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TS 예술혁명』 표지 (파레시아)
팬덤 비평은 가능한가?
지난 3월,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열렸던 대중음악 비평 컨퍼런스 <한 줄도 쓰지 않았어요>에서 아이돌로지의 미묘, 힙합엘이의 김정원과 나눴던 대담 중 관객으로부터 들었던 질문이다. 아이돌 음악을 비평하는 것에 있어서 ‘비평가’의 입장이 아닌 ‘팬’의 입장에서 해당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질문.
생각해보면 ‘팬덤’과 ‘비평’이라는 두 단어만큼 서로 멀리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대중음악 비평이 음악에 대한 ‘전긍정’을 기반으로 하는 팬의 문법과 거리를 두고, 그렇게 ‘거리를 둔’다는 것 자체를 자신의 정당화 기제로 삼았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여기에 한국의 경우, 음악 팬덤의 대부분을 점유한 장르인 아이돌 팝에 대해 유달리 적대적이었던 것이 두 단어 사이의 간극을 벌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 ‘실력’에 대한 일차원적 비난에서 아도르노적 사상에 기반한 문화 산업 비판에 이르기까지 아이돌 팝은 한국 대중음악 비평이 먹잇감으로 삼았던 가장 대표적인 장르였고, 자연히 팬덤에 대한 인식 역시 단편적인 무시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질문을 들었을 때나 지금이나, 나는 그것이 불가능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설사 팬이란 정체성, 혹은 팬덤이란 집단이 아티스트와 음악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보다는 애정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해도, 그 애정에서 비롯되는 정보 수집 및 소화 능력과 활동량, 다양한 채널을 통한 해석의 가능성은 기존의 평론가가 절대 쟁취할 수 없는 영역에 도달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역사적으로 많은 평론가의 작업 역시 비판 못지않게 애정에 기초해 있었다는 것을 상기해 보면 – 레스터 뱅스(Lester Bangs)가 [Horses]에 보낸 불같이 뜨거운 상찬을 보라 – 아이돌 팬덤의 애정이 비평에 지장이 될 거라는 가정은 지레짐작에 불과하다.
다만 그러한 팬덤 비평이 어떤 형태로 드러날지에 대해서는 그 질문을 들었을 당시까진 상상해 보지 못했다. 다행히도 올해 4월, 그러한 의문을 충족시켜 줄 만한 책이 나타났다. 『BTS 예술혁명』. “방탄소년단으로 인해 일어나고 있는 사회, 문화, 정치, 미학적 사태를 ‘방탄 현상’으로 명명하고, 이를 들뢰즈와 벤야민의 철학 개념과 예술이론으로 자세하게 풀어”내는 야심찬 기획. 이 책이 팬덤 비평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예시로 기능할 수 있을까?
거대하게
“방탄소년단은 아이돌 그룹을 넘어 오늘날 사회 구조, 미디어, 예술형식 등에서 일어나고 있는 근본적인 구조 변화를 보여준다. 이 변화에는 기존의 위계질서와 권력 관계를 침식하며 사회 전체를 뒤바꾸는 혁명의 함의까지 발견된다. 2016~2017년의 촛불혁명이 우리나라에 국한된 정치 변화를 가져왔다면 방탄으로 인해 초래되고 있는 변화는 전지구적인 규모의 포괄적이고 근본적인 변혁을 징후적으로 표현한다.”
-『BTS 예술혁명』, p.7-8
책의 첫 단락부터 거대한 의미부여를 통해 시작되는 『BTS 예술혁명』은 크게 두 가지 흐름을 따라 방탄소년단이 이룩한 업적(책 내에서 이는 ‘방탄현상’으로 명명된다)을 분석한다. 하나는 방탄소년단이 음악을 통해 보내는 비판적이고 저항적인 메시지와 그에 대한 방탄소년단의 팬덤 아미ARMY의 수평적인 상호작용과 연대를 통해 만들어지는 위계질서의 해체라는 ‘리좀rhizome적 혁명’, 다른 하나는 방탄소년단이 온라인을 통해 공개하는 다양한 영상 – 뮤직비디오, 쇼트 필름, 하이라이트 릴, 트레일러 – 이 발생시키는 상호참조적 의미 생성과 네트워크-이미지라는 새로운 예술 형식의 가능성이다.
