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테로포니의 독자라면 벨라(bela)라는 이름이 익숙할 것이다. 제작년 12월, 신도시에서의 연말/새해 파티에 참여하기 위해 나는 벨라에게 디제잉을 배웠다. 그 당시 글에는 쓰지 않았지만 그의 디제잉, 그리고 프로듀서로서 내놓은 작업물들을 들으며 내가 하고 싶은 디제잉이 그의 음악과 맞닿아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그에게 수업을 요청했고, 그는 흔쾌히 승낙했다. 즐거운 한 달이 마무리된 뒤, 언젠가 그의 인터뷰를 헤테로포니에 싣겠다는 다짐을 새겼다.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나고, 새로운 EP [Guidelines]를 내놓은 그와 긴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얻었다.
–
제가 벨라 님을 처음 알게 된 게 2017년 즈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는 무드브로큰(MDBRKN)이란 이름의 프로듀서로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 이후 DJ로도 활동하시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활동하시는 모습을 보게 되었어요. 어떻게 음악 활동을 시작하시게 되었는지 그 계기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 경험을 공유하면 당시의 저 같은 상황을 겪고 있든 지금의 다른 분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해요. 대학교 1학년 때 두 개 동아리에 들었었는데, 일단 제 정체성과 관련된 퀴어 동아리, 그리고 컴퓨터 작곡 동아리 활동을 했었습니다. 그 당시가 2015년이었는데, 동아리에 퀴어 퍼레이드 뒷풀이 파티 초대장이 왔어요. 다소유에서 하는 《엉덩이 큰 잔치》라는 이벤트더라구요. 동아리 회장 선배하고 친구들이랑 갔는데, 플래시 플러드 달링스(Flash Flood Darlings)랑 야마가타 트윅스터, 코스모스 슈퍼스타, 키라라가 라인업에 있었어요.

《엉덩이 큰 잔치》 포스터
키라라, 디제이 진호 타임에 회장 선배는 먼저 가고 저랑 키라라의 친구들만 남았던 것 같은데, 제일 핫한 타임이잖아요. 이 때 제가 미친듯이 춤을 춘 거예요. 동아리 친구가 슬쩍슬쩍 중앙으로 막 밀치길래. (웃음) 사람들이 막 이태원에 펄스에서 굴러먹던 애 같다고 그랬어요. 그 때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춘 날이었어요. 저는 전자음악을 좋아하던 사람이고, 그 음악에 맞춰서 방에서나 혼자 춤을 췄지 퀴어들 앞에서 그렇게 춤춰본 적이 없거든요. 굉장한 해방감이 있었죠.
근데 키라라가 파티 끝나고 짐을 싸면서 개인레슨 공지를 한 거에요. (웃음) 그래서 덥썩 하겠다고 했죠. 지금 돌이켜보면 퀴퍼 뒷풀이에서 전자음악 개인레슨 공지를 한다는 게 좀 웃기기도 해요. 저는 그걸 또 신청을 했고… (웃음) 암튼 그래서 냉큼 배웠어요. 퀴어 대 퀴어로 배울 수 있다, 그런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요. 전자음악에 집중해서 배우는 거라, 그런 ‘퀴어 대 퀴어’가 엄청 의미가 있는가 하면 또 모르겠지만 그래도요.
그래서 키라라한테 에이블턴 라이브(Ableton Live)1를 배우고, 학교 작곡동아리에 테크노 좋아하는 분이 계셔서 벌트(Vurt)도 몇 번 다녔어요. 그리고 학과에서 상상마당에 브이제잉(VJing) 레슨을 받고 싶다는 언니가 있어서 따라서 밴드 무토(MUTO)의 파펑크(Parpunk) 님이 가르치는 뷰직(VIEWZIC) 레슨을 등록했다가, 비슷한 강좌 중에 하임(hahim) 선생님이 하시는 강좌도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이 당시가 키라라 선생님 레슨을 듣고 6개월 정도 지난 뒤였는데, 중급 강의를 찾아다니다가 이 레슨을 듣게 됐어요. 그러면서 장영재 님이나 다미라트, 와트엠(WATMM)도 레슨 뒤풀이를 하면서 알게 되었죠.
