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현장에서 보고 들은 것을 다시 기억하고 싶어 노트를 느릿느릿 뒤적거렸다. 많은 현장에 방문해 사건을 기록하곤 하지만 6월 24일 文樂HOM 조율의 음감회에서의 일은 조금 복잡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건 분명 얼마간 들었던 것 중 가장 아름답고 촘촘한 소리였다. 하지만 때로는 소리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어디서 누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소리 이면에 어떤 불투명한 등장인물과 서사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평소라면 나중에 다시 천천히 들으면서 알아가면 된다고 생각했겠지만 한동안은 그걸 다시 들을 방법이 없었다. (이건 발매 전 잠깐 열린 음감회였다.) 여기서 당장 집중해서 듣고 무언가를 남기지 않으면 거의 아무 것도 손에 쥘 수 없을 거란 생각에 나는 듣는 내내 이상한 구석에 몰입했다. 과연 내가 제대로 듣긴 한 건지, 들으면서 정확히 뭘 추적하려고 한 건지 의심스러운 마음이 여전히 남아있지만 그곳에서 남겨온 첫 기록은 이렇게 시작한다. 


무대에서 모든 것을 듣고 있는 사람. 모든 걸 들은 뒤에 고른 소리. 갑작스럽게 전환되는 장면들. 무대는 위험천만한 곳인가? 음악이 스스로 흘러가게 내버려두지 않는 음악가가 힘주어 흐름을 바꾸는 곳. 조율이 경험하는 무대의 밀도? 무대 위의 소도구와 그 공간 밖의 바람과 물소리까지 모두 듣고 있다는 양 소리들을 다 꺼내두는데 ‘Earwitness’라는 이름 아래 모인 소리들이 어떤 증언이라면 그건 어떤 사건을 증거하는지

음악가와 시간과 장소를 약속하는 일은 보통 그때 그곳에서 무언가를 일으키겠다는 합의를 전제로 한다. 그것이 공연이든 연주든 음원을 플레이하는 것이든, 약속이 잡혔다면 현재에서 미래로 향하는 시간 안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한다. 그런 곳에서는 지금-여기에서 무언가 생성되고 발생하고 있다는 기대가 생기기 마련이다. 현장의 일은 대체로 현장 안에서 시작되고 완수되므로 거기서는 지금보다 다른 시간이 더 중요하게 다뤄질 이유가 없다. 

그런데 ‘Earwitness’의 시간은 지금을 듣게 한다기 보다는… 과거에 이미 끝난 일을 현재에서 흘깃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그건 아주 나긋하고 다정한 플래시백 같기도 했다. 녹음된 소리를 ‘play’하거나 ‘재생’한다는 말은 같은 행위를 겨냥하는 것처럼 쓰이지만 이 둘 사이에는 감각의 차이가 있다. ‘play’라는 단어는 연주나 놀이라는 다른 뜻과 마찬가지로 지금 행위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더 주목하게 한다. 하지만 ‘재생’(再生)은 그전에 일어났던 일을 잊지 않는다. 이 단어의 여러 뜻을 넓게 생각하면, 음악이 재생되기 위해서는 일단은 죽었어야 한다고, 혹은 적어도 무언가 끝나고 마감됐었어야 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음악감상회를 빙자해 열린 이 귀의 증인회는 후자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재생의 시간이었다. 어쩌면 오래된 증언을 전달받아 사건에 연루되는 과정 같기도 했다. 공모자가 되어버린 것 같은데 사건이 무엇인지 오리무중이라는 사실이 조금 이상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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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음악이 정말로 하나의 세계라면 그 세계의 날씨와 기압, 온도, 규모, 토질, 거주민들의 생태계와 그 내부에 교차하는 언어와 질서를 우리는 어떻게 상상해볼 수 있을까. 사건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때는 그 사건의 배경, 그 배경을 둘러싼 세계라도 샅샅이 뒤지다 보면 그 안에서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일까

먼지에 휩싸여있던 오래된 공간엔 유리 조각이 많았다. 어스름한 빛이 비치지만 사람이 오랫동안 드나들지 않은 곳인지 몇 없는 가구 위엔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기도 했다. 밖에선 바람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지만 피부를 스치는 기류가 내부로 흘러들어오진 않았다. 공간에 서 있으면 우글대며 으르렁대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그곳을 둘러싼 자연이 어디인지는 불분명했다. 물이 아주 많이 흐르는 곳인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곳인지, 혹은 건물의 구조물들이 조각나 있는 곳인지. 낮인지 밤인지. 방인지 창고인지. 그곳이 어디인지도 모르지만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곳의 쓰임새도, 주변의 환경도 많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타임랩스로 본다. 

