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게임을 하면서 ‘와 이 정도야?’ 하고 놀랄 일은 더 이상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2018년에 10년 넘게 쓰던 오래된 컴퓨터를 보내고 새 컴퓨터를 산 뒤 그 동안 관심은 가지고 있었지만 성능 문제로 해 보지 못했던 게임들을 다시 플레이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런 마음이 들었다. 꽤 어린 시절부터 즐기던 게임을 잠시 그만두게 된 것이 2012년 즈음이었으니, 게임을 다시 시작하기까지 6년 정도의 공백이 있었던 셈이었는데, 그 공백의 6년 동안 출시된 게임들은 단순히 시각적 부분만이 아니라 메카닉1∙디자인∙규모∙상호작용의 범위 등에서 내가 게임을 쉬기 전보다 한 단계 넓어진 감각을 제공했다. 비디오 게임의 태동기였던 80년대와 3D 게임이 본격적으로 주류가 되던 2000년대 사이의 차이처럼 ‘상전벽해’라고 표현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할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이 확실하게 늘어났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것은 ‘들을 수 있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을까?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 앞선 결론과는 달리 결정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 물론 오랜만에 다시 잡은 게임에서 들리는 효과음과 음악이 여전히 게임을 플레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게임들은 그와 비례하는 수준의 뛰어난 소리들을 들려줬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게임의 소리가 – 그 소리 자체의 ‘훌륭함’과는 상관없이 – 필수적임에도 주변부화된 위치에 놓여 있으며 그 역할 역시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효과음과는 달리 메카닉과의 일대일 대응 관계가 분명하지 않은 배경음악의 경우 이러한 정체의 인상은 더 심해진다. 〈배틀필드 1〉에서 전쟁의 참상과 무의미함을 전하려 하는 프롤로그에 붙는 웅장한 음악, 〈몬스터 헌터: 월드〉에서 조사거점 아스테라에 돌아왔을 때 나를 맞이하는 ‘RPG에 나오는 활기찬 마을’ 풍의 관현악… ‘플레이 상황에 몰입하게 만드는 분위기를 형성한다’는 게임 음악의 제1목표는, 내가 게임을 쉬기 전이나 후나 변하지 않았다.

이런 부분에서 나는 게임 음악이 종종 영화 음악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품는다. 적어도 ’기능’ 면에서, 대부분의 게임 음악은 미국의 현대음악가 애런 코플런드Aaron Copland가 1949년 영화 음악에 대해 밝힌 다섯 가지 역할을 그대로 따른다-“시공간적 배경을 확인하게 하고, 인물의 내부 심리와 상황의 숨겨진 의미를 창출하거나, 순수한 배경음악으로서 단순히 잡음을 덮거나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존재하기도 하고, 장면과 장면 사이의 연속성을 부여할 때도 있고, 영화의 감성적 토대를 구축한다.”2 영화로부터 많은 것을 빌려 왔던(그리고 동시에 현 시대 영화에 다시 되먹임을 주고 있는) 비디오 게임에 있어 음악이 예외가 될 수는 없어 보인다.

사실 여기에 불만을 가질 이유는 딱히 없어 보인다. 내가 게임을 플레이할 때 무비판적 몰입 상태에 얼마나 잘 빠지는지를 생각해 보면 더더욱(〈배틀필드 1〉의 프롤로그를 보면서 ‘으… 전쟁은 무의미해…’ 하는 값싼 감상에 빠졌고 〈몬스터 헌터: 월드〉에선 힘든 사냥을 끝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음악에 기운을 얻었다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 음악 자체가 아니라 – ‘음악적 경험’이 두드러졌던 몇몇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나는 뒤통수를 살살 긁는 것 같은 애매함에 사로잡혔다. 그 애매함에는 믿음과 의심이 중첩되어 있다. 이 게임 음악들은 ‘게임 플레이에 복무’한다는 자신의 기능이자 역할을 져버리고 자기도 모를 곳으로 게임을 하는 이들을 데려갈지도 모른다는 믿음,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발생한 순간적 파열을 무시한 채 다시 게임 속 몰입의 장으로 플레이어를 몰아넣어 버릴 수도 있다는 의심.

그런 애매함을 불러일으키는 음악적 경험은 대부분 의심의 승리로 끝이 났다. 나는 그 파열의 순간을 곧 잊어버리고 작금의 플레이에 다시 몰두했다(그렇다면 나는 게임 음악이 발생시키는 몰입의 힘을 ‘믿고’ 있는 것인가? 내가 하는 게 믿음인가 의심인가?). 하지만 그 애매함이 게임이 끝나고 난 뒤에도 뒤통수 어딘가에 여전히 남아 있던 것을 보면,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내가 그 이상한 음악적 경험의 가능성에 조금 많이 홀린 모양이다. 그리하여, 나는 게임 음악이 자신의 역할로부터 탈주를 시도하는 세 가지 사례를 되짚어 보기로 했다.

 

〈둠〉과 〈무제 거위 게임〉: 적응형 사운드트랙의 아이러니

새 컴퓨터를 사고 나서 내가 처음으로 사서 플레이했던 게임이 무엇인지 찾아보았다. 〈둠(DOOM)〉이었다. 1인칭 슈터(First Person Shooter, FPS)3라는 장르를 확립시켰던 1993년작 〈둠〉4의 후속작인, 악마들을 찢고 죽이는 게임… 오랜만에 플레이를 해 보니 2018년 당시 내가 (출시된 지 이미 2년이나 지난 나름 오래된 게임이었음에도) 얼마나 이 게임을 하고 싶어했는지, 그리고 기대했던 만큼 재미있게 즐겼는지가 기억난다. 지금까지도 나는 2010년대에 출시된 FPS 중에서 이 작품을 따라올 만한 게임이 없다고 생각한다.