지금은 학비나 생활비 생각하면 그렇게 못 돌아다니는데, 당시에는 경제 관념이 없이 돈을 막 쓰면서 다녔어요. (웃음) 그러다가 나중에 힘들었죠. 한 학기 동안 학교 앞에서 살면서 주 49시간 일하고 16학점 들으면서 살다가 몸이 다 망가졌어요. 그래서 1년 휴학하고, 아르바이트 투잡 뛰고, 군대 들어가서 적금을 부으면서 통장을 다시 채웠는데… 아무튼 그러기 전까지는 다 썼어요. 이게 다 투자다, 이런 생각으로요. 그 땐 영기획 아티스트 공연들도 다니고, 닻올림도 가보고, 콩부(CONG VU) 님이 풋워크(footwork) 틀던 시절의 신도시에서 열리던 《NO CLUB》도 다녀보고, 스트레인지 프룻에 전자양 같은 인디 밴드 공연도 보러 가고, 그런 식으로 인디 씬을 돌았어요. 키라라, 동아리 사람들, 등등 모든 방면에서 영향을 받으면서 그런 곳을 다녔고, 그러면서 전자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다만 그렇게 돌아다니는 것과는 별개로 제가 좋아하는 음악은 따로 있으니까, 벨라 말고 MDBRKN이란 이름으로 그라임(grime)이나 풋워크 비슷한 트랙들을 만들고 있었어요. 그 때가 한창 알바하느라 정신 없던 땐데, 그래도 돈이 있으니까 주말에는 공연을 계속 다녔죠. 2016년 7월에 소피(SOPHIE)가 SKRT에 내한공연을 왔을 때라든지. 그리고 11월에 제가 정말 좋아하던 제일린(Jlin)이 케익샵으로 내한을 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가 보니까 트위터에서 연락하던, 그리고 제가 좋아하던 음악가인 킴 케이트(Kim Kate) 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 당시에는 아직 몰랐었던 조한나 님, 조유리 님, 그런 분들을 만나게 됐어요.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단자 건즈(Danja Gunz) 님이나 콩부 님도 있었던 것 같고.
아무튼 그 분들이 케익샵 앞에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고, 저는 킴 케이트 님 빼고 아무도 모르니까 인사를 하러 다가갔죠. 근데 다들 놀라더라구요. 나중에 들어 보니까 그 분들이 제가 프리키모(Frikimo) 님이랑 너무 닮아서 헷갈렸다고 그러는 거에요. (웃음) 아무튼 그런 우연한 계기로 해서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게 되었어요. 노바디 노즈(NBDKNW)가 주최하는 《Pres. Delta》 같은 파티에도 다녔고요.

《SHADE X FEMME 프라이드 애프터 파티》 포스터
그렇게 다니다 보니 이태원에서 만난 친구들이 저보고 디제잉을 하라고 했어요. 2017년도 케익샵에서 쉐이드(SHADE) 주최로 열린 프라이드 애프터파티의 기회가 생겼죠. 친구인 넷 갈라(NET GALA)랑 씨씨(seasee)가 전부 다 쉐이드 멤버였는데, 둘 다 저한테 디제잉 배워서 하라고 하더라고요. 그 당시 군대 가기 직전이었고 시간이 굉장히 촉박했는데, 씨씨 언니한테 2주만에 배워서 무대에 올랐어요. 프로그램 깔고 몇 번 디제잉 하고 CDJ 돌렸더니 공연 당일이 된 거에요. (웃음) 배우러 갔더니 씨씨 언니가 완전 디제이 양성소더라구요. 아조(Ajo) 님하고 페어리 웻 애스(Fairy Wet Ass)도 그 당시에 씨씨 님한테 배우고 있었어요. 돌이켜보면 어떻게 제가 그 가운데서 틀게 됐지 싶기도 해요. (웃음)
공연 날에 디제잉하기 어려운 곡들을 좀 많이 들고 갔어요. 완전 이상한 거. 한국 프라이드 애프터 파티에서 암네시아 스캐너(Amnesia Scanner)랑 풋워크 틀기. 160 BPM이 넘어가는 오프닝 디제이, 바로 저! (웃음) 마지막 트랙이 160 BPM 이상이었는데, 시카고 출신의 트랜스젠더 디제이 힘 헌(HIM HUN)의 풋워크/테크노 트랙 위에 그 당시에는 로프트(loft)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영국의 트랜스젠더 프로듀서 아야(aya)의 아리아나 그란데(Ariana Grande) “Into You” 앰비언트 에디트 버전을 얹어서 틀었어요. 이유가 있는 선곡이었고, 틀고 싶어서 틀었던 트랙들이었어요. 그렇지만 분명 뒤에서 누군가는 혀를 끌끌 차고 있지 않았을까요. 프라이드 애프터파티 날에 오프닝부터 와장창하고, 사람들 다 도망간다고. (웃음) 지금도 틀고 싶은 대로 트는 편인데 그래서 섭외가 잘 안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가끔 해요. 박다함 씨만 저를 섭외하고.