온갖 날씨를 마주하는 동안 더럽고 고운 재료들로 가득한 시간은 길게 흐른다. 언젠가 굉음이 있었던 것 같지만 실제로 그 소리가 들려오진 않는다. 말풍선만 남은 비명소리처럼 그 굉음 바깥에 가라앉은 드론 사운드가 사라진 굉음을 증거한다. 이야기라 부를 법한 것, 소리의 서사라 부를 만한 것은 이미 닳아 없어졌고 느슨한 리듬만이 흔적처럼 남아 있다. 한동안 그 소리 세계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존재의 목소리와 소리라고 부를만한 것은 거의 들리지 않았고 모든 것이 풍경 같았다. 언젠가는 노래라는 것이 있었지만 이제는 사라진 지 오래다. 라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질 무렵에 만들어진 반짝이는 소리 같았다. 

언제부터 조율의 음악이 이렇게 두터운 공간이 되었는지 되돌아본다. 내가 처음 본 조율은 어쿠스틱 기타 한 대로 분명한 코드를 짚고 노래하는 포크 싱어이자 음악가였다. 거기엔 화성과 리듬, 단정한 노래와 억양이 있었다. 두 번째로 기억하는 조율은 기타를 어디론가 치워둔 채, 바닥에 앉아 컴퓨터 한 대를 앞에 두고 노래하는 음악가였다. 이때는 확장된 악기 소리와 자연의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세 번째로 기억하는 조율은 일렉기타를 옆에 대기시켜 두고, 꼿꼿이 서서 컴퓨터를 조작하며 그때그때 소리를 만들며 듣다가 어느 순간, 그 소리세계 안에서 잠시 기타를 치고 노래했다. 

그리고 두 대의 스피커를 마주하고 소리를 듣기만 했던 ‘Earwitness’에서는 그 시간 동안 수집해온 소리들이 가득 찬 공간이 만들어졌다. 소리는 본래 사라지는 것이지만, 어떤 공간 안에서는 소리들이 누적되어 오기라도 한 것인지. 노트 위 군데군데 흩어진 기록들에 의하면 나는 순서대로 이런 소리들을 들었다. 소리가 점점 노래로 향해가는 시간. 혹은 노래가 소리로 변해왔던 시간.


물소리, 바람소리, 유리 조각 소리, 먼지 낀 공간음, 희미한 허밍
사람들이 악기인 줄 모르는 악기 소리, 음악인 줄 모르는 음악 소리
기타가 아닌 수많은 현악기들, 가끔은 오케스트라, 농담 같은 조율 소리 
확장된 악기 소리와 끝없이 이어지는 긴 목소리들
선명한 목소리와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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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rwitness’에서 시간은 꼭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다음 트랙으로 향할 때마다 오래전 조율의 음악에서 들어왔던 것들을 만났다. 오랜 시간, 조율이 노래하는 사람의 몸 주변에 모여있던 시야를 공간 전체로 넓혀놓았다면, ‘Earwitness’에서는 넓어진 공간의 끝점에서 다시 중앙으로 영역을 좁혀갔다. 지금에서 출발해 다시 자신이 예전에 거쳐왔던 영역들을 고루 살피는 것처럼. 나는 그런 흐름을 귀로 들으며 얇고 단단한 바늘이 LP의 끄트머리에서 나선형으로 안쪽으로 향하는 움직임을, 혹은 최대한의 빛을 받던 카메라가 다시 조리개를 닫아가는 광경을 떠올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엔 노래 혹은 노래를 닮은 무언가가 들려왔는데, 정확히 어떤 노래였는지 이제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메모엔 이렇게 적혀 있다. 

아마도 총소리 그리고 성가. 고딕 건축 양식으로 만들어진 성당에서 불렸을 어떤 성가를 조금 뒤튼 것 같은데… 분명 리듬이 규칙적이지만 조금은 불안하다. 아무것도 예고하지 않는 것 같고 예고할만한 불안한 사건도 없는 것 같은데. 중심과 주변의 관계가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이 왜 있지. 이곳에 안팎이 있나. 음보다 소리가 많은 만큼 그곳의 질서도 달라진다. 기도자의 돌은 조율의 모티브 위에서 선명히 노래하는 트랙. 기도하며 돌을 손으로 쥐듯, 언제나 습관적으로 목소리를 다듬던 그 시간처럼 지지가 되었던 어떤 돌과 노래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노래의 형상은 더 선명해졌다. 희미했던 소리 더미에서 음처럼 들리는 것들이 자리 잡고, 리듬이라 부를 수 있을 길고 짧은 소리 패턴이 들려왔다. ‘기도자의 돌’에서는 조율이 오랫동안 지지대로 삼아온 여섯 개의 음을 다시 불러내 그 위에서 노래했다. 노래의 등장은 꽤 생경해서 여기에도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떠올리게 했다. 오랜만에 그의 선명한 노래를 듣다 보니, 몇 개의 음과 단출한 리듬이 노래를 어떻게 지탱했는지, 그 노래를 들여다볼 것이 아니라 어쩌면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할 것 같기도 했다. 조율은 이렇게 여전히 아스라히 노래하지만 왜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노래하지 않게 됐는지. 노래의 끄트머리에서, 혹은 노래 바깥의 세계에서 어떤 선연한 소리들을 발견했던 것인지. 

