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테로포니 여러분께
마지막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걸 보니 저희가 함께 공연장에 간지 아주 오래되긴 했나봅니다. 사실 저희가 원래부터 그렇게 붙어 다녔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같이 공연 예매를 하거나 우연히 만나 기쁨의 하이파이브를 할 때도 있었는데 팬데믹 이후로는 아무래도 그런 일이 뜸해졌네요. 공연장에서 즐거움이든 놀라움이든 혼란스러움이든 불편함이든 하여간 많은 것을 느끼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동력을 얻곤 했는데 그런 경험이 뜸해지니 저는 아무래도 조금 힘이 빠진 것만 같습니다. 여러분은 잘 계시는지 늘 궁금해요.
공연장에 가지 못하게 된 뒤로 음악을 대하는 저의 태도도 아주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공연장이 어수선해진 와중에도 가까스로 글을 쓸 기회가 더러 있었는데, 이 글쓰기들을 좀 멈추고 싶다는 마음만이 가득했어요. 세상이 휘몰아치는 와중에 그 모든 면면을 기록하는 것도 멋진 일이겠지만, 당장 글을 쓴다면 음악의 무엇에 대해 써야 할지, 어떤 언어들을 사용하는 것이 유효할지 정말 모르겠더라고요. 음악 비평의 형식과 방향, 목표도 그간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점검해야 할 비평의 언어들도 아주 많아진 것 같고요. 저는 이런 말들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음악, 공연, 청취, 감상. 글에서 단단한 지지대로 기능해야 하는 이 개념들이 조금 의심스러워 보이는 탓에, 아무래도 요즘은 생각이 잘 이어지지 않습니다.
머리가 많이 복잡한 때이려니 싶고, 지금 믿을 수 있는 건 제 경험과 이야기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한동안 제 머릿속의 ‘비평’ 말고 조금 다른 글들을 썼습니다. 일지, 견문록, 대화록, 칼럼, 그리고 이 편지까지…. 편지를 써보면 어떨까 싶었던 건 작년 중반쯤, 정구원 평론가와 대화를 나누면서였어요. 여러분이 너무나 보고싶고 여러분과 경험을 공유하고 싶지만, 사실 또 저희가 메신저에서 그렇게 긴 대화를 나누진 않으니 편지로라도 근래의 이야기와 요즘 듣는 것들을 공유해보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를 나눴고, 재미있겠다는 생각에 그 안을 함께 구체화해봤어요. 수신인은 저희 중 누구여도 좋고 다른 누구라도 상관없지만, 편지지에 뭐라도 써서 발신해보자는 것이었어요.
저희는 종종 ‘이렇게 써야만 할 것 같은’ 비평의 틀에 대해 같이 이야기하고 괴로워하기도 했었죠. 이런 이야기가 나와야만 할 것 같고, 이 이야기를 하려면 다른 저 이야기는 소거해야 할 것 같고, 그렇게 ‘좋은 비평’을 지향하며 글을 쓰다 보면 그것이 우리의 음악 경험과는 어느새 많이 멀어져 있고, 그 풍성한 의미가 창발하는 공연 현장에서의 경험을 전혀 담지 못할 때도 많다고요. 그럴 때 필요한 건 뭐였을까요? 저는 그게 성문처럼 완성된 글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몇 년 전 책을 쓸 때 제 옆자리에 있던 사람은 지금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쓰면 되지 왜 다르게 쓰냐고 의아해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지 말고 그냥 옆자리에서 이야기를 들려줘. 맞는 말이었어요. 글을 쓰고 난 뒤에 읽으면서 검토하는 일이야 늘 했지만, 이제는 쓰기 전에 말해보는 일을 종종 하고 있습니다. 미국 영화에서 왜 필자들이 녹음기를 들고 중얼거리는지 알 것만 같았어요. 그리고 글보다 말에 가까운 것을 담기에 편지는 꽤 괜찮은 지면이라 생각했습니다.
예로부터 서간집은 꾸준히 발간되어온 책의 한 장르였고 최근엔 온라인으로 편지를 공개하는 일은 여러모로 잦아지고 있지만, 그래도 편지를 읽는 일은 (좋은 의미로)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편지를 읽는 일은 여전히 늘 기대돼요. 그게 나한테만 날아온 편지가 아니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함께 보는 편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여전히 그 반가움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저 수신인과 발신인이 정해져 있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말의 효력이 다르게 작동하는 것 같아요. 편지는 종이 한 장에 홀랑 쓰는 것이 아니라 이미 누적된 수많은 대화 위에 한 장을 얹는 것이니까요.