 

“Doom – Kadingir Sanctum Nightmare & no HUD 4k/60Fps”, clockner

 

“The Brilliance of DOOM’s Soundtrack”, Raycevick

 

그렇지만 〈둠〉을 플레이하면서 정말로 놀랍다고 느꼈던 부분은 사실 그래픽이나 게임플레이와 관련된 부분이 아니라 음악이었다. 첫 스테이지 ‘The UAC’에서 여기저기에 정신없이 소환되는 좀비와 악마들을 잡으면서, 나는 모든 것을 찢어버릴 것처럼 울려퍼지는 메탈 사운드가 내 행동에 ‘맞춰서’ 재생되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두 번째 스테이지인 ‘Resource Operations’에 들어섰을 때 이 느낌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몬스터가 나오는 곳으로 이동할 때, 첫 번째 몬스터를 죽일 때, 보다 강한 몬스터가 등장했을 때, 마지막 몬스터까지 처리했을 때, 음악은 각각의 경우마다 명백하게 다른 단계(phase)를 재생했다. 이 과정에서 ‘부자연스럽다’는 느낌, 디제이가 실수를 했을 때처럼 음악과 음악 사이에 버벅이는 부분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은 또 다른 신선함이었다. 이러한 음악의 작용 너무 신기한 나머지 같은 부분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플레이해 보았고, 그때마다 게임은 내 플레이에 맞는 사운드트랙을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선보였다.

재미있게도, 1년 뒤 나는 〈둠〉과는 전혀 다른 게임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음악을 활용하는 사례를 발견했다. 장난꾸러기 거위를 조종해 인간들을 골탕먹이는 작품인 〈무제 거위 게임 (Untitled Goose Game)〉에서, 드뷔시(Claude Debussy)의 전주곡 제1권 12번 “음유시인: 보통 빠르기로(Minstrels: Modéré)”은 연속적인 하나의 곡이 아닌 거위의 움직임과 상황에 딱 맞게 흘러나오다 끊어지기를 반복한다. 편하게 앉아서 신문을 읽고 있는 아저씨한테 살금살금 다가갈 때는 피아니시모의 세기로 음이 올망거리다, 그 아저씨의 파이프 담배를 훔쳐 달아날 때는 강한 스타카토들의 조합이 핑퐁을 날리는 식으로. 이런 귀엽고 얼척 없는 게임에서 죽음과 파괴의 연속인 〈둠〉과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이없었지만, 음악적 경험이 동일하게 설계되어 있다는 걸 부정할 순 없었다. 이미 깔려 있는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 플레이어를 ‘따라오는’ 듯한 감각.

상황에 따라 다른 배경음악이 깔리는 것 – 긴박한 상황엔 빠르고 공격적인 음악을, 평화로운 상황에는 느긋한 음악을 – 은 게임을 오랫동안 해 왔던 플레이어들에겐 이미 익숙한 장치다. 그렇지만 적응형 사운드트랙(Adaptive Soundtrack)5이란 개념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둠〉과 〈무제 거위 게임〉은 음악을 쪼개고 또 쪼갬으로써 플레이어의 행동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배경 음악을 만들어낸다. 일견 미키 마우징(Mickey Mousing) 기법 – 스크린에 상영되는 동작 및 활동에 배경 음악을 정확히 동기화시키는 기법6 – 을 연상케 하는 이러한 음악의 활용은, 그러나 정해진 시퀀스에 ‘고정된’ 음악을 (정밀하게) 배치하는 종전의 미키 마우징과는 달리 가변성을 허용함으로써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음악에는) 벌스(verse)적 구조가 있고, 코러스적 구조가 있고, 거기에 이르는 빌드업(build-up)과 전환(transition)도 있다. 나 역시 그 방식을 따라 곡을 쓴다. (…) (그런 다음) 나는 음악을 여러 부분, 덩어리로 나눈다. 벌스당 50개의 변주를 만든다든지 하는 식으로. 그러고 나서 그걸 전부 하나의 컨테이너에 던져 넣는데, 그러면 그 많은 변주들이 (플레이 중에) 임의로 추출되게 되는 것이다. 만약 플레이어가 정말 쿨한 뭔가를 해서 코러스로 빵 하고 넘어가고 싶다면 그 컨테이너를 죄다 비운 다음에 전환부를 짧게 틀고 코러스를 불러온다. 그렇게 불러온 코러스는 필요한 시간 동안 임의로 추출되어 재생되고, 벌스를 틀어야 되는 상황이 오면 다시 벌스 더미로 돌아오게 된다.”

– 믹 고든(Mick Gordon), 〈둠〉 음악 제작7

골딩은 두 가지 버전의 전주곡을 녹음했다. 하나는 일반적인 연주로, 다른 하나는 훨씬 여리고 부드럽게. 그러고 나서 해당 트랙들은 서로 다른 ‘부분’으로 나누어졌다. 처음에 굴딩은 곡을 60개 정도의 부분으로 나눴으나, 그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임이 시작되면 일종의 극소 내러티브들이 막무가내로 펼쳐지게 됩니다. 그래서 흠, 그러면 한번 노가다를 해 볼까, 싶었어요.” 그래서 그는 로직을 사용해 곡을 두 개의 박자, 약 400개의 부분으로 쪼갰다.

