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클래식’이라고도 별칭됐던 이 유럽 전통음악의 역사가 지금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이 음악에서 또다시 부정되고 새롭게 수립될 질서는 무엇인지, 어떤 음악이 음악들을 바꾸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2019년, 음악학자 원유선은 박사학위논문 「디지털 컨버전스 음악 연구」에서 지금 유럽의 작곡가들이 마주한 새로운 패러다임과 그 형성과정을 샅샅이 분석했다. 등장한 지 불과 10-15년밖에 되지 않은 이 새로운 음악들을 연구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 음악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2020년 5월, 음악학자 원유선을 만나 이 연구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선생님의 박사학위논문 「디지털 컨버전스 음악 연구」를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오늘은 이 연구의 맥락을 두루 살펴보는 대화를 나눠보면 어떨까 해요. 우선 연구의 출발점을 간단히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연구의 시작은 불과 33초에 불과한 요하네스 크라이들러(Johannes Kreidler)의 <간접광고>(Product Placement)에서 비롯되었습니다. 2014년 독일의 음악학자 헤르만 다누저(Hermann Danuser)가 대한민국 예술원과 서울대학교에서 ‘작곡에서 사운드 디자인으로, 사운드 디자인에서 작곡으로’라는 제목의 강연을 한 적이 있었죠. 디지털 시대가 도래했고 이제는 음악학에서도 미디어의 영향력을 고려할 때가 됐다는 화두를 던지면서 최근 사례를 소개했는데 그 중 하나가 독일 작곡가 크라이들러의 작품이었어요. 음악을 듣는 순간 ‘이것이 바로 미래의 예술작품(Das Kunstwerk der Zukunft)이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7만개도 넘는 과거의 작품들이 섬광처럼 지나치는 음향을 들으며 이 작품이 향후 음악적 패러다임을 바꿀만큼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저 흥미로운 음악이라고 스쳐지나가기엔 그 영향력이 너무도 크다고 생각했기에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죠.

 

요하네스 크라이들러, <간접광고> (Product Placement, 2008)

 

요하네스 크라이들러, <압축사운드아트> (Compression Sound Art, 2009)

 


크라이들러의 음악은 ‘개념음악’(Konzeptmusik)이라는 장르로 분류되는데요. 그의 음악에서 출발한 연구가 ‘디지털 컨버전스 음악’이라는 용어에 도달하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을지도 궁금합니다.

사례를 뒤지는 작업으로 시작했습니다. 크라이들러부터 시작해 주변 음악가들의 홈페이지, 유튜브 채널, 페이스북 계정 등 온라인 정보를 반년 간 탐색하면서 꼬박 500곡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어요. 그 과정에서 특정한 경향을 포착할 수 있었죠. 수집한 작품들이 변화된 기술에서 비롯된 광범위한 문화적 변화를 함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구를 진행하며 각 작품에서 과거와 현재, 소리와 이미지, 음악과 신체, 현실과 가상 등 서로 다른 것들이 교차하거나 충돌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디지털화를 매개로 서로 상이한 것으로 구획된 것들이 융합하는 음악을 ‘디지털 컨버전스 음악’(Digital Convergence Music)으로 정의하게 되었죠.


논문의 부록에 담겼던 그 ‘디지털 컨버전스 음악, 주요작품목록’이 바로 그 피땀 눈물의 흔적이군요. 본론의 작품연구 파트에서는 몇몇 대표작을 꼽아 집중적으로 조망하시기도 했는데요. 주요 작곡가들은 누구인지, 그리고 그중 가장 수상하고도 흥미로웠던 사례는 무엇인지 간단히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크라이들러 외에도 가브리엘 프로코피예프(Gabriel Prokofiev)와 니콜 리제(Nicole Lizée), 알렉산더 슈베르트(Alexander Schubert), 슈테판 프린스(Stefan Prins)를 들 수 있고요. 이 네 명의 작곡가 모두 디지털화로 다른 성격의 정보가 융합되며 나타나는 긴장과 충돌을 첨예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곡이 다 문제작이자 주옥같은 작품인지라 딱 한 곡만 선택하기 어렵네요. 그래도 한 곡만 이야기하자면 슈베르트의 <네 여우의, 더러운 금>(Your Fox’s Dirty Gold, 2011)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곡은 센서를 매개로 연주자의 신체와 사운드를 연계시키고 있는데요. 음악과 다른 감각의 융합이 이제 유기체와 비유기체로 확장되었다는 점에서 심상치 않은 화두를 던지고 있다고 봅니다.