편지는 어떤 것인가 편지는 왜 재미있는가로 향하고 있는 걸 보니 인제 그만 써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혼잣말 대잔치가 되려는 순간이 바로 편지쓰기를 멈춰야 할 때라는 것을 지난 경험들을 통해 배웠으니까요. 하여간 여러분과 같이 음악을 경험하러 어딘가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요즘입니다.
예슬 드림
📩 어머니께, 두서없는 편지
아무리 생각해도 편지를 쓰는 것은 역시 조금 부끄럽고 힘든 일인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주장이나 행실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글이 아닌 이상 제가 쓰는 글은 대부분 읽어 줬으면 하는 사람을 상정하고 쓰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읽는 사람이 단도직접적으로 정해지는 편지라는 형식에는 익숙해지는 것이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렇지만 어머니한테 편지를 쓰려고 마음을 먹고 보니, 왜인지 조금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 듭니다.
아마도 오늘 편지에 쓸 내용이 어머니하고 평소에 이야기를 나누는 주제 – 민족, 계급, 자본주의, 나의 미래와 어머니의 미래, 그런 것들에 대한 대화, 때때로 논쟁 – 과는 (아마도) 무관한,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들려주었던 음악에 대한 내용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헤테로포니 필자들과 함께 ‘편지를 쓰자’는 기획을 잡고 나서, 누구에게 편지를 쓸지 정하는 것부터 막막해하던 와중에, 차라리 내가 편한 사람한테 쓰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신기하게도 가장 먼저 떠올랐던 사람은 어머니였고, 음악과 관련해서 어머니께 어떤 편지를 써야 할지에 대한 감도 잡혔어요. 내가 어렸을 때 좋아하던, 어머니가 들려줬던 음악을 물어보기로.
물론 어머니께서는 무슨 이런 글을 쓰냐고, 그리고 거기에 어떤 함의와 전망을 명확히 담았냐고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실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음악비평가로 생활하면서 점점 더 관심을 가지게 되는 부분은 사람들이 평소에 어떤 음악을 듣는지, 어떤 음악을 들으면서 성장했는지, 그리고 그런 음악들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입니다. 그것이 한 사람의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부분 – 그 사람의 정치∙사회∙경제적 위치와 가치관, 문화적 영향력이 개인에게 작용하는 방식 – 을 그것과 엮어서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러한 경험이 그 자체로 저에게는 너무나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저는 이 부분에 계속해서 주목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 주목의 연장선상에서, 어린 시절의 저와 어머니 사이에 음악이라는 매개체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했는지가 궁금해졌고요.
그렇지만 이런 이야기를 거창하게 써 놓았음에도, 막상 제게 떠오르는 것은 단편적인 기억들밖에 없는 것 같아요. 어린 시절 어머니가 들려주셨던 음악에 대해 하나로 이어지는 서사를 짤 수 있으면 정말 좋았겠지만, 아무리 기억을 하려 애써도 그것을 읽기 쉽게 잇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제가 생각나는 장면들에서 궁금한 부분을 두서없이 늘어놓아 보기로 했어요.
– 서너살 적 제 사진을 보면 서태지와 아이들 무렵의 서태지가 쓰던 비니를 쓰고 있었어요. 그 사진을 볼 때마다, 제가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악까지 좋아했기 때문에 그 비니를 썼던 건지, 아니면 그냥 어머니가 사 줘서 쓰고 다녔던 건지, 그 부분이 헷갈리더라구요. 제가 그 비니를 굉장히 좋아했었던 기억은 어렴풋이 남아 있는데, 그게 음악과 이어지는 것인지가 궁금해요.
– 제가 비틀즈(The Beatles)와 퀸(Queen)을 알게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어머니 덕분이에요. 초등학생 무렵에 비틀즈의 [1]과 세 장으로 나뉘어 있던 퀸의 [Greatest Hits]를 닳도록 들으면서 따라 불렀었는데, 그 때 저는 우습게도 제가 제 또래의 애들은 모르는 외국 밴드의 멋진 음악을 듣는 앞선 취향의 소유자라는 우쭐함에 빠져 있었답니다. 그들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리고 어머니 나이대의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뮤지션들이라는 점을 나중에서야 알고 살짝 배신감을 느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우쭐함도 배신감도 참 어린 나이의 귀여운 감정이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도 어머니가 어떻게 저한테 그런 음악을 들려줄 생각을 하셨는지는 궁금하네요.