– 댄 골딩(Dan Golding), 〈무제 거위 게임〉 음악 제작8

나 자신의 플레이에 의해 음악이 가변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음악이 ‘배경’으로 머무르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플레이어의 행동에 맞춰 적극적으로 변주되는 음악이 나에게 자신의 존재를 피력하게 되는 여지를 제공한다. 그 음악적 경험은 때때로 게임 자체의 메카닉 대신 순수하게 음악에만 집중하는 플레이를 촉발시키기도 한다. 〈둠〉에서 저 커다란 악마를 좀 더 멋지게 죽이면 이 기타 리프가 어떤 식으로 전환될까? 〈무제 거위 게임〉에서 마을 주민들을 적극적으로 괴롭힐 때 흘러나오는 신나는 피아노는 어디까지 이어질까? 그러한 관심이 플레이 사이클 내에서 오래 이어지지는 않더라도, 과거의 게임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방식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이것을 쉬이 ‘게임 음악의 자율적 가능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망설여진다. 어찌 보면 이것은 게임 음악이 더 이상 음악 자체가 아닌 플레이어 중심적 ‘경험’에만 모든 초점을 기울인 결과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는 〈둠〉과 〈무제 거위 게임〉의 음악이 훌륭하다거나 작품과 썩 잘 어울린다는 지점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단적으로, 과거의 게임에서는 플레이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음악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둠〉과 〈무제 거위 게임〉에서 음악은 오직 나의 플레이에 따라서만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음악이 플레이어와 상관없이, 혹은 플레이어를 무시하고 존재할 수 있는 여지는 어디에 있는가? 가변성이라는 측면에서 〈둠〉과 〈무제 거위 게임〉은 과거의 게임 음악, 혹은 모든 시각 기반 매체에 동반된 음악이 도달하지 못한 영역으로 나아가지만, 그 가변성이 실현될 수 있는 기반은 그 어느 때보다도 플레이어에게 예속된 좁은 영토에 있다는 아이러니를 낳는다. 그 아이러니는 적응형 사운드트랙이 다른 어떤 게임 음악보다 오직 게임을 위해서만 – 보다 정확하게는 플레이어를 위해서만 복무할 것이라는 의심을 지우지 못하게 만든다.

 

〈언더테일〉: 선행하는 음악

 

“Etika Reacts to Video Game Music | Etika Compilation (Sonic Mania, Undertale, Deltarune)”, Udgey Judge

 

지금은 고인이 된 미국 뉴욕 출신의 게임 전문 유튜버 에티카(Etika)의 〈언더테일(Undertale)〉 방송에서, 나는 그가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좋은 음악이 흘러나올 때마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루브를 타면서 “이거 ㄹㅇ 죽이네(this shit is real)”라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가장 좋아했다. 귀여운 꺽다리 해골 파피루스와의 전투에서 나오는 쿵짝거리는 폴카 리듬이나 용암 지대를 통과할 때 신나게 흘러나오는 신시사이저의 꾸밈음들을 들을 때마다 그는 자기가 끼고 있는 이어폰을 가리키며 진심으로 그 음악을 즐겼다. 심심할 때 유튜브를 뒤지면서 내가 했던 게임을 플레이한 스트리머들의 영상을 뒤적거리면서 시간을 죽이곤 하지만, 에티카의 그런 모습은 카메라와 마이크로 온갖 과장된 리액션을 쏟아내는 스트리머들 사이에서도 유독 내 인상에 강하게 남았다.

아마도 나는 〈언더테일〉의 음악을 온 힘을 다해 즐기는, 그리고 플레이를 잠시 멈추고서라도 음악의 훌륭함을 기어이 표현하고야 마는 에티카의 모습에서 내가 이 작품을 플레이했을 무렵의 감상을 겹쳐 보았던 게 아니었을까. 괴물들이 사는 깊은 산 속 지하에 떨어진 한 인간의 이야기를 고전 RPG9의 향취가 감도는 픽셀 그래픽10으로 그려낸 게임인 〈언더테일〉을 플레이하면서, 나는 (역시 훌륭하기 그지없는) 다른 어떤 요소보다도 음악이 나 자신에게 가장 먼저 다가온다는 인상을 받았다. 게임 속에서 어떤 이벤트가 벌어질 때, 전투가 시작될 때, 혹은 실없이 웃기는 대화가 이어질 때, 〈언더테일〉의 음악은 그 모든 ‘게임 내’ (혹은 ‘서사 내’) 요인보다 더 빨리 내 인식을 사로잡았다.