 

알렉산더 슈베르트, <네 여우의, 더러운 금> (Your Fox’s, A Dirty Gold, 2011)

 

니콜 리제, <히치콕 에튀드> (Hitchcock Études, 2010)

 

슈테판 프린스, <제너레이션 킬> (Generation Kill, 2012)

 

이 음악가들이 역사와 전통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궁금합니다. 주식 차트, 스크롤을 내리는 초조한 손놀림, 교황의 목소리, 심전도 그래프 등 수많은 데이터가 이들의 곡에 흡수되어 있지만 그래도 높은 확률로 유럽 전통의 요소가 그 음악에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베토벤 9번 교향곡, 쇼팽의 음악, 에튀드, 벨칸토 창법, 오케스트라 편성 같은 것들인데요. 오랫동안 정전의 자리에 있었던 유럽 전통의 음악과 그 요소들이 이 ‘디지털 컨버전스 음악’에서 계속 사용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태도로 다뤄지고 있다고 보시는지요?

전통적인 유산의 활용은 서양음악사에서 꾸준히 행해져왔지만, 이들이 전통을 대하는 태도는 과거와 꽤나 다르다고 봅니다. 예전에 작곡가들이 과거의 작품을 사용할 때는 전통적 산물에 대한 존경이나 조롱 같은 뚜렷한 가치판단이 수반되었습니다. 하지만 디지털 컨버전스 음악에 포함되는 작곡가들에게 과거의 재료는 자신이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도구일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예전에 과거 작품의 인용이 암시적으로 사용되었다면, 디지털 컨버전스 음악에서는 과거의 재료를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마치 요즘 대중들이 검색을 통해 쓸만한 재료를 포획하고 편집해서 이목을 끌만한 콘텐츠를 만드는 과정과도 흡사하죠.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Sergei Prokofiev)의 손자이기도 한 가브리엘 프로코피예프(Gabriel Prokofiev)의 경우, 오케스트라 편성을 꽤 자주 사용합니다. 거기에 비트를 붙이고요. 프로코피예프뿐만 아니라, 디지털 컨버전스 음악에 속하는 많은 작곡가들이 여전히 전통적인 악기를 사용한다는 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네, 가브리엘 프로코피예프는 오케스트라 음악도 샘플링된 음악처럼 사용합니다. 오케스트라로 댄스 음악의 감수성을 만들어내려 하고, 힙합 비트도 사용하죠. 마르코 니코디예비츠(Marko Nikodijevic)라는 작곡가는 이제 전통적인 매체도 디지털적인 방식으로 개조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오케스트라를 전자음향처럼 다루는 시도를 하고 있어요. 오케스트라 음악을 전자음악의 관점에서 재구성해서 전자음향과 오케스트라 음향의 경계를 허물려는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매체이론에 따르면 새로운 매체가 생겼다고 해서 과거의 매체가 사라지거나 대체되는 건 아닙니다. 과거의 매체는 새로운 매체의 영향을 받아 기존의 낡은 형식을 현재의 기술적 형식으로 개조해나가죠. 마찬가지로 최근 전통적 악기를 사용하는 음악이 사운드 샘플을 편집하거나 음향을 증폭하는 방식으로 각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디지털 컨버전스 음악을 둘러싼 제도와 역사는 아주 분명합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는 데 이견은 없지만, 이 사례들이 여전히 전통에 상당부분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와 유사한 역사 선상에 놓여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다음 세대는 여전히 이런 점을 비판하겠죠.