– 초등학생 때 제가 어머니께 사 달라고 졸라서 H.O.T.의 4집 [I Yah!]를 가졌던 적이 있었어요. 그때 앨범을 함께 들으면서, 노래 중간중간에 삽입된 멤버들의 토크 트랙을 들으면서 어머니가 “왜 앨범에 노래만 안 들어 있고 이야기를 하냐”라고 핀잔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던 것 같아요. 그게 약간 부끄러웠었던 것 같아요. 큰 마음먹고 사 달라고 한 건데, ‘제대로 된 앨범’이 아니라 어머니 돈을 낭비하게 만들었던 것 같아서.
– 어렸을 때 어머니랑 차를 타고 다니면서 꽃다지의 테이프를 차에서 들었던 기억이 나요. 그 탓일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민중가요, 혹은 그런 풍의 노래를 들으면 제 안에서 뭔가 끓어오르는 것이 느껴지곤 합니다. 하지만 그 때 제가 들었던 것은 그냥 ‘좋은 노래’였을 뿐, 어머니의 경험과 꽃다지의 노래가 맺고 있던 역사적 경험과 감정으로 이루어진 연결선을 헤아리진 못했던 것 같아요. 학생운동에 참여하셨던 어머니는 그들의 노래를 어떤 식으로 접하고, 어떻게 받아들이셨나요?
– 함께 다큐멘터리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Buena Vista Social Club)>을 보고 사운드트랙을 샀을 때, 저는 다큐멘터리에 대해서도 음악에 대해서도 미적지근해했지요. 어린 나이에 이해하고 느끼기 어려운 감정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어머니가 이들을 정말 많이 좋아하셨던 건, 특히 “Veinte años”를 들으면서 감정에 복받쳐 하는 걸 봤던 기억은 지금도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이들의 음악에서 어떤 부분이 어머니로 하여금 그렇게 강렬한 감정을 느끼게 만든 것인지 문득 궁금합니다. 저는 왜 그것을 느낄 수 없었는지에 대한 것도요.
써 놓고 다시 돌아보니 정말 두서없는 편지가 된 것 같아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일화들을 돌이키면서, 제 자신이 어렸을 때 어떤 음악을 들었고 좋아헀는지,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어머니와 저 사이에 음악이라는 연결고리가 어떤 식으로 늘어서 있는지를 되돌아보는 기회도 되었고요. 오랫동안 음악은 결국 혼자서 들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요즘은 그 생각을 조금씩 바꾸고 있습니다. 저와 어머니 사이에, 그리고 과거의 저와 지금의 저 사이에, 음악은 항상 어떤 분명한 매개체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건 저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도 마찬가지겠죠.
일주일 뒤에 어머니를 만나러 내려가게 되면 이 궁금증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겠죠? 이번 방문은 다른 때보다 조금 더 기대감을 가지고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쓰지 않은, 음악에 대한 다른 이야기들도 나누게 되면 참 좋을 것 같아요. 더위 먹지 않도록 조심하시고, 곧 뵙겠습니다.
2021년 7월 29일
정구원 드림
📩 레오에게
선생님이 쓴 글을 어렵게 어렵게 읽고 나면 ‘이것이 진정 음악학이군…’ 이런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대체로 도입부에선 아주 미세한 균열을 적시하는 정도였지만, 실 같은 문장들을 한줄한줄 엮다 보면 어느새 촘촘하고 거대한 그물이 완성되어 있었어요. 거기엔 글에서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이 걸려 있었고요.