내가 다른 게임에서 ‘좋다’고 생각했던 음악적 경험들도 이랬던가? 글의 서두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나를 포함해서 게임을 즐기는 많은 이들에게 음악은 대부분 게임플레이에 후행後行하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비록 인상적인 음악을 듣기 위해 게임을 잠시 멈출지언정, 비디오 게임의 음악은 거의 언제나 우리가 ‘플레이하는’ (그리고 ‘바라보는’) 요인의 뒤에서 그것을 꾸며 줄 것을 기대받는다(물론 이러한 후행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여 인상적인 음악적 경험을 만들어내는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의 경우도 있긴 하다). 〈언더테일〉의 특이한 점은, 이 작품이 음악을 아주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방식11에 따라 활용하면서도 대다수의 비디오 게임 음악과는 달리 선행先行의 감각을 상당히 자주 발생시킨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플레이어가 첫 지역인 폐허(The Ruins)에서 나와 (해골 형제와의 개그를 본 뒤) 눈 덮인 필드인 스노우딘(Snowdin)에 들어서자마자 적막한 가운데 조용히 울리는 “Snowy”의 피아노 음들을 마주했을 때, 그리고 스노우딘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재생되는 “Snowdin Town”에서 “Snowy”의 중심 멜로디가 보다 활기찬 편곡으로 바뀌어 들려올 때, 음악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앞서서’ 그 곳의 인상을 결정짓는다. 이는 지역만이 아닌 특정 캐릭터와의 이벤트 혹은 전투에서도 마찬가지로 발생하는 현상이며, 〈언더테일〉 내에서 플레이어들이 내리게 되는 ‘선택’에 따라서도 음악은 변화하게 된다. 정직하게, 때에 따라서 강박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많은 상황들에 할당되어 딱딱 재생되는 음악들은 마치 플레이어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지금까지 게임을 하면서 음악에 별로 관심이 안 갔다고? 그런 건 이 게임에는 적용되지 않는 원칙이야. 들어. 이 음들이 네 귀에 박힐 때까지.

사실 이건 착청錯聽일지도 모른다. ‘후행’과 ‘선행’이라는 건 전적으로 나의 경험적 판단만에 의존한 개념일 뿐, 다른 이들은 타 게임의 음악을 대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언더테일〉의 음악을 받아들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언더테일〉의 시각적 구성이 – 물론 작품과 정말 잘 어울리며 세밀함을 갖추긴 했지만 어찌되었든 – 동시대의 게임들과 비교했을 때 두드러지게 특출난 지점이 없다는 점, 그리고 상대적으로 플레이의 호흡이 길게 이어지며 계속해서 컨트롤러를 붙들고 있지 않아도 되는 RPG 장르라는 점 역시 음악에 좀 더 귀를 기울이게 되는 요인일 것이다. 선행은 어디까지나 한계점과 정황에 의해서 파생적으로 발생한 효과일 뿐, 의도된 음악적 경험이 아니라는 의심이다.

 

“All the Undertale leitmotifs. ALL OF THEM.”, T Low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더테일〉의 음악에서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은 이것이 단순히 ‘게임에 어울리는 좋은 멜로디의 음악’을 넘어서 서로를 밀접하게 연결짓는다는 사실이다. 앞서 음악이 ‘많은 상황들에 할당되어’ 있다고 했지만, 〈언더테일〉의 음악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언더테일〉의 거의 모든 음악은 라이트모티프12를 공유하며, 그것이 활용되는 양상 역시 메인 테마를 다양한 방식으로 재활용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라이트모티프는 초반부에 등장한 캐릭터와 극후반부에 등장한 캐릭터 사이의 연관성을 드러내거나 스토리를 통해 밝혀지는 핵심적 주제의 편린을 암시할 정도로 치밀하게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라이트모티프의 연결점은 꽁꽁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연관성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드러나 있다. 상대의 공격을 정신없이 피하는 와중에 어디선가 들어 봤던 멜로디가 들려오고, 당장은 알아차리지 못하더라도 나중에 돌이켜 보았을 때 ‘그게 그 멜로디였군!’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게끔.

이와 동시에 〈언더테일〉의 음악들은 플레이어가 어떤 ‘루트’를 진행하느냐에 따라서 그 형태를 달리하기도 하는데, 이는 단순히 전혀 다른 음악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음악의 조성과 피치를 변화시키고 그것을 플레이어의 선택과 연동시키는 방식으로 제시된다. 〈언더테일〉의 음악을 내러티브에 따라 분석한 매튜 페레즈(Matthew Perez)에 따르면,

“(토비) 폭스는 화성적 안정성을 주제 의식으로 활용함으로써 도덕과 선택에 대한 그의 내러티브를 강화한다. 명백하게 조성을 갖추고 있는 곡은 플레이어 및 게임 내 캐릭터의 윤리적 행위를 지시하는 데 사용되며 (…) 플레이어가 작품의 ‘불살 엔딩’에 가까워질수록 조성을 갖춘 곡들이 보상으로서 더 많이 주어지게 된다. 반면, ‘몰살 루트’를 타고 있는 플레이어들은 지속적으로 찌그러진 곡과 조성적으로 모호한 음악을 마주하게 되며, 이는 그들의 행위를 응징하는 수단으로써 활용된다. 폭스는 명백히 조성을 도덕과, 무조성을 부도덕과 결부짓는다.”13