이 작곡가들은 스스로를 ‘현대음악 작곡가’라고 강조하고, 이 음악들이 그 제도 위에서 탄생했다고도 말합니다. 여기서 이들의 치명적 모순이 발생합니다. 제도를 비판하고 벗어나려 하지만 전통을 벗어나기 위해, 혹은 본인의 작업을 알리기 위해 여전히 제도의 힘을 빌린다는 점에서 말이죠. 다름슈타트에서 신작을 발표하거나, 권위 있는 음악학 학술지에 글을 발표한다거나, 최근 교수로 자리잡는 과정을 보면서 이런 모순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비판은 처음부터 계속 있었습니다. 이들이 본인을 어필하는데 능수능란하고, 기술의 힘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죠. 지속성의 측면에서 이들이 계속 신선한 아이디어를 줄 수 있을지는 회의적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죠. 존 케이지의 <4분 33초>가 이제는 더 이상 어떤 감각적 충격도 줄 수 없는 “무감각한 개념음악”(anästhetische Konzeptmusik)이 됐다지만 여전히 그 혁명적인 의미가 회자되는 것처럼요. 마찬가지로 이 음악들 역시 지속성과는 별개로 음악사에 기록될만한 의미있는 사건들이라 보고 있습니다. 


조금 상세한 이야기로 들어가 볼까요. 이들이 음악을 만드는 프로그램과 그 작동 방식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 디지털 오디오 워크스테이션(Digital Audio Workstation, 이하 DAW)이라 통칭되는 여러 프로그램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텅 빈 오선보가 열려있는 빈 종이이자 사고의 틀을 제한하는 장치가 됐던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동시에 제한하는 새로운 장치가 됩니다. 사고방식의 새로운 틀이 되는 것이라고 할까요.

‘디지털 컨버전스’에 주목하는 음악가들은 실제 악기 연주자들과도 함께 작업하지만 DAW와 가상악기를 많이 사용하죠. 프로그램이 주는 편의성을 많이 활용하고, 작품의 구성에도 많은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DAW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는 점에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작업방식이 획일적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프로그램은 계속 발전되겠지만 애초에 미디 자체가 굉장히 제한된 툴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습니다.


만능처럼 보이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 틀에서 벗어나는 것은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기술이 결코 유토피아적이지가 않아요.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브라우저도 구글 아니면 네이버인데, 굉장히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DAW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양하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어떤 틀이 독점하고, 뭔가를 제한하고 있는 거예요. 게다가 여기엔 완전하다는 환상까지 있지만 현실은 물론 다르죠. 최근에는 시창·청음 수업을 온라인으로 해볼까 했는데 시차가 생겨서 안 되겠더라고요. 요즘은 극심한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수업이 통폐합되면서 시창·청음을 무려 100명씩 듣는 경우도 있다고 해요. (웃음)


거기서 만들어질 헤테로포니와 레이턴시는 과연…. 멋질 것 같아요. (웃음) 관련해서 논문에서 다뤘던 에릭 휘태커(Eric Whitacre)의 <가상합창 시리즈> 작업도 떠오릅니다.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각자의 공간에서 노래하고, 그걸 에릭 휘태커가 ‘합창단’으로 모으는 거죠. 합창으로 우리 모두 ‘하나’가 된다는 어떤 열망과 환상을 아주 노골적으로 보여줬던 작업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고든 캄페(Gordon Kampe)라는 작곡가는 이 가상합창단이 아름다운 화음과 조화를 보여주지만, 결코 그 음향이 그렇게 매끄럽게 나올 수 없다는 부분을 지적해요. 그건 다 편집으로 만든 거죠. 좋지 않은 소리들을 다 지우고 걸러내고요. 캄페는 그걸 ‘악의적인 매끄러움’(bösartiger Glatte)이라고 표현합니다. 지금 2020년에도 그런 식으로 매끄럽게 합창하는 것이 정말 어려운데, 에릭 휘태커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식으로 굉장히 유토피아적인 분위기를 풍깁니다. 저도 그 작업을 처음 봤을 때는 흥미롭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기술에 대한 관점을 쌓아가다 보니 그 작품의 가치가 과연 무엇이었나를 자문하게 되더라고요.