정말 멋있었던 건 그 뒤의 일입니다. 선생님은 열심히 엮어둔 그 논의와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을 모두 바닥에 내려두고 결국 진짜 중요한 게 뭐냐고 물었어요. 이 논쟁이 우리가 음악을 경험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식인지를 재고해보자는 거예요. 사람 속을 복잡하게 헤집어놓곤 어느새 아늑한 미소를 짓는 것 같아서 억울하고 얄밉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맞는 말인데 어쩌겠어요? 음악을 더 좁게 규정하거나 불필요한 틀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음악학은 음악의 의미가 풍성하게 창발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태도에 동의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예전에 한 음악가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연주가 어느 정도 진행되면 음악에 힘이 생겨서 스스로 어딘가로 가려고 하는데, 그때 흐름을 잘 붙잡아야 한다고요. 저도 글을 쓸 때 가끔은 글에 말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보통은 말린 줄도 모르고 망한 채로 글을 마무리합니다. 주제가 거대할수록, 제 경험이 빈약할수록 더 쉽게 겁먹고, 더 자주 망하고요. 그래서 어떤 글감에도 쉽게 지지 않는 선생님을 보며, 자본과도 같은 그 음악 경험을 부러워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역시 알다가도 모를 세상… 2018년 초에 저는 선생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한 음악학자 선배가 선생님을 뵈러 간다길래 냉큼 따라갔고, 선생님의 자택 겸 작업실에서 티타임을 가졌어요. 선생님의 배우자가 그린 그림, 온갖 책과 악보,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있는 곳이었습니다. 물감 냄새와 오래된 악기 냄새가 같이 나는 곳이었고, 선생님은 홍차를 끓여주셨어요. 선배는 쿠키를 사갔고요. 저는 조무래기로서 음악학 이야기를 많이 듣다가도 좋아하는 음악에 대해서만큼은 대화에 동참했습니다.
당시 선생님은 바로 제가 갔던 그 집에서 꾸준히 하우스콘서트를 열어왔고, 조만간 쿠르트 바일을 연주하실 예정이라고 말씀했어요. 쿠르트 바일에 대한 이야기는 흘러 흘러 막스 라베와 팔라스트 오케스트라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습니다. 막스 라베라면 우리나라에서 언젠가 핸드폰 광고에 노래가 실려 어느 정도 세간에 널리 알려진 음악가지만 사실 이분은 1920-30년대의 무도회장에서 사시는 분이잖아요? 하여간 선생님은 최근에 막스 라베의 음악을 알게 됐는데 이 음악을 듣고 있으면 옛 추억에 잠기고, 각별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저도 1920-30년대의 유럽·영미권의 무도회장 음악을, 그리고 귓가에서 속삭이는 듯한 크루너들의 노래를 좋아해왔습니다. 저는 더 케어테이커 때문에 그가 샘플링한 알 보울리의 음악을 샅샅이 뒤져 들었고, 러스 모건, 할 켐프의 음악을 찾아들었고, 그에 대한 어떤 각별한 애정을 느꼈습니다. 선생님이 좋아하신다던 막스 라베의 음악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또 쿠르트 바일이라면 당시 세간에서 유행했던 대중음악과 서유럽전통음악 사이에 있는 작곡가 아닙니까? 17~20세기 서유럽전통음악을 들을 때도 그 음악을 너무 좋아했던 탓에 이 몸이 21세기의 한국에 붙잡혀 한국어밖에 구사하지 못한다는 점이 얼마나 원통했는지 모릅니다. 언제나 제가 듣는 음악은 제 몸의 조건과 멀리 떨어져있다고 생각했어요. 무도회장 음악과 크루너들의 노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음악들을 듣는 기분은 그건 그냥 ‘좋음’의 상태라기보다는 어긋남에 기반한 동경, 그리움이 뒤섞인 상태에 가까웠어요. 가끔은 제가 잘못된 곳에 와있을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었고요. 하여간 존경하는 대가와 같은 음악을 좋아한다니 어쩐지 괜히 우쭐하던 찰나… 선생님은 이 음악을 왜 좋아하는지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어요.
선생님은 1931년생이자 독일계 미국인으로, 어린 시절 독일에 살다가 가족 전체가 미국으로 오셨다고 했습니다. 2차대전이 발발하기 거의 직전에 황급히 떠났어야만 했다고 하셨던 것 같아요. 이른 나이에 고향을 떠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아주 생생한 건 아니지만 라디오에서 듣던 음악들과 그 분위기만큼은 기억이 난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머지않아 2차대전이 시작되어 한동안 전혀 돌아갈 수 없었던 그 고향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키는 게 바로 1920-30년대에 독일에서 유행했던 쿠르트 바일과 그 시대를 다시 재현하는 막스 라베 같은 사람의 음악이라고 했어요. 그건 자신에게 어떤 대체불가능한 그리움의 상징이라 너무나 특별할 수밖에 없고, 자기와 또래인 독일인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요.