〈언더테일〉의 음악에 대해 내가 느꼈던 선행의 감각은 이런 특성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음악적 구성에 있어서나 내러티브와의 연동에 있어서나 명확히 감지되는 강력한 연결고리를 지니고 있는 〈언더테일〉의 음악은 게임을 플레이하는 데 있어서 더 이상 ‘게임의 요소이면서도 게임과는 부차적인’ 존재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성’을 넘어서 어떤 ‘필연성’을 담지하고 있는 듯한 음악, 이 작품에 이 음악이 쓰이지 않았다면 작품이 성립조차 되지 않았을 것 같은 음악. 그런 음악이 ‘먼저’ 들려오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 편이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판단은 기묘한 양가적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음악과 게임이 상호작용하는 가장 전통적인 방식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언더테일〉은 그럼으로써 다른 어떤 게임보다도 음악의 위상을 중요한 위치로 격상시킨 작품이 되었다. 그렇다면 내가 이렇게 앞서 나오는 음악에 몰입했다고 생각한 경험은 진정으로 음악에만 한정된 것인가, 아니면 음악을 포함한 – 혹은, 음악이라는 존재에 의해 ‘선제적으로 구축된’ – 게임이라는 총체에 파고든 것인가? 게으름 그 자체를 형상화한 듯이 뿜빰거리는 “sans.”가 샌즈라는 캐릭터의 인상을 결정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게임 속에서 샌즈를 처음 만났을 때의 실없는 인상이 그의 테마곡에 의해 강화되는 것인가? 〈언더테일〉을 진행하는 플레이어의 내면 속에서 음악은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장을 구축하지만, 그것이 〈언더테일〉이라는 세계의 일부에서 벗어난 형태로 자리잡고 있을지에 대해 나는 다시 한번 의심을 가진다. 어떤 점에서 이것은 집요한 타협의 결과물이다. 음악이 게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면, 차라리 게임이란 세계의 일부를 잠식함으로써 자신이 선행할 수 있는 필연성을 확보하는 것.

 

〈썸퍼〉: 뮤직 비디오 게임과 리듬 게임 사이의 세계

“Bottle Rockets – Opening”, Seemingly Pointless

 

‘엄마, 보고 싶어요‘라는 나레이션으로 시작되는 〈보틀 로켓(Bottle Rockets)〉의 작은 사각형 창 속에서, 나는 지구로 추락하는 우주 정거장 속에 갇힌 우주 비행사가 된다. 천천히 360도로 회전하는 정거장 속에서 스위치를 찾고 다음 문을 통과할 때마다, 그가 어렸던 시절의 기억이 짧은 문장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내가 얼마나 많은 문을 통과하건 상관없이, 정거장은 계속해서 추락하고 그것을 되돌릴 방법은 없어 보인다. 더 이상 다음 문이 열리지 않는 곳까지 왔든, 아니면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했든, 엇나간 듯이 이어지는 드럼 소리를 멈추고 쓸쓸한 신시사이저의 멜로디만 남을 때 나는 어떤 끝이 다가왔음을 예감한다. 게임은 에이펙스 트윈(Aphex Twin)의 “Alberto Balsalm”이 종료됨과 동시에 하나의 나레이션을 남기고 끝이 난다. 지구로 떨어지던 정거장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14

짧고 슬픈 이 작품을 개발한 개발자 제임스 얼 콕스 3세(James Earl Cox III)는, 『게임 디벨로퍼(Game Developer)』에 기고한 글에서 “비-플레이어 중심적(Non-player-centric)’ 게임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대부분의 게임들은 플레이어 중심적이다. (…) 물론 게임은 환경 및 세계에 의해 추동되는 스토리텔링에도 의지하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환경과 세계는 플롯과 캐릭터 뒤에서 수동적으로 머무르는 데 그친다”고 진단하는 그는 “캐릭터 및 플롯보다는 환경/세계 및 플롯에 의해 추동되는 게임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플레이어 캐릭터가 영웅이 아니고, 스토리나 세계가 플레이어를 향해 숙이거나 기다려 주지 않는 게임. 그런 게임에서 결말은 플레이어의 행동과 상관없이 독립될 것이다. 플레이어는 자유 의지를 행사하려 하지만, 궁극적으로 세계는 그저 자기 할 일을 한다. 그런 게임에는 무력감이 동반될지도 모르지만, 반대로 그런 점이 플레이어를 안심시킬지도 모른다. 도전 없이, 편안하게 즐기는 것.”15

이런 비-플레이어 중심적 게임을 만들기 위한 한 가지 방도로 그는 ‘뮤직 비디오 게임’을 제시하며, 〈보틀 로켓〉이 그 사례라고 쓴다. “이런 게임은 만들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어떻게 플레이어의 상호작용 없이도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경험을 만들 것인가? (…) 게임플레이를 단일한 노래에 맞게 집중시킴으로서 음악에 맞춘 내러티브를 만들어야 하며, 게임은 노래가 끝나는 시점에 맞춰 종료되어야 한다.”16 〈보틀 로켓〉을 비롯해 이 원칙을 따라 만든 〈핼리우스(Haelius)〉, 〈더 싱킹 필링(The Sinking Feeling)〉 등의 작품에서 플레이어는 ‘조작’을 할 수는 있지만 자신의 조작과는 딱히 상관없이 게임이 음악에 따라서 ‘진행’되는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이 뮤직 비디오 게임들을 소개하는 『킬 스크린(Kill Screen)』의 기사는 아예 “플레이어가 아니라 음악이 비디오 게임을 조작하면 어떨까?”라는 제목을 달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추가로 던진다. “비디오 게임이 게임보다는 비디오에 더 가까울 수도 있지 않을까?”17

이들 작품을 접하면서 나는 〈둠〉, 〈무제 거위 게임〉, 그리고 〈언더테일〉에서 게임 음악에 대한 믿음과 의심이 교차하는 원인이 세 작품에 강하게 뿌리박힌 플레이어 중심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졌다. 음악이 플레이어와는 상관없이 게임 안에서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둠〉과 〈무제 거위 게임〉, 그리고 〈언더테일〉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답을 내린다. 세 작품에서 모든 음악은 플레이어의 행동에 따라 물리적으로 촉발되거나 작품 내의 캐릭터 및 세계를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로서 플레이어가 경험해 주기를 기다린다. 반대로, 뮤직 비디오 게임들은 음악이라는 요인을 아예 게임이 흘러가는 유일한 경로로 설정한 뒤 플레이어의 행위를 주변부화함으로써 게임의 근본적인 전제를 파열시킨다.