저자 이지영은 단일한 중심이 없는 수평적 연결로 이루어진 체계를 뜻하는 리좀과 수없이 펼쳐진 다양한 영상이 상호접속하고 연결하며 새롭고 확장된 의미를 생성해내는 배치인 네트워크-이미지라는 개념을 방탄현상과 연결시키며(둘 모두 들뢰즈의 혹은 들뢰즈로부터 비롯된 개념이다) 이러한 사회∙문화적 변화와 예술형식적 변화가 “세상의 근본적인 변화를 지진계처럼 포착”(p.21)한다고 보고, “정치 체제의 변화와 직접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음악적 현상이 궁극적으로는 사회의 구조적 변화와 맞물려”(p.23) 있다고 해석한다.
이건 너무… 지나치게 거대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스케일 이전에, 방탄소년단이 이룩한 성취에 어떻게든 자신만의 의미를 덧붙이고 싶어하는 식자들의 시도는 일간지 오피니언 란에서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그리고 그것은 대개 ‘흙수저’, ‘다양성’, ‘청춘’ 같은 키워드로 점철된 진부함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러한 현상은 방탄소년단만이 아닌 일정 수준 이상의 상업적 성과를 거둔 대부분의 아티스트에게 나타나며, 그 논의의 깊이가 특별히 낮은 수준에만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다. 라디오헤드(Radiohead)가 그렇고,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가 그렇듯이.
다만 『BTS 예술혁명』은 방탄소년단을 다룬, 어쩌면 더 나아가 K-Pop이나 아이돌을 다룬 일련의 ‘철학적’ 텍스트 중 분명한 깊이를 보여주면서 그 자신을 차별화한다. 리좀 개념을 빌려 온 위계적 질서의 해체 및 수평적인 구조로의 이행은 아이돌-팬덤 구조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설명틀이며, 공유가치를 기반으로 한 네트워크-이미지라는 새로운 개념의 창안 역시 파생적으로 확장하는 아이돌의 영상을 설명하는 새로운 미학적 기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아이돌이라는 ‘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이지영은 지금까지의 대중음악 평론이 사용해 왔던 렌즈와는 전혀 다른 지점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이 점은 분명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BTS 예술혁명』 전반에서 드러나는 방탄소년단의 팬으로서의 애정, 그리고 그러한 애정을 바탕으로 한 팬들의 활동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이 책이 다른 비평과 구분되는 또 다른 지점이기도 하다. “수시로 트위터에 ‘방탄소년단 Tweeted:…’ 혹은 ‘@BTS_twt:…’라고 알림이 뜨니 실시간으로 그들이 말을 걸어오는 듯하다.” (p.60) 같은 묘사는 방탄소년단이 만들어내는 수평적 판타지를 분석하는 밑바탕이 되는 팬으로서의 경험이고, 2017년과 2018년에 걸쳐 미국 시장에서 미국 아미가 펼친 일련의 캠페인(그들은 지역 라디오 방송 DJ에게 연락을 취하기 위한 매뉴얼을 만들고, 월마트와 타겟 등 대형 마트에 판매를 성사시키는 등 대단히 ‘미국 음악 시장에 현지화된’ 팬덤 조직 활동을 전개한다)을 설명하는 부분은 이들과 동질감을 지니고 있는 팬이 아니라면 상세하게 파악하기 힘든 부분이다.
역사의 초월, 혹은 거세
하지만 그러한 긍정적인 부분과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BTS 예술혁명』이 드러내는 한계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방탄소년단의 모든 활동에 대해 완전히 긍정하는 사람을 제외하면 『BTS 예술혁명』가 펼치는 논지나 근거에서 허점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몇 가지 예시를 들어 보자. 『BTS 예술혁명』은 방탄소년단과 그 팬덤 아미의 ‘혁명’이 권력관계에서 피지배 위치에 있는 소수자에게 힘을 싣는 소수-생성devenir-minoritaire을 거듭하고 방탄소년단이 권력 질서에서 ‘소수자’에 위치한다고 분석하는데(p.107-111, 저자는 그 근거로 방탄소년단이 제3세계 한국 출신이자 자본과 권력에서 배제된 중소 기획사 출신이라는 점을 든다), 그렇다면 방탄소년단의 가사와 활동에서 비치는 여성혐오적 지점과 그 문제를 공론화한 팬에게 가해지는 사이버불링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또한, 방탄소년단의 음악으로부터 사회비판과 규범 해체적 부친살해의 모티브를 읽어내는 것이 왜 그들이 창작한 ‘음악’에 대한 총체적 해제가 아닌 가사에 대한 분석에만 한정되어 있는가? “노래는 가사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p.31)라는 전제를 달고 있긴 하지만, 나는 가사라는 요소가 가장 ‘간편한’ 분석 단위이기 때문에 이것만을 활용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BTS 예술혁명』 33쪽에 등장한 표. “방탄의 노래에 사회적 메시지가 강하게 담겨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주장을 위해 만들어진 단어 빅데이터 분석이지만, 내가 보기에 이는 ‘방탄소년단이 사회 문제를 직설적으로 다룬다’의 논거에 가깝다. 밥 딜런Bob Dylan이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는 도시와 건축에 대한 묘사였는데, 그가 건물에 관한 노래로 유명한 건 아니지 않은가?