아무튼 이게 2015년 여름부터 2017년 여름까지 있었던 일입니다. 그 당시에는 MDBRKN이라는 이름이었지만, 벨라라는 이름이 훨씬 더 마음에 들어요. ‘산통 깨는 사람’이 클럽에서 뭘 할 거야. (웃음)
그렇다면 그 전에는 어떤 음악을 좋아하셨는지, 혹시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키라라 레슨을 듣기 전까지는, 내가 무슨 음악을 어떻게 좋아한다, 이런 관념도 없었고 그냥 비평 매체를 찾아다니면서 조금씩 조금씩 듣는 식이었어요. 그러다 제 취향에 맞다 싶으면 계속 듣는 거죠. 그래서 그때까지는 팝을 많이 들었는데, 예를 들면 제이미 xx(Jamie xx), 제임스 블레이크(James Blake), 베리얼(Burial) 같은… ‘스탠다드 피치포크(Pitchfork)’ 친구들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는 전혀 몰랐죠. 왜냐하면 다른 것도 굉장히 많이, 얕고 넓게 듣고 있었으니까.
벨라 님의 음악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생각해봤을 때 저는 내밀한 소리와 빠르고 격렬한 소리를 모두 투사할 수 있는 전자음악가라는 인상을 가장 먼저 떠올려요. 다만 그것이 ‘양극단’에서 대립하는 특성이 아니라, 어떤 하나의 출발점에서 시작되어 표현 방식만을 다르게 한 결과물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렇게 다양한 사운드를 활용하시는 이유, 그리고 그 과정에서 느끼시는 바가 어떻게 되나요?
이 질문을 받고 생각을 해 봤는데,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 생각해 봐도 출발점이라는 건 딱히 없는 것 같아요. 앞에서 말한 것처럼 굉장히 다양한 영향을 받았으니까요. 초등학교 때를 떠올려 보면… 일단 마이 케미컬 로맨스(My Chemical Romance) 보컬의 미모에 반해서 이모(Emo)에 빠져 살았었다가 (웃음) 마릴린 맨슨(Marilyn Manson)의 폭력적 이미지에도 반했어요. 그 당시 일산 주엽 쪽에 캐롤라인 음반사라고 굉장히 좋은 레코드 샵이 있었는데, 중학교 2학년 때 거기 주인분한테 마릴린 맨슨 레코드가 있냐고 물어봤었어요. 있었는데, 당연히 19금 딱지가 붙어 있었죠. 근데 주인 아주머니가 ‘너 이런 거 좋아하니?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Rage Against The Machine)도 들어봐. 완전 시원하게 지르더라.’ 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저는 그런 마초적인 거 싫어해요’ 하고 마릴린 맨슨만 사서 나왔어요. (웃음) 그 당시 맨슨한테는 뭔가 퀴어적인 이미지, 드랙(drag)적인 것이 있었으니까요. 글램 록(Glam rock)과는 또 다른 무언가가. 그런 메이크업에 반했었죠.
그런 비슷한 걸 찾다가 고스(Goth)에 살짝 발을 담그고, 거기에서 인더스트리얼(Industrial) 장르로 빠지기도 하고, 정말 뽕짝같은 것도 찾아 듣고. 동시에 라디오헤드(Radiohead) 앨범도 사 모았고요. [In Rainbows] 같은 것도 캐롤라인 음반사에서 샀었네요. 그러는 와중에도 팝이나 R&B, EDM, 인디 록 같은 것도 조금씩 챙겨 들었어요.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얕게, 넓게 들은 셈인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희 가정 환경에서 음악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경제적 불안이 계속 있었어요. 음악을 엄청 파고들면서 마음을 다 뺏길 여유가 없었던 거죠. 그렇지만 고등학교 올라가서 아르카(Arca)의 [&&&&&]에 빠졌는데, 이 레코드는 뭔가 다른 IDM이나 실험적 전자음악과는 다르게 신체에 대한 억압이 표출되는 것 같았어요. 음악 자체에 뭔가 액체가 흐르는 것 같은 웡키(wonky)한 질감이 있었고요. 그런 부분에 반하면서 지평이 넓어지기 시작했죠. 영어를 잘 몰라서 정보력이 부족했을 때 그런 괴상한 것들을 찾아 듣다가, 나중에서야 여기에서 미학, 윤리학의 어떤 계열들을 천천히 느끼기 시작했어요. 그냥 존재의 방식이 다른 사람들이 다른 음악을 만드나? 하는 의문점들을요.