 

에릭 휘태커, ‘물의 야상곡’ (Water Night, 2012), <가상합창시리즈> (Virtual Choir Series)

 


저도 아뿔싸 싶었어요. 슈퍼 히어로 영화에서 이상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소위 ‘불순한 것’을 모두 제거해버리는 악당 캐릭터가 떠오르기도 했고요. 속지 않기 위해서는 기술을 정확히 파악하고, 시스템을 관망할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창작자의 관점이 중요한 것 같아요. 단순히 기술을 이용했다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이런 기술을 어떤 관점으로 보고있는지가 훨씬 더 섬세하게 다뤄져야 한다고 봅니다. 감상자로서 그것을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도 중요하고요. 매끄럽지도 않은데 매끄럽다고 이야기하니까 정말 그런 것 같고, 다양하지 않은데 다양하다고 하니까 다양한 것 같은 거죠. 서양음악 분야에서는 아직 ‘디지털 리터러시’(Digital Literacy)가 자리잡지 않았는데요. 글을 읽고 쓰는 방법을 배우는 것만큼이나 음악에서도 디지털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고, 음악을 이해하는 방법론에서도 디지털 리터러시가 필요할 거예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을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정보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독자적으로 선별하고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론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도레미파솔라시도’와 오선 체계, 평균율에 기반한 시창·청음 능력을 체화한 것이 마냥 좋은 일이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통용되는 이론 체계를 배웠기 때문에 서양음악을 언어처럼 구사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제는 그 체계가 유효한지도, 좋은지도 잘 모르겠어요. 이제는 음향학이나 음원 편집 방식으로만 여겨졌던 것들이 창작과 분석의 방법론으로 적극 다뤄지는 만큼, 어떤 지엽적 체계를 통해 음악 교육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음향적 논리에 대한 것으로부터 출발해 수많은 음악적 체계를 이해할 수 있는 더 기초적인 틀을 체화시키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하지만 또 소리가 음악의 전부는 아니니까, 출발점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헷갈리긴 합니다. 언제나 맹점이 있습니다. 오래 고민해봐야 할 문제인 것 같아요. 어쨌든 기존과는 다른 형태의 음악 통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서양음악의 논리를 배웠던 것처럼 사운드나 음향적 논리에 대한 훈련이 되어야 할 텐데 아직은 요원합니다. 루핑(looping) 같은 기본적인 용어도 아직은 모르는 사람이 너무나 많죠. 샘플링의 역사가 아주 오래됐는데도 불구하고 샘플링이 무엇인지도 하나하나 설명해야 하고요. 음악대학에 특강을 가면 이런 용어를 하나하나 다 설명하는 것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돼요. 그런데 그게 결코 개인의 잘못이 아니에요. 애초에 그런 걸 배울 기회가 없다는 게 문제에요. 단순히 음악에 대해 서술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힘든데, 어디서 어떤 용어를 사용해야 하는지, 어떤 용어가 가장 널리 통용되고 있는 것인지도 아직은 분명치 않아요. 규준도 없고요. 새로운 음악의 ABC가 필요한데 아직은 당장 어떤 어휘를 쓰냐부터 좀 어렵습니다.


디지털 리터러시와 관련해서 이야기를 조금 다른 방향으로 확장해보고 싶습니다. 저는 서양음악에서 악보 중심의 음악관, 문자적 성격의 기보 방식, 글 중심의 분석 용어(구와 절 등), 기승전결 등 서사구조와 닮아있는 긴장-해결의 구도, 기악의 역사에 배어있는 수사학의 논리, 음악적 ‘내러티브’라고 하는 것, 구문론적 논리 등, 이 모든 것이 모두 언어적인 패러다임과 연결된 것으로 느껴집니다. 오해인지도 모르겠지만, 아주 모범적인 서양음악의 구조라고 판단되었던 것이 논리적인 글의 구조와 아주 멀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네, 좋은 지적입니다.


하지만 음악에서 소위 ‘문해력’의 기준이 달라진다면 음악에서 구문론적 논리를 생각하는 것도 의미가 없겠죠. 서양음악의 맥락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작동했던 것이 바로 이 구문론적 논리였고, 이제는 이 논리가 흩어지고 있다고 믿는다면, 이제 서양음악의 구조, 음악적인 인과관계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구성되어 나갈까요?