여기서 저의 잔잔한 충격이 시작됐습니다. 유년기에 미국으로 떠나왔던 90세 백인 남성 독일계 미국인 음악학자의 그리움엔 분명한 기원이 있었지만, 저에겐 그런 것이 없었어요. ‘legislated nostalgia’(그 시대 이후에 태어난 사람도 떠올릴 수 있을 만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고향의 모습)라는 말처럼 이 동경과 그리움이 뒤섞인 정서가 모두 학습됐다는 걸 모르진 않았어요. 언젠가 더 케어테이커의 음악을 들을 때, 그가 제 머릿속에 다른 사람의 기억을 심어놓는 것 같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고요. 그렇지만 현실에서 정말로 그 시대의 기억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습니다. 더 케어테이커 음악 속에는 오래 전 1920-30년대의 음악을 회상하는 어떤 노인이 앉아있을 것이라고 머릿속으로만 막연히 상상해왔는데, 제 눈앞에 바로 그분이 나타난 것만 같았어요. 그리고 그분과 마주앉아 있던 저는 ‘가짜가 아니라 진짜였네… 그럼 난 뭘 들은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즐거운 티타임은 음악 이야기를 좀 더 하다가 서서히 마무리됐지만 저에게 남은 그 찜찜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대화를 복기하던 중, 불현듯 제가 경험하고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전부 다 제 것 같지 않게 느껴졌어요. 제가 읽은 음악에 관한 책들, 그 책에서 꼭 얻고 싶었던 생각들, 제가 들은 음악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더 케어테이커와 알 보울리와 쿠르트 바일 이외에 저에게 각별했던 또 다른 유럽 음악가들의 이름이 떠올랐습니다. 올가 노이비르트, 메시앙, 말러, 몸포우, 슈베르트, 쿠프랭, 그리고 나…. 이 머나먼 음악들은 나랑 무슨 관계일까… 이 음악이 꼭 나에게 왔어야만 했을까…. 선생님은 그런 고민을 해보신 적이 없었겠죠? 이런 고민은 가끔은 재밌었고 대체로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서서히 이 모든 것을 좀 관둬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는 것과 좋아하는 것과 경험한 것이 도대체 어디에서 왔는지, 거기에 혹시 누군가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보기로 했어요.
여전히 선생님의 글을 존경하지만 당분간 서양음악학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은 사라졌습니다. 제 선호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제가 글에서 다뤄온 질문이 정말로 제가 궁금한 것들이었는지, 제가 일종의 숙주였던 건 아닌지, 음악에 대한 저의 고유한 선호가 얼마나 존재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음악에 대한 대체 불가능한 동경과 사랑은 여전하지만, 음악을 듣는 일을 쉬고 싶기도 했습니다. 제 안에서 음악을 듣고 있는 것이 정확히 누구인지 제대로 알기 전에는 들어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았어요. 선생님을 다시 뵐 일은 아마도 없겠지만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로 제가 좋아하는 음악을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2021년 7월 26일
예슬 드림
📩 이름을 부를 수 있을 때
Nguyễn 언니. 언니가 떠난 지도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네요. 아직도 종종 혼자 있을 때 그 날로 돌아가곤 해요. 평소라면 시끄러웠을 저녁, 모든 가족이 호흡을 거두고 시간이 멈춘 듯 각자의 생각에 빠졌던 그 날이요. 오늘 이렇게 편지를 쓰는 이유는 언니에게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예요. 우리가 서로를 알고는 있었지만 만나지 않았던 긴 시간동안 언니를 떠올렸던 순간에 대해 들려주고 싶어요.
우리가 처음 만날 날 기억해요? 저는 또렷하게 기억나요. 낯선 외국인이 어색해 쭈뼛거리던 저에게 언니는 먼저 ‘응웬’이라며 소개했어요. 조금 생소한 글자의 조합이긴 했지만 ‘응’, ‘웬’ 두 글자를 문제없이 알아들을 수 있었고, 발음하기도 어렵지 않았어요. 의심 없이 매끄럽게 ‘응웬’이라 소리 내 언니의 이름을 불러보던 그때를 기억해요. 언니가 일회용 컵에 담아 줬던 말린 살구의 여기저기를 한참 뜯어보다 이 끝으로 한 입을 떼어 먹고 탄성을 질렀던 기억도 생생해요.
