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조선아의 〈비성의 무초〉에 관한 것이지만 그 공연의 중심부를 다루거나 그가 연주한 소리나 그가 들었던 소리에 대해 평하지 않는다. 그의 관점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그 역사를 살피지도 못한다. 조선아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한반도에 내려오는 예술’에 관해서는 경험이 현저히 부족한 데다 서구의 작곡 개념과 도구로서의 악기 개념을 오랜 시간 품어왔다(아마 지금도 그럴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비성의 무초〉에서 나는 새로운 배움을 위해 꼼꼼히 기억해보고 싶은 어떤 장면들을 관찰할 수 있었고, 그 장면들을 등불 삼아 내 안에서 어떤 상이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써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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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에 몸을 짜맞췄던 경험을 생각해본다. ‘최적화’의 시간이기도 한 연습의 과정에서는 악기와 가장 쾌적하게 어울리며 움직이는 기술을 연마한다. 모든 몸짓은 더 좋은 소리를 목적으로 한다. 악기 앞에서 몸은 마냥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규제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이기를, 그 규범에 통달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 모든 것을 체화한 상태에서만 어떤 제한적인 자유가 얻어진다. 악기, 그리고 그 앞에 앉은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엄격한 규범들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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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성의 무초〉에서 나는 어둠 속, 악기 앞에 엎드린 사람을 본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악기를 곧장 연주하는 대신 팔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는 팔을 위로도, 옆으로도 뻗으며 이후 팔꿈치를 구부리며 다시 위와 옆으로 향할 힘을 얻는다. 어떤 운동의 흐름이 형성되자 그 흐름 안에서 현의 존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현은 옆으로 뻗는 몸짓과 맞물리며 마치 우연인 것처럼 긁혀 울린다. 속도는 서서히 빨라지고 그 과정에서 현의 탄성도 강해진다. 한 줄에서 나타나는 복수의 소리들, 그 과정에서 음이라고 부르고 싶은 어떤 것이 들려온다.
하나의 현으로 다 담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운동성이 커지고 움직임은 그 옆으로도 번져간다. 이제는 서로 다른 현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이 엮이기 시작한다. 그건 조금 이상하게도, 악기에 애초에 여러 현이 있기 때문에 두 줄 이상의 현이 동시에 연주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두 개의 현이 엮여야 하기 때문에 이 악기에 여러 줄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감각에 가깝다. 움직임이, 그리고 소리가 악기에 우선한다. 어느 순간 양손은 손 닿는 영역 위에서 회전하며 여러 줄을 빠르게 건드린다. 그 양팔과 양손의 움직임으로부터, 안족을 중심으로 현이 두 영역으로 나뉘어야 하는 악기의 구조가 생겨난다.
나는 그 모든 일을 악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라고 이해한다. 명주실을 꼬아낸다거나 하는 식으로, 정말로 실질적인 악기 제작에 필요한 몸짓들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자신의 몸짓으로부터 악기를 발생시키는 일. 몸짓으로부터 악기가 자라나는 것 같은 기이한 광경. 움직임으로부터 소리를 만들고, 어딘가를 스쳐지나감으로써 그 자리에 현이 생겨나게 하고, 그것을 더 강하게 만들 수 있는 운동을 형성하고, 그 반복되는 운동으로부터 크고 작은 구조가 자라난다. 움직임으로부터 악기가 생겨나자 어느새 움직이는 자는 연주하는 자가 된다. 그 순간들로부터 이런 질문이 만들어진다. 악기는 무엇이 모인 사물일까?
몸은 풀처럼 서서히 흔들리고 목소리도 그 움직임에 동참한다. 눌리는 현처럼, 떨리는 현처럼 목소리가 운동한다. 아직 다 보이지 않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악기를 더듬어가는 과정에서, 악기와 조선아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소리로 발현되고 있다는 사실만이 분명하다. 언젠가는 몸짓이 분명히 앞서 있다가도 언젠가는 소리가 둘 사이의 관계를 도리어 설정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움직임이 만드는 소리, 소리가 만드는 움직임, 둘 사이의 관계는 엎치락뒤치락한다.