흥미롭게도 여전히 많은 디지털 컨버전스 음악 작곡가들이 전통적인 구조를 활용하고 있죠. 분석을 해보면 반복과 대조, 연결구 같은 부분을 찾아볼 수 있어요. 이 음악이 아직도 ‘음악작품’으로 불릴 수 있는 이유는 아직도 그 심층에 전통적인 음악적 논리가 남아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긴장과 해결, A와 B, 제스처들 간의 유기적인 연결 등. 틀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진행 같지만, 이전처럼 구조를 계획했다는 점에서 과거와 일맥상통합니다. 다른 매체가 들어갔다뿐이지, 계속해서 과거의 구조적 틀이 활용된다는 점이 놀라웠어요. 시간 속에서 사람들에게 납득할 수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전통적 구조가 요구된다는 생각을 했죠.


서양음악에서 조성 체계가 무너지고 나서도 쉽사리 해체되지 않았던 대상이 바로 구조였다고 생각합니다.

반복과 대조, 통일성과 다양성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방금 이야기했듯이 음악은 시간예술이기 때문에 그조차도 없다면 의미화시킬 수 있는 기본적인 구조가 없어지지 않을까 싶어요. 근대 서양음악에서 그런 논리들을 ‘발견’했다고 봅니다. 마치 조성을 발견한 것처럼, 인간한테 가장 자연스럽게 느껴질 수 있고 지각될 수 있는 기본적인 구조를 발견해낸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전달하려면 그런 구조가 전제되어야 하는 듯합니다.


저는 발명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계속 가져가고 싶어요. 물론 발견일 수도 있지만 학습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 구조적인 논리가 없는 음악, 전례 없는 원리로 구성된 음악도 분명 있으니까요. 논문을 읽다가 “패턴과 임의성은 정보를 생성하기 위해 패턴을 만들고 없애고 계속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문장을 기록해두었어요. 패턴과 임의성의 교차가 새로운 기본 원칙이 될 수도 있을까, 하는 상상도 해봤습니다.

그래도 디지털 컨버전스 음악을 미디어 아트와 다른 ‘음악’으로 구분해줄 수 있는 척도가 바로 그런 통일성과 다양성 같은 음악적 구조인 것 같습니다. 결국 오랫동안 만들어져왔던 음악의 구조를 철저하게 계획해서 사용하고 있거든요.


구성(composition)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하고 공고하네요.

네. 거의 모든 작품이 그런 식의 구성을 취합니다. 악기도 사용하고요. 한 미학회에서 연구 내용을 발표했던 적이 있는데 돌아오는 반응 중 하나가, 결국 이 음악이 전통적인 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거였어요. 그러니까 왜 ‘컴포징’을 하냐는 거예요. 그렇지만 그 전개의 논리에서 변화를 주긴 했습니다. 도구와 재료가 달라지면 자연스레 예전과 완전히 같을 수는 없으니까요. 새로운 감각을 보여주려고도 하고요. 예를 들면 오스카 에스쿠데로(Óscar Escudero)의 <관습 #1>(Custom #1)이라는 음악은 사람들이 얼마나 산만하게 페이스북 안에서 왔다 갔다 하는지를 음악화했어요. 그 산만한 감각을 보여주기 위한 음악을 만든 경우는 없었죠. 굉장히 파편적인 지각, 충동적으로 움직이는 초조한 손놀림, 신경질적인 스크롤링, 그런 감각을 형상화하려고 했습니다. 디지털 미디어가 제공하는 감각을 음악으로 구현하려고 했고, 그러다 보면 분명 달라지는 부분이 생기기는 합니다. 

 

오스카 에스쿠데로, <관습 #1> (Custom #1, 2016)

 

논문 속 이 문장이 그 사례들의 지향점들을 보여주는 것 같더라고요. “그저 정교한 음악작품에 불과하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미디어나 음악 바깥에 있는 지향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서양음악에서는 내적 완결성과 자율성 논리가 워낙 공고했으니까, 반대로 어떤 층위로든 재현하거나 무언가를 표현하는 형태가 일종의 반작용처럼 나오는 것 같아요.