이러한 문제점의 목록은 꽤 길지만 이 글에서 모두 다룰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삐걱거리는 서술을 통해 현현시킨 방탄소년단, 그리고 아미의 모습이 어떤 초월적인 존재로 비쳐진다는 것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단순히 그들이 함께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며 억압적인 세계에 맞서 싸운다는 부분에서만 초월적인 것이 아니다. 『BTS 예술혁명』 안에서 이들은 마치 지금까지 세상에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역사를 초월해 지금 이 순간에 구원처럼 내려온 것처럼 묘사된다. 그것은 책 내에서 방탄소년단과 아미를 제외한 다른 아이돌이나 팬덤, 혹은 음악 산업의 구조가 어쩐지 으스스하게 느껴질 정도로 배제되어 있는 부분과 연결된다.
물론 그러한 역사의 초월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닌 선택적 거세에 가깝다. “방탄이 미국 음악 시장에서 성공한 것은… 언어로 대변되는 문화적 헤게모니 변혁의 신호탄이라고도 볼 수 있다”(p.81)라는 자신만만한 선언은, ‘난 내가 베트남계인 게 싫다. 내가 한국인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베트남계 미국인 아미의 말 앞에서 무력해진다.1 단순히 규모가 커진 것뿐으로 치부할 수는 없지만, 미국 아미가 수행하는 활력 넘치는 팬덤 활동의 상당 부분은 『팬덤이거나 빠순이거나』에서 음악평론가 이민희가 묘사한 한국 1세대 및 2세대 아이돌 팬덤의 그것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무엇보다도, 서태지와 아이들부터 이어진 ‘사회비판적 대중음악’의 전통과 영미권 팝의 트렌드, 아이돌 산업 및 미학이 성취한 산업적 토대로부터 방탄소년단이란 그룹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방탄소년단과 아미가 혁명을 이루는 이 초월적 세계가 고작 한 발자국의 맥락을 산입하는 순간 위태로워진다는 것은, 역으로 그 기반이 얼마나 허약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반증하고 있다.
저자가 이를 인식하지 못해서 그 (메워지지 않는) 빈틈을 들뢰즈의 이론으로 채웠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설명의 양태는 방탄소년단이 [LOVE YOURSELF] 연작을 통해 구축한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이라는 일종의 이데올로기, 세계와의 교류로부터 형성되는 자아가 아닌 세계와의 단절을 통해 얻어지는 초월적인 깨달음이라는 고답적인(하지만 대중문화에서 수많은 방식으로 변주되어 왔던) 태도와 어쩐지 닮아 있다. 『BTS 예술혁명』은 끊임없이 방탄소년단이란 아티스트와 그 창작물, 그리고 팬덤의 활동에 대해서 끊임없이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려고 시도하지만, 그것은 대중문화의 역사적 맥락에 방탄소년단을 위치시키는 것이 아닌 그 역사적 맥락을 초월, 혹은 무시한 영역으로 방탄소년단을 이끄는 것에 가깝다. 그 시도가 초래하는 결과는 고립이다.
객관성이란 외피
앞서 설명한 빈틈과 함께 『BTS 예술혁명』이 덜컹거리는 또 다른 부분은 책의 구성에 있다. 1부 “BTS가 만든 혁명”과 2부 “새로운 예술 형식으로서 네트워크-이미지”를 통해 ‘방탄현상’을 설명한 책은 맨 마지막 부분에 부록으로서 “들뢰즈의 시간-이미지 너머: 네트워크-이미지”라는, 방탄소년단과의 연관성이 거의 완전히 제거된 들뢰즈 매체 철학에 대한 첨가적 논의를 진행한다.
“이론적이고 전문적인 내용이 전개되는 까닭에 부록이라는 형식으로 분리시켰”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지만(p. 26), 내가 흥미롭게 느끼는 부분은 분명히 서로 연동되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본문과 부록의 논조가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연대’와 ‘혁명’, ‘변화’와 ‘공유’ 등의 키워드를 내세우며 뜨거운 논리를 설파하는 본문에서 느껴지는 저자의 모습은 팬덤 내 구성원으로서 방탄소년단의 활동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하는 팬의 모습 그 자체다. 반면, 들뢰즈와 벤야민의 논의에서 출발해 디지털 및 네트워크화 시대 영상 예술에 대한 새로운 함의를 제기하는 저자에게서 냉철한 학자의 모습 이외의 것을 찾기는 힘들다.