그렇지만 이런 시도가 어딘가 단선적이지 않나 하는 약간의 아쉬움이 드는 건 뮤직 비디오 게임들이 플레이어를 안온한 관찰자의 위치에 놓으려고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아서였다. 뮤직 비디오 게임들이 제공하는 경험이 평온하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이 상정하는 ‘무심한 세계’는 세계가 플레이어에게 친화적으로 굴러갈 가능성뿐만 아니라 플레이어가 세계와 ‘불화할’ 가능성마저 앗아간다. 그 가능성이 사라진 지점에서 세계 속의 음악은 플레이어와 결속된다기보다는 잠깐 동안 반짝인 채로 사라질 위험에 늘 노출되어 있다. 비록 이런 내 입장이 여전히 플레이어 중심성을 놓지 못하는 미온적 태도라는 생각은 들지만, 뮤직 비디오 게임들 중 내게 진정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이 불화의 가능성 혹은 편린을 내포하고 있는 작품들이라는 점은 이 문제를 계속 고민하게 만든다. 〈보틀 로켓〉의 추락하는 우주 정거장, 공과 죽은 물고기와 트럭이 떠내려오는 〈핼리우스〉의 강, 심해의 어지러움과 잡히지 않은 나비가 교차하는 〈더 싱킹 필링〉.

 

“Valanga [EXT/10.5] EXC by KYUN.QS | jubeat festo 《4K UHD 60FPS video》”, KYUN.QS 켠

 

이 부분에서 나는 리듬 게임이라는, 게임플레이를 단일한 음악에 연동시키는 보다 고전적인 사례를 떠올린다. 특정한 음악을 들으면서 그에 맞게 게임 제작자들이 작성한 채보18를 타이밍에 맞게 입력하며 점수를 얻는다는(그리고 대다수의 경우, 그 타이밍을 일정 한계 이상으로 놓치면 페널티가 부과되는) 플레이 방식은 리듬 게임의 기본 원리이며, 이는 1996년 출시된 최초의 리듬 게임인 〈파라파 더 래퍼(PaRappa The Rapper)〉부터 VR 게임 시대의 〈비트 세이버(Beat Saber)〉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기 그지없는 컨트롤과 플레이 방식을 채택한 리듬 게임들이 공유하고 있는 대원칙이다.

뮤직 비디오 게임과 리듬 게임은 단일한 음악을 한 게임플레이의 호흡으로 놓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이지만, 그 밖에 거의 모든 지점에서 대척점에 놓인다. 우선, 〈댄스 댄스 레볼루션(Dance Dance Revolution)〉, 〈DJMAX〉, 〈유비트(jubeat)〉, 〈저스트 댄스(Just Dance)〉 시리즈를 비롯해 우리가 흔히 ‘리듬 게임’이라고 하면 떠올릴 법한 주류 리듬 게임들은 서사라는 요소를 완전히 배제한 채 게임 메카닉만으로 플레이어와 상호작용한다. 이들 게임에서 ‘진행’이라고 하는 것은 기껏해야 처음 시작할 때는 플레이할 수 없었던 더 많은 곡을 해금하는 정도다. 물론 〈파라파 더 래퍼〉를 비롯해 〈응원단(押忍!闘え!応援団)〉, 〈아이돌 마스터(アイドルマスター)〉 시리즈, 〈뱅드림! 걸즈 밴드 파티!(バンドリ! ガールズバンドパーティ!)〉처럼 자체적인 서사가 게임 내에 존재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게임 내 캐릭터를 통한 스토리텔링일 뿐 리듬 게임 자체의 메카닉과는 분리되어 있었다.

 

“Hey! Why don’t you just get up and dance man? (Pump it up Failed History)”, Nathan Tran

 