맞는 것 같아요. 최근 연구에서는 서양음악에서 재료가 종말했다고 합니다. 이제까지는 작품의 안쪽으로 향하면서 재료와 음향을 실험했지만, 이제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소리 바깥에 있던 제스처와 안무를 끌어들이면서 혼종화된 공간과 악기, 혼종화된 신체를 바라보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체계가 끝났기 때문에 바깥에서 메타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는 시대가 왔다는 거예요. 그래서 ‘inward’에서 ‘outward’로 향한다고 표현합니다. 또 어떤 학자는 이제 재료가 아니라 내용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개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해요. 그런 배경에서 개념음악이 나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개념음악이라는 단어가 화두에 오른 것은 꽤 최근의 일이죠. 개념예술 혹은 개념미술이 주목받았던 시기와 여전한 시차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전에도 유사한 실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보통 개념음악의 단초를 마련한 작곡가를 존 케이지(John Cage)나 앨빈 루시에르(Albin Lucier)로 보는데, 당시 전통적인 음악제도의 영향이 너무나 공고했기 때문에 음악학계보다 시각예술 같은 타 분야에서 활발하게 논의됐었죠.


그렇다면 청취의 태도가 궁금해지는데요. 개념을 지향하지만 여전히 기저엔 서양음악에서 형성해온 전통적인 구조가 아주 촘촘하게 짜여있다면, ‘구조적 청취’는 어떻게 될까요?

개념만을 살리기 위해서 때로는 ‘구성’을 포기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게 저 음악가들이 생각하는 ‘음악적인 것’이 되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음악처럼 들리게 만들었어야 했던 거죠. 직관적으로, 표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소스들을 사용하니까 그런 구조적 청취를 하지 않고서도 감각적으로 소통할 수 있지만, 알렉산더 슈베르트 같은 경우는 아주 작은 움직임 하나마저도 철저하게 시스템화해놓았어요. 그런 것을 고려했기 때문에 이 음악이 감상되고 향유되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 대상이 달라졌을지언정 ‘컴포징’이 되는 거예요. 어쩌면 그 구조를 파악하면서 들으려고 한다면 오히려 훨씬 더 전문화된 청취를 필요로 할지도 모르겠어요. 다만 구성하고 편집했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에릭 휘태커는 그래서 좋다고 보기 어려운 게, 안 한 척 하니까요. 뒤에서 어긋난 소리들은 삭제하고 영롱한 울림을 입히는 행위들이 어떻게 보면 예술적 사기처럼 느껴집니다. (웃음)


서양음악의 맥락 안에서 음악이라는 것의 영역, 최소 조건은 무엇이 될까요. ‘inward’에서 ‘outward’로 향하는 와중에도 음악이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음악의 유한성이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 이런 것이 궁금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컴포징’이 되는 것일까요? 여전히 소리가 근본 조건이 될까요? 존재론에 대한 물음이 쉽게 사라지질 않아요.

물론 소리가 중심이 되는 것이 맞긴 하지만, 그 유한성이라는 것이 ‘소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음악에 소리만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음악이 다른 것과 함께한 역사가 훨씬 더 길었으니까요. 음악이 다른 매체와 융합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봅니다. 오히려 여태 많이 간과되었던 것이 있다면, 그건 육체적인 측면인 것 같아요.


소리를 만들어내는 신체, 악기의 몸체, 이런 것들을 말씀하시는 거겠죠. 소리에 천착했던 시기가 지나고 그 육체적인 측면이 되돌아오고 있다면 공연, 악보, 소리, 신체, 시간, 공간 같은 개념들은 어떻게 재편될까요?

뭔가 막 사라진다기보다는 의미가 확장되거나 변화하겠죠. 다만 악보는 바뀔 것 같습니다. 악보가 없어도 큰 문제가 없으니까요. 공연은 계속되겠죠. 공연이 주는 굉장히 큰 매력이 있으니까. ‘작품’이라는 개념도 여전히 남아있기는 할 것 같아요. 다만 그 작품이라는 개념과 가장 가까운 원본 형태로 여겨지는 것이 이전엔 악보였다면 이제는 웹사이트에 아카이빙된 페이지, 혹은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동영상 링크가 되겠죠.


역사와 전통, 프로그램, 기술에 대한 관점, 구성논리, 존재론에 관한 질문들을 거쳐왔는데요, 마지막으로 사람의 문제를 살펴보고 싶습니다. 디지털 컨버전스의 영역은 누구나 평등하고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자유지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이런 흐름들을 주도하고 있는 사람들은 유럽 출신 작곡가들입니다. 물론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기는 하지만 이게 디지털이라는, 소위 그들 입장에서의 ‘미개척지’에서 서양음악의 이데올로기를 계속 확대 재생산하면서 무언가를 선점하고 있는 것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데요.