그리곤 한동안 언니를 잊고 지냈어요. 저는 서울에서 스스로를 책임지며 살기 바빴고 누군가를 신경 쓸 겨를이 없는 날들을 보냈던 것 같아요. 언니도 나와 같이 때론 즐겁고, 때론 힘든 시간을 보냈겠죠? 아니 어쩌면 대부분의 시간이 외롭고 쓸쓸했을지도 모르겠네요. 가끔 고향에 내려가면 언니에 대한 소식을 듣곤 했어요. 엄마와 대화를 나눌 때마다 누가 결혼을 했는지, 누가 정규직으로 취직을 했는지, 동네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온갖 가십을 들어야 했는데, 그때 종종 언니 소식을 들었어요. 다 쓸 데 없는 무의미한 대화라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모두가 무탈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였어요.
언니를 다시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건 대학원에서 만난 한 선생님 때문이었어요. 수업 첫 날 선생님이 외국인 학생의 이름을 온전하게 부르려 애쓰는 모습을 봤거든요. 중국, 네팔, 베트남, 카자흐스탄 등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는데 선생님의 태도는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러웠어요. 출석부에 적힌 한글을 읽고 누군가가 손을 들면 다시 한 번 풀네임을 물어봤어요. 선생님은 학생의 소리를 유심히 듣고 억양과 강세, 성조와 운율을 최대한 기억하며 천천히 이름을 불렀어요. 그리고 이렇게 발음하는 것이 맞는지 학생에게 재차 확인했어요. 그때 처음으로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의 ‘진짜’ 이름을 듣게 됐어요. 한글로 치환된 익숙한 이름이 아니라 ‘진짜’ 이름이요. 정말 생경한 경험이었어요. 내가 알고 있던 이름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이름처럼 들렸거든요. 유려한 소리였어요. 너무나도 부드럽고 유창해서 오롯해지는 소리요. 친구들의 이름을 직접 물어보고, 들어보고, 발음해 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제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러웠어요.
그 날 이후, 종종 엄마로부터 언니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언니에게 다시 이름을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Nguyễn은 이름이 아닌 성이라는 걸 알게 됐고, 제 주변에 언니의 ‘진짜’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거든요. 굳이 알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어요. 마치 예전의 저처럼요. 언젠가 언니를 만나 서로를 다시 소개한다면 즐거울 것 같았어요. 언니의 입에서 들리는 그 이름을 기억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계획은 계속 미뤄졌어요. 다음 기회로. 내년으로. 언젠가. 어쩌면 저는 언니의 이름을 물어봐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로 어떤 위안을 삼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그렇게 언니가 떠나갈 때까지요.
언니. 저는 지금 하고 있는 모든 공부가 생소한 이름을 관찰하고 그 이름을 불러보는 일과 비슷하다 느낄 때가 있어요. 마치 언니의 이름을 궁금해하고 불러보고 싶어하는 것처럼요. 음악을 듣고 그저 나에게 익숙한 언어로 손쉽게 번역한 뒤 ‘이해’라는 단어를 붙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거요. 내가 감각할 수 있는 소리를 최대한 편견 없이 깊이 사유해보는 거요. 12반음체제에 갇히지 않고, 박자와 장단이 어떻게 다른지 고민하는 것이 언니의 이름을 귀 기울여 듣고 불러보는 일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계속해서 언어의 힘과 위계를 잊지 않으려 노력하고 싶어요. 힘이 있는 언어의 관성에 젖어 버리면 다른 언어의 모양새를 깊이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도 줄어드는 것 같거든요. 번역될 수 없는 소리는 타인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렇게 나의 세계를 넓혀 주잖아요.
마지막으로 이건 제가 준비한 마지막 선물이에요. 한국의 동해안 일부 지역에서는 사람이 죽었을 때 굿을 해요. 망자가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이 있다면 할 수 있게 도와줘요. 가족과 망자 모두에게 기회를 주는 거죠. 누구에게나 이별을 받아들일 시간은 필요하니까요. 제가 할 수 있는 작은 애도라 생각해주세요.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언니의 이름을 꼭 물어보고 싶어요. 언니의 이름을 기억하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언니가 늘 행복하고 자유롭길 진심으로 기도해요.
2021년 6월 20일
앞으로도 언니를 기억할 혜인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