보다 근본적인 차이점은 리듬 게임이 음악만큼이나 플레이어를 게임의 중심에 놓는다는 점이다. 리듬 게임에는 보통 점수, 판정, 콤보, 해금 등 플레이어를 도전하게 만드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으며, 플레이의 실패는 곧 음악의 중단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비록 캐릭터와 서사가 결부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실패가 감정적 충격으로 다가오는 일은 드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듬 게임의 메카닉은 꽤 냉혹하다. 난이도가 올라갈수록 그러한 냉혹함과 실패에 따른 좌절감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하지만 발상을 조금 바꾸어 보면, 리듬 게임의 고난도 채보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종류의 냉혹함이 플레이어의 자유 의지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일종의 ‘비-플레이어 중심성’과 비슷한 효과를 발생시키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높은 난도의 게임이 의도하는 바는 그런 효과를 발생시키기 위해서가 아닐 것이다. 일차적으로 높은 난도는 그것을 깨기 위한 노력을 발생시킴으로써 플레이어를 게임에 몰입하게 만들며, 근본적으로는 난관을 돌파하기 위한 플레이어의 의지가 플레이 과정에서 부각된다는 점에서 ‘성취감’이라는 플레이어 중심성의 중요 가치를 빛나게 만드는 장치다. 하지만 그러한 논리가 어이없는 미스 한 번에 손이 꼬이면서 플레이를 망치는 사람의 좌절감과 무력감 – 게임에 학을 떼게 만들 수도 있지만 반대로 게임에 더욱 집중하게 만들 수도 있는 감정적 동인 – 을 제대로 상쇄시켜 준다고 보기도 어렵다. 리듬 게임의 어려운 채보는 미동 없이, 어떤 서사에도 의존하지 않은 채, 그저 음악에 따른 메카닉으로 존재하면서 플레이어와는 분리된 고유한 계를 구축한다. 그것은 뮤직 비디오 게임과 리듬 게임이 신기하게도 이어지는 또 다른 연결 고리이며, 어쩌면 뮤직 비디오 게임이 놓친 플레이어와 음악 사이의 결속을 보장하는 수단일지도 모른다. 비록 그 결속의 방식이 불화라 할지라도.

 

“10 Minutes of THUMPER Psychedelic ‘Rhythm Violence’ Gameplay: Level 4”, Polygon

 

〈썸퍼(Thumper)〉가 특별해지는 것은 이 부분이다. 〈기타 히어로(Guitar Hero)〉, 〈록 밴드(Rock Band)〉 등 인기 리듬 게임 시리즈를 제작했던 하모닉스(Harmonix) 출신의 두 개발자 브라이언 깁슨(Brian Gibson)19과 마크 플러리(Mark Flury)는 2013년 드룰(Drool)이란 인디 개발사를 설립한 뒤 2016년 ‘리듬 폭력 게임(A Rhythm Violence Game)’이란 캐치프레이즈를 단 작품 〈썸퍼〉를 출시했다.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우주 딱정벌레를 몰고 음울한 공간 속에 깔린 레일을 따라 달리며 음악에 맞춰 나오는 노트를 처리하고 보스와 맞서며 계속 달려야 한다.

여기까지만 설명하면 그저 형식을 조금 비튼 리듬 게임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지만, 〈썸퍼〉의 플레이에는 글로 채 담아낼 수 없는 격렬함과 기이함, 그리고 어려움이 공존하고 있다. 음악에 맞춰 내려오는 노트를 찍어야 하는 선이나 원 정도가 전부였던 일반적인 리듬 게임과는 달리 눈으로 볼 수 있고 플레이어의 입력에 맞춰 움직이는 캐릭터(딱정벌레)가 존재한다는 점은 보다 강렬한 속도감과 충돌에 따른 반응을 느끼게 만드는 〈썸퍼〉만의 특징이다. 리듬을 맞추는 데 두 번 실패하면 그대로 터지는 딱정벌레는 부딪치고, 돌고, 날면서 죽지 않고 계속 달리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하지만 분명히 시각적으로 구체적인 상을 가지는(그리고 플레이어의 조작과 행동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요소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설명 및 서사가 부재한다. 〈썸퍼〉의 세계 속 존재, 혹은 물체(thing)들은 매끈한 3D 금속질을 뻗치거나 위협적인 색을 기괴한 형태로 일그러뜨리면서 플레이어를 적대한다. 그것은 은색의 딱정벌레 역시 마찬가지다. 왜 달리고 있는지, 왜 저것들이 이 벌레를 덮치는지에 대한 설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만 존재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발생시키는 불안감은 선율이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비트와 앰비언스 및 노이즈만으로 이루어진 음악에 의해 더욱 증폭된다. 그렇지만 살아남고 싶다면 그 음악에 의지해야 한다. 눈을 깜빡할 시간조차 주지 않는 속도로 덮쳐 오는 장애물들을 쳐내고 달리기 위해서, 나는 찰나의 시간 동안 깜빡이는 소리 신호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얇은 팅 소리는 슬라이드(slide) 노트, 쌉쌀한 착 소리는 턴(turn) 노트. 근데 이 신호는 음악의 일부인가? 라는 의문을 품는 순간 노트를 놓치고 딱정벌레는 폭발한다. 체크포인트로 돌아가자…

리듬 게임의 메카닉은 세계가 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한 도구이자 규칙으로서 부여될 뿐, 특정한 위상을 지닌 계界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앞서 생각한 그 냉혹함이 어떤 세계로 확장될 수 있다고 무리한 가정을 내린다면, 나는 그것이 〈썸퍼〉가 구축한 세계에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플레이어는 중심에 있지만 무력하다(〈썸퍼〉의 딱정벌레가 항상 화면 중앙에 위치하지만 레일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이 점에서 상징적이다). 적대적이고 위협적이며 플레이어와 적극적으로 불화하는 세계 속의 존재들은, 그러나 단지 그러한 방식으로 존재하며 플레이어를 뒤돌아보지 않는다. 게임의 끝에 이르러서도, 나는 끝끝내 설명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단지 음악과 감정, 그리고 경험만이 내 안에 남는다.