이렇게 이질적으로 공존하는 두 개의 논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저자는 왜, ‘팬’의 입장에 서서 전개할 수 있는 논의에 ‘이론가’로서의 정체성을 끌어들이며 둘 사이의 충돌을 수습하지 않는 것일까? 저자의 출발점이 팬이 아닌 이론가이기에 그러한 현상이 발생한다는 설명이 가장 자연스럽겠지만, 그것만으로는 『BTS 예술혁명』에서 숨길 수 없이 엿보이는 팬으로서의 자의식이 설명되지 않는다.
비평에 있어서의 객관성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요인 중 하나는 ‘거리 두기’일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존재에 있어서만이 아닌, 자신이 선호하거나 지지하는 존재에 대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팬의 입장이라도 마찬가지다. 좋아하는 아티스트에 대한 자신의 논의를 풀어나가는 데 있어서 타인의 납득을 확보할 수 있는 객관성을 담지하기 위해서는 관찰과 숙고의 영역을 확보할 수 있는 거리 두기의 과정이 필수적이다. “심장을 두드리는 비트와 눈을 의심하게 하는 압도적인 퍼포먼스” (p.56)처럼 팬이 아니라면 쓸 수 없는 노골적인 표현이 등장하면서도, 계속해서 이론가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BTS 예술혁명』에서 이어지는 건 저자가 충돌을 감수하고서라도 객관성을 쟁취하기 위한 거리 두기를 시도했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여기서 어떤 위화감이 발생한다. 그 광경은 왜 객관성을 ‘쟁취’하려는 것처럼 느껴지는가? 객관성은 굳이 ‘전시’할 필요 없이 대상에 대한 거리를 두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정보와 가치를 예민하게 탐색할 때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요소가 아닌가? 논지의 무리한 초월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BTS 예술혁명』 속에서, 객관성은 결과로서 획득된다기보다는 수단으로서 복무하는 형태로 작용하며 주장의 공허함을 확대시킨다. 화려한 이론과 개념의 활용이 지속될수록, 그것은 객관성의 확보보다는 방탄소년단과 팬덤의 활동을 정당화해 줄 객관성이라는 ‘외피’로 작용하면서 힘을 잃는다.
어쩌면 팬이라는 정체성, 동경하는 아티스트에 대해 다른 누구보다도 거리를 좁히고 싶어하는, 아티스트와의 ‘합일’을 추구하는 정체성이 존재하는 한, ‘거리 두기’의 가능성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정체성에 대해서 의문을 던지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팬 각자가 생각하는 방탄소년단의 훌륭함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팬덤의 ‘자발성’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 설사 ‘의심’이라는 부정적인 형태를 취하지 않더라도,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사실, 긍정이나 부정 같은 입장의 차이가 아닌 거리를 벌림으로서 얻을 수 있는 대상에 대한 포괄적 시선,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질문이 비평이 지향하는 ‘객관성’을 진정으로 완성시키는 요인일 것이다.
그 대신, 『BTS 예술혁명』은 방탄소년단의 팬덤이 자신들의 행동에 부여할 수 있는 의미라는 답을, 그리고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론과 객관성이라는 표피를 제공한다. 그것은 치열하기보단 편리하고, 광대하기보단 익숙하다. 여기에는 명쾌함이 있지만, 풍부함은 없다. 그리고 나는, 좀 더 나은 질문을 제공해 줄 또 다른 팬덤 비평을 기다린다.
정구원 | lacelet@gmail.com
음악웹진 [weiv] 편집장,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대중음악을 듣고 그에 대해 쓰고 있으며, 대중음악의 범위와 효과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각주
- “Fake Love”에 대한 조슈아 민수 김Joshua Minsoo Kim의 <더 싱글즈 주크박스 (The Singles Jukebox)> 단평은 K-Pop이 수행하는 신문화제국주의에 대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리뷰 중 일부의 번역을 옮긴다. “몇 개월 전 방탄소년단에 대해 내 학생과 흥미로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녀의 여동생은 방탄에 완전히 빠져 있다고 했다. 하지만 걱정되는 부분은, 여동생이 수차례 이렇게 말했다는 점이다: ‘난 베트남계인 게 싫어’ ‘내가 한국인이었으면 좋겠어’ (…)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나는 내가 얼마나 근시안적이었는지 깨달았다. K-Pop의 계속되는 성공에 취했던 나는, 그것이 나 자신에 대한 자랑스러움에 미치는 영향이 반드시 다른 모든 아시아인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건 아니라는 걸 잊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