이것을 구체화한 것은 고등학교 때 영어 공부를 엄청 하면서 정보 검색 능력이 오르고, 대학생이 되고 사회에 나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고, 젠더적으로 좀 더 스스로를 많이 발굴한 뒤의 일이었어요. 왜 내가 인더스트리얼을 찾아 들을 때 종종 불편했는지, 이런 부분을 확 느끼게 된 거죠. 그 때쯤 벨라라는 이름을 제 과거에서 건져냈어요. 바우하우스(Bauhaus)의 “Bela Lugosi’s Dead”에서 따온 건데, 왜 그 이름을 썼느냐 하면… 저는 벨라 루고시가 누구인지 몰랐거든요. 대체 어떤 여성이지? 하고 찾아봤는데, 이 사람이 남자인 거에요. 그래서 ‘어, 나는 그런 사람인 것 같다. 이런 류의 어떤 혼란의 상황을 내 이름의 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나중에서야 이게 헝가리에서는 흔한 남자 이름이라는 걸 알았어요. 서양 전통음악에 대한 배경이 없으니 바르톡 벨라(Bartók Béla)도 모르고 있었고… 돌이켜 보면 벨라란 이름을 정한 게 굉장히 서유럽 중심적, 인간 중심적 사고이긴 하지만요.
아무튼 저는 젠더든, 나이든, 심지어 인간이든 아니든 상관없는 사회가 되길 바라는 사람이고, 벨라라는 이름이 갖는 의미를 젠더라는 틀 안에 가둘 생각도 없어요. 그냥 벨라라는 이름이 저의 체현된 몸에 붙은 하나의 꼬리표일 뿐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죠. 그 윤리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어떤 음악이든 앞과 뒤에 어떤 곡을 트냐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음악적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거죠. 곡이 좋은지 싫은지 어떤 스타일인지 언제 나왔는지를 떠나서, 그 곡은 어떻게든 살릴 수 있다는 것. 디제잉의 관점에서.
물론 머릿속에 먼저 그림이 안 그려지면 어떤 곡을 튼다 해도 못 살릴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그것은 본인이 혼란스러운 것이고… 어떤 곡들을 이렇게 요렇게 만나도록 해야겠다는 결심이 선다면 그걸 과감하게 해낼 수 있는 윤리적 실천을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벨라라는 이름을 정한 것이 디제잉을 시작하고 나서였으니까요. 그 이름을 정한 뒤 프로듀싱을 할 때에도, 항상 어떤 곡이든 살릴 수 있다면 내가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것이고, 맥락도 나를 거쳐서 모두 재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매일매일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을 틀거나 만들 때 제가 자유의지로 뭘 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냥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을 쓰자는 생각으로, 항상 내버려두는 편이에요. 적당히 체화한 코드를 쓰는 거죠.
지금도 저한테 인상깊게 남아 있는, 벨라 님을 저한테 각인시킨 믹스가 NBDKNW에서 나온 <PMLS> 믹스 시리즈에서의 “reconnect”였어요. 한국의 아파트에서 흔하게 듣게 되는 엘리베이터와 도어락 소리로 시작해서, 온갖 신비로운 사운드를 스며들듯이 넘나드는 선곡을 들려주셨는데요. 어떻게 보면 ‘벨라 님은 정말 다양한 음악을 포섭하시는구나’라는 생각을 이 때 처음 갖게 되었던 것 같아요. 이 믹스에 대한 이야기를 부탁드려요!
일단 <PMLS> 전체는 군대에 있을 때 제가 기획한 믹스 시리즈입니다. ‘Post-Mechanic Landscapes of Seoul Suburban Area’의 약자인데, 제목을 그대로 번역하자면 ‘기계 등장 이후 서울 근교 지역의 풍경’이 되겠죠. 넓은 수평의 평야에 건물과 전신주와 도로와 다리와 송전탑이 수직으로 꽂혀 있는 괴이한 모양들. 자유로를 다니는 버스를 타 보신 분이라면 공감하실 텐데, 그 스산한 평야의 모양을 좌우로 훑으면서 여기에 전기가 흐른다는 것이 굉장히 거리감 있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어요. 그 때 떠오른 말이에요. 이 땅에 철심이 박혀 있고 전기가 흐르고 있단 말이죠.
농지 사이사이에 거대한 송전탑이 꽂혀 있고, 그 전선 아래를 지나는 버스를 타고 다니는 것이 어떤 ‘중간지대’를 여행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일 텐데. 이 순간이 만남의 과정에서 가장 긴장이 극대화되는 순간일지도 모르겠어요. 만나기 직전에 느끼는 – 경기버스의 고통, 시간을 못 지키면 어쩌지, 저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마음속으로 빌게 되는 기사님 빨리 가주세요… 어찌 보면 일상생활의 기반이 되는 동력인데도, 우리는 전