이 작곡가들도 결국 자기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의 음악을 보다 보면 꼭 ‘서양음악’의 사고방식이라기보다는, 서양에서 주입된 생각들이 음악으로 재생산되더라고요. 예를 들면 크라이들러의 <외주>(Fremdarbeit)라는 곡이 있습니다. 일견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태도처럼 보여요. 사람들이 여차하면 다 외주화시키고 중국에 외주를 주고 물건을 만드는데, 크라이들러도 같은 방식으로 작업을 했어요. 중국에 있는 어떤 한 작곡가에게 자기 곡처럼 만들어달라는 식으로 부탁을 해서 ‘작곡 외주’를 맡긴 것인데요. 그런 과정을 음악으로 보여준다는 측면에서는 정말 그런 시스템을 비판하는 것 같지만, 누군가 다시 이 작업을 비판하기를, 이건 동시에 기존의 편견을 고착화한다는 거예요. 예컨대 중국은 표절 잘하는 곳이고, 인도는 싼값에 프로그래밍을 잘하는 곳이라는 편견을 다시 한번 강조하게 되는 거죠. 크라이들러도 결국은 유럽 출신 작곡가니까, 본인은 비판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주입된 생각들을 다시 재생산하는 구조를 형성해버릴 수 있죠.


아마도 비슷한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을 음악학계가 거기에 또 발 빠르게 반응하며 그 음악의 가치를 학문으로 재생산하겠죠.

결국 아시아 음악학자들이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연구는 아시아 음악 안에만 있는 것일까요.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 구조를 뒤흔들기는 정말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저도 서양음악과 이를 바탕으로 한 음악학의 역사를 학습했으니까 제 눈에도 그게 흥미로워 보이겠지만, 제 사고는 유럽 출신 음악가/음악학자의 것보다 열화된 버전일 거예요. 그 시선을 똑같이 가질 수도 없고 그렇게 분석하는 법, 질문하는 법 등 여러 차원의 방법론까지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좋지도 않죠. 방법론을 형성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식으로 우회하고, 계속 제로 베이스에서 출발하면서 생각을 쌓아가려고는 하는데 그 관점을 만들어내는 것이 정말 까다롭습니다. 토대가 단단하지 않다는 느낌이에요. 내가 지금 서양음악을 연구하거나 서양음악에 관해 말한다고 했을 때 어떤 태도로 어디에서 말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는데 정말 모르겠어요. 주변인들은 답을 알고 있을 거란 마음으로 가까운 곳에 많이 다녀보고 있어요. 어쨌든 저의 시선으로, 이곳의 역사를 바탕으로, 지금 유효한 생각을 전개시키고 싶은데… 어렵습니다.

그런 새로운 생각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음악이 나와야 그걸 뒤따라갈 수 있을 텐데, 그간 한국에서는 그런 음악이 많지 않았잖아요. 저는 이 사회가 그런 걸 쉽게 용인하는 분위기도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개념음악이라고 했을 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조건이 무엇이었을지를 떠올려보게 돼요. 크라이들러의 <간접광고>는 7만 곡을 인용하는데, 누가 인용을 그 정도로 확실하게 했겠어요. 아무도 못 하죠.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으려면 사회에서 제약이 없어야 하는데, 당장 예술의전당만 해도 공연할 때 너무 제약이 많잖아요. 더럽혀도 안 되고, 뭘 던져도 안 되고, 피아노에 흠집을 내도 안 되고요. 그러니까 그저 그런 음악밖에 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 전체의 환경이 문제일 거예요.


음악에 대한 고착화된 상징들이 너무 영향력이 큰 것 같아요.

음악학자의 문제도 커요. 가차 없이 비판할 수 있는 건데, 그러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는 분위기니까요.