공간의 모서리마다 자리했던 스피커에서는 계속해서 소리들이 흘러나온다. 현이 한줄, 두줄 생겨날 때는 파도 소리를, 어느 순간엔 목탁소리를, 또 다른 움직임이 이루어질 때는 매미 소리를 악기 소리와 함께 듣는다. 계절을 지나는 동안, 여러 장소를 오가는 동안 그만큼 소리도 자라나고 꼬여간다. 악기 소리와 맞물리는 바깥 소리를 통해 이 무대 이전에 더 긴 시간과 더 넓은 장소가 있었다는 사실을 듣는다. 그리고 무대 위 연행자가 만드는 소리에도 그 시간과 장소들이 모두 압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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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 앞에 있는 그를 관찰하며 생각한다. 그는 그 무대 위에서, 악기를 부수지도 해체하지도 발명하지도 제작하지도 않고 새로운 악기를 만드는 것만 같다. 얼마나 많은 손짓과 몸짓을 지웠어야 악기를 만드는 몸짓을 형성할 수 있었을까. 그는 악기를 만들기 위해 정확히 무엇을 비웠을까. 그 감각은 바깥으로부터 이식되어 들어와 몸에 남은 어떤 것에 의지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곰곰이 되돌아보고 자신으로부터 창발하는 것을 찾아내려는 듯한 몸짓에서 비롯된다.
그는 날 것의 소리들로부터 아주 흐릿한 패턴을 만들고 그 소리를 반복한다. 그건 쉽게 발전하지도, 전개되지도 않고 그 자리에 머물며 완결되지 않은 어떤 상태를 강화한다. 길고 짧은 소리들, 높낮이가 다른 소리들이 교차해서 울리지만 소리는 그렇게 큰 위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그 소리는 무대에 있는 악기와 사람의 존재를 결코 넘어서지 않는다. 그 반복적인 몸짓과 소리는 무언가를 곱씹고, 되짚는 과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마도 그러기 위해 그는 어떤 것들을 되돌아보고 다시 생각했을까. 그 몸에 체화된 기억과 몸짓을 재고하며, 그러나 모든 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피어오를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하면서, 같은 음들을 반복하며, 그는 움직이고, 때론 그 몸짓과 소리에 맞춰 흔들린다.
마지막 순간, 그는 맞은편에 놓여 있던 25현 가야금으로 다가간다. 현 위에서 다시 한번 손을 움직이며 소리내면서, 그 음을 만드는 안족들을 하나둘 걷어낸다. 그 줄을 둘로 가르는 어떤 점도 만들지 않겠다는 것처럼, 그 점들로 이루어진 체계를 받아들이기 이전에 조금 더 들어볼 것이 있다는 것처럼. 안족이 우수수 바닥으로 쏟아지고, 그는 현이 달려있는 나무를 친다. 한 손은 채를 잡고, 다른 한 손은 손바닥으로. 악기를 두드리며 나무의 울림을 듣고는 다시 손가락으로 그 현들을 둥글게 건드려본다. 충분히 움직였다고 느껴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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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성의 무초〉에서 유은은 이렇게 쓴다. “누군가는 재앙의 곁에, 더 정확히는 빛이 저문 하늘 아래에서 재앙이 머물다 간 자리의 진동을 가늠한다. (…) 비극과 비애, 다급하게 조여오는 폭로와 외침들의 가속을 거스르기를 택한다. 머무르며 듣기를 택한다. 광휘의 허영을 마주한다. 빛을 잃은 자리에서 희끄무레 일렁이는 그림자를 발견한다.” 그리고 조선아는 이렇게 쓴다. “나는 몸의 내부에 집중하기로 했다. 산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꼭 산이 숨을 쉬는 것 같아. 떨리는 몸. 어떤 소리를 내고 들을까.”
별이 아닌 것의 춤추는 풀, 이라고 풀어 쓸 수 있을 이 〈비성의 무초〉에서 조선아가 어떤 소리를 내고 들었는지, 그의 내부에서 무엇을 발견했는지, 어떤 진동을 가늠했는지, 어디에 머무르며 들은 것인지 아마도 나는 영영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바깥에서 그를 쫓아가본 내게도 어떤 장면은 남아있는데, 그건 어둠 속에서 길잡이가 되어줄 별자리 없이도, 어딘가를 천천히 빙 둘러보며 바람에 맞춰 움직이는 한 사람의 그림자다.
신예슬 shinyeasul@gmail.com
배움을 위해 가끔 글을 쓴다.
*이 원고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비평활성화지원(개인)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