현장에서 들은 소리들을 복기할수록 ‘Earwitness’라는 말은 수수께끼처럼 느껴졌다. 사건이 있기는 했을까. 만약 이 소리들이 정말로 어떤 증인의 말이었다면, 증인의 소리였다면, 그것이 증거하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을 텐데 그건 정말로 뭐였을지 알 수 없었다. 각 트랙의 이름마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두 달 전의 청취자가 감히 덤빌 수 없는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제목은 그저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려는 맥거핀일 뿐 음악 안에서 읽어내야 할 사건 같은 건 아예 없었던 게 아닌지 뒤늦게 의심스럽다. 이 모든 것이 작고 귀여운 장난이었을까? 그저 객석을 증인석으로 만든 것이었을 뿐일까?

아니면 너무 손쉬운 문제였는데 내가 단정하게 빛나는 등잔 밑에서 헤매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조율은 어떻게 무언가를 듣고 증언하는 사람이 되었나. 혹은 조율은 그가 들어왔던 세계를 어떻게 재구성하나. 내가 더 중요히 들었어야 했던 건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였던 것 같기도 하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가 아니라, 무슨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든 간에 조율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였고, 어떻게 근사한 소리더미와 음악을 만들었는지. 사실 사건과 수수께끼는 소리의 이면이 아니라 소리의 표면에 다 들어있었고, 일련의 사건은 소리를 천천히 따라듣는 것으로만 증명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섣불리 추적하지 않고 더 잘 듣기만 했으면 되는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소리를 정말로 낱낱이 듣기 위해서는 이런 생각을 반드시 지나왔어야만 했을 수도 있겠다고, 이건 모두 듣기 위한 준비였을 뿐이었다고 낙관해볼 수도 있겠다. 물론 아무리 애써서 준비해본들 그 음악을 직접 만든 음악가처럼 소상히 들을 수 있게 되는 행운은 쉽게 찾아오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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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끝난 뒤 현장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그 사건을 재구성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현장을 방문하지 못한 채, 그에 대한 기록을 가지고만 사건을 재구성하는 일 역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어떤 소리를 듣고 그것이 무슨 공간에서 왜 울려 퍼졌던 것인지, 그리고 그 공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역으로 추적하는 일은 가능한 것일까. 소리의 울림만 듣고, 그 소리를 만들어낸 악기의 구체적인 형상을 추적했지만 궁극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어떤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다시 떠올린다. 

음악을 듣고, 그 내부 세계의 일을 추측하는 일도 늘 그렇게 실패한다. 지나간 일을 고스란히 경험하는 일은 불가능하고 현장은 절대로 되돌아오지 않는다. 불완전한 기억을 그나마 보완해줄 수 있는 건 불완전한 기록뿐이지만, 그 기록에 의지해 또 다른 믿을 수 없는 기록을 만들며 음악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진다. 그리고 내가 도대체 어디에 도착했는지 곰곰이 돌이켜본다. 나는 그저 음악감상회에 참여했고 언젠가 공개될 조율의 새 음악을 들었을 뿐인데. 이 일을 왜 이렇게 복잡하게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기억과 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지금 내가 떠올리는 그 세계는 아마도 내가 실제로 들었던 소리와는 무척 다를 것이 분명하다. 쓰지 않고, 생각하지 않은 채 그 기억을 온전히 내버려두는 편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지만 이제는 별수 없다. 

희미한 흔적들만으로 무언가를 추적하는 일은 탐사불가능한 곳의 형상을 그려내야만 하는 고고학자의 일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Earwitness’에 대해서는 여전히 잘 모르는 채다. 다시 들을 수 있다면, 그 음악의 내부에 들어가 볼 수 있다면 도대체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졌던 것인지 알 수 있을 텐데. 소리가 어느 순간 노래가 됐던 것인지, 혹은 노래가 흩어져 소리 속으로 사라졌던 것인지. 


신예슬 | shinyeasul@gmail.com
음악학을 공부했고 배움을 위해 가끔 글을 쓴다. 『음악의 사물들』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