다만 그것이 모든 이에게 허용되지 않는 음악적 경험이라는 것은 적대적이면서도 무심한 〈썸퍼〉의 세계에서 끝끝내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다. 이 세계는 냉혹함을 돌파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이들만에게만 허락되는 것인가? 그것을 돌파하지 못한, 혹은 돌파할 수 ‘없는’ 이들에게 이 경험은 어떻게 다가오는가? 작지만 깊은 파열 속에서 그러한 의문을 남기고, 〈썸퍼〉는 여전히 무심하게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다.


정구원 | lacelet@gmail.com
음악웹진 [weiv] 편집장,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대중음악을 듣고 그에 대해 쓰고 있으며, 대중음악의 범위와 효과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각주

  1. 플레이어의 활동을 통제 및 안내하고 활동에 대한 반응을 제공하는 게임의 자체적인 규칙.
  2. 이수일, 「영화음악의 기능 이론들에 대한 비교 연구: 작곡가 아론 코플란트, 음악학자 클라우디아 고르브만과 래리 팀의 이론적 주장을 중심으로」, 『음악교육공학』 22호, 한국음악교육공학회, 2015, pp. 1-22. 에서 Aaron Copland, “Tip to Moviegoers: Take Off Those Ear-Muffs; There’s music on the soundtrack, too, and you’re missing too much of it, a film composer advises”, The New York Times, 1949. 11. 6
  3. 게임 내 캐릭터의 시점을 통해 3차원 공간 속에서 다양한 무기를 이용해 전투를 벌이는 게임. 한국 내에서 유명한 작품으로는 〈서든어택〉, 〈오버워치〉 등이 있다.
  4. 1993년작 〈둠〉과 2016년작 〈둠〉은 제목이 같다. 이 글에서 따로 표기 없이 〈둠〉이 나온다면 그것은 2016년작을 가리킨다.
  5. 반응형 사운드트랙(Reactive Soundtrack)으로도 불리며, 넓은 의미에서는 플레이 상황에 따라 곡조 단위의 큰 변화는 물론 리듬, 볼륨, 피치, 리버브 등 같은 곡 내에서의 세부적인 변화를 주는 경우, 크로스페이드를 통해 곡 간 전환을 끊김이나 어색함 없이 부드럽게 만드는 것도 포함된다.
  6. 미키 마우스란 캐릭터가 처음으로 등장했던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의 1928년작 〈스팀보드 윌리 (Steamboat Willie)〉에서 이 기법이 처음으로 쓰였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7. Produce Like A Pro, “Mick Gordon Interview – Warren Huart: Produce Like A Pro”, 2016. 7. 30.
  8. Dami Lee, “How Untitled Goose Game adapted Debussy for its dynamic soundtrack”, The Verge, 2019. 9. 23.
  9. 롤플레잉 게임(Role-playing game)의 줄임말. 게이머들이 특정한 캐릭터의 역할을 맡아 정해진 규칙과 세계관 속에서 플레이를 해 나가는 게임으로, 오프라인에서 대화와 주사위 등의 소도구를 사용해 진행되는 테이블탑(Tabletop) RPG를 그 기원으로 한다.
  10. 디지털 화상의 가장 작은 단위인 사각형의 픽셀 단위로 구성된 시각 이미지. 3D 시대 이전 닌텐도 패미컴 및 슈퍼 패미컴 등의 비디오 게임 콘솔에서 화상을 창작하기 위해 널리 쓰인 수단이었으며, 이로 인해 고전적/복고적 인상을 준다.
  11.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방식’은 대략 다음과 같다. 각 장소마다 그 장소에 맞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각 캐릭터마다 ‘테마곡’이라고 부를 만한 고유의 곡이 할당되어 있으며, 발생하는 이벤트 상황에 맞춰 어울리는 음악이 나온다. 또한 적응형 사운드트랙은 물론이고, 지금의 게임들에는 흔한 기법이 된 음악 사이의 크로스페이드*조차 〈언더테일〉에는 적용되어 있지 않다. 음악은 계속해서 루프를 돌다가 다른 음악이 나오면 뚝 하고 끊긴다.
    * Crossfade. 한 음악의 볼륨이 줄어들며 페이드아웃되는 동안 다른 음악은 볼륨이 커지며 페이드인되는 믹싱 방식으로, 두 음악 사이의 부드러운 전환을 가능케 한다.
  12. Leitmotif, 특정한 인물, 장소, 개념과 연관되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음악적 주제나 동기
  13. Matthew Perez, “Undertale: A Case Study in Ludomusicology” (Master of Arts in Music), Queens College of the City University of New York, 2017, pp. 98, 페레즈는 이 논문에서 〈언더테일〉이 제시하는 윤리적 행위와 선택에 대한 비판적 입장 또한 제기한다.
  14. 〈보틀 로켓〉은 게임졸트(Gamejolt)에서 무료로 다운받아 플레이할 수 있다.
  15. James Cox, “Non-player-centric Games”, Game Developer, 2014. 9. 8.
  16. James Cox, 위의 글
  17. Chris Priestman, “What if music controlled a videogame instead of the player?”, Kill Screen, 2015. 1. 23.
  18. 채보의 사전적 의미는 음악을 듣고 그것을 악보로 옮겨 적는 행위를 의미하지만, 리듬 게임에서는 플레이어가 각 곡에서 수행해야 하는 입력 모음집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19. 깁슨은 미국 프로비던스(Providence) 출신의 2인조 노이즈 록 밴드 라이트닝 볼트(Lightning Bolt)의 베이시스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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