저는 음악학자는 아니지만, 비판이라는 걸 생각하면 참 어려워요. 제가 가진 좋고 나쁨의 기준이 과연 무엇인지, 어떤 과정으로 형성된 것인지, 비판을 한다면 무엇을 위한 비판인지, 이런 질문 때문인데 아직 답을 못 찾았어요. 저만 모르나 싶어서 답답하기도 합니다. 멀리 돌아왔지만… 다시 이 ‘디지털 컨버전스 음악’으로 돌아가서 마지막으로 인간과 이 음악의 관계를 짚어보고 싶어요. 논문에서는 이 음악이 “인간의 지각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미시적인 음향세계를 들려준다는 데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표현하기도 하셨는데요. 음악이 이렇게 ‘인간의 지각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미시적인 음향세계’를 들려줄 수 있는 대상으로 바뀌고 있다면 인간은 앞으로 어떻게 바뀔까요?

향후 인간과 기계의 ‘공진화’(共進化)는 더 강화될 것이라 봅니다. 사람들에게 기계의 시선을 체득할 필요가 있다고 하잖아요. 그걸 인간과 비인간의 공진화라고 해요. 인간의 지각으로 도달할 수 없는 미시적 음향세계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음악이 어떻게 기계적인 감각과 함께하면서 변화되는지를 보여주는 거죠. 그 과정을 조금 더 낱낱이 추적할 필요가 있다고 느낍니다. 한편 마셜 매클루언은 ‘확장과 절단’이라는 말로 이런 상황을 표현하는데, 인간은 기계 때문에 확장도 되지만 무언가 절단되기도 한다는 거예요.


분명 사라지는 감각이 있습니다.

매클루언은 나르시스의 비유를 들어 설명해요. 나르시스는 자기 얼굴을 보게 됐지만 그 물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결국 물에 빠져 죽습니다. 그게 절단이에요. 저도 모든 기술이라는 건 확장과 절단이라는 모순된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고 봅니다. 연주자들이 소리를 미리 듣고 연주 타이밍을 파악하기 위한 ‘클릭 트랙’이라는 것도 그래요. 가령 니콜 리제의 <히치콕 에튀드>에서는 기계와 인간의 공진화를 잘 보여주는데, 이 곡에서는 피아니스트가 클릭 트랙을 끼고 영상과 협업하며 연주하거든요. 연주자가 영상의 기계적 호흡에 맞춰서 연주하는데 연습과정부터 엄청난 시행착오를 겪었다고 하더군요. 기계적인 감각을 학습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웠던 거죠. 이제는 음악에서도 알게 모르게 기계와 공진화되는 양상이 많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그런 걸 표면적으로 감지할 수 있게 된 수준이라면 그 이면에는 훨씬 더 많겠죠. 모를 뿐인 것 같아요.

모든 게 기계적 논리에 따라 흘러가는 것 같아요. 제 감각도 공진화되는 것 같은데요.


‘진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글쎄요.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겠죠. 인간이 진화하는 게 아니라는 입장도 있잖아요. 나중에는 음악을 ‘구성’을 해서 복잡한 구조를 형성한다는 것 자체를 정말 놀라워할 수도 있어요. 아무튼 이미 많은 기계가 신체에 끼어들었기 때문에 공진화의 감각이 안 생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디지털 리터러시라는 말 자체가 그걸 환경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뜻한다고 봐요. 공기처럼. 앞으로 공진화의 양상은 여러 갈래로 나타나겠죠.



음악학자 원유선 | scentdiary@gmail.com
이화여대에서 작곡과 철학을 공부하고 서울대학교에서 <디지털 컨버전스 음악 연구>를 주제로 2019년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디지털로 변환된 세계가 아날로그 세계와 맞물리며 나타나는 음악적 현상을 끊임없이 추적하고 있다. 주요연구로 <들리는 음악에서 들리지 않는 음악으로: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개념음악에 관한 소고>(2020)와 <21세기 현대음악에 나타난 디지털적 인용>(2020), <디지털 복제시대의 예술음악 듣기>(2016) 등이 있다. 현재 이화여대, 경희대, 제주대, 광주교대에서 강의하면서, 서울대학교 연구처 융복합 프로젝트 “음악에서의 AI와 포스트휴머니즘 미학”의 보조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신예슬 | shinyeasul@gmail.com
음악학과 현대음악을 공부했다. 서양음악의 전제와 규칙을 비판적으로 재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