즘의 비평에 나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더불어, [QUERENCIA]를 들으면서 나는 그 동안 야심작의 가장 주된 특징이자 앨범을 뒤뚱거리게 만든다고 여겨졌던 다양함(이자, 비판적인 시각에서는 산만함)이 어쩌면 야망의 중력 바깥으로 레코딩을 탈출시키는 지렛대로 탈바꿈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사로잡힌다. 힘이 들어갔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지만, 동시에 분절적으로 여러 장르와 사운드를 오가면서 한없이 가벼워지는 노래들… 이건 케이팝이 아닌가? 팝의 재료들이 종잡을 수 없는 방식으로 콜라주를 이루고 있는 광경.

그 광경이 청하가 여성 솔로 아티스트의 계보 중 처음으로 ‘케이팝의 기반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 입장이 아닌 ‘이미 다져진 케이팝의 기반 위’에서 커리어를 쌓은 아티스트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까?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던 아티스트들은 모두 케이팝이라는 음악이자 산업이 자리잡기 이전, 혹은 자리를 잡고 있던 시기를 개척해야 했다. 나는 그 과정에서 그들이 짊어졌으리라 짐작되는 어떤 가상의 무게를 상상한다. 참조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은, 무엇이든 만들어 나갈 수 있지만 그것이 유효할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는 불확실성에서 비롯되는 무게. [QUERENCIA]에서 청하가 거니는 사운드의 장은, 최소한 그러한 불확실성의 무게로부터는 자유로운 것처럼 느껴진다. 그는 믿음을 가지고 자신이 날아다닐 소리의 영역을 거침없이 택하며, 그건 케이팝이 자신의 ‘종잡을 수 없는’ 미학을 정당화할 중력을 확보한 상태에서 가능한 광경일 터이다.

그렇지만 ‘이 자리가 날 만든 게 아냐 / 걸어온 길에 꽃밭 따윈 없었죠’(“X (걸어온 길에 꽃밭 따윈 없었죠)”)라는 가사처럼, 청하가 이런 기나긴 앨범을 만드는 데 걸리는 더욱 긴 여정을 축소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프로듀스 101>이라는, 케이팝이 스스로를 정립하면서 함께 탄생시킨 뒤틀린 쇼를 통해 대중 앞에 나섰던 아티스트는 먼 길을 거쳐서 여기까지 당도했다. 그러니 지금은 우선, 다시 한번 이 안식처 속에 귀를 기울일 때다…

각주

  1. 극장의 무대가 아닌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전통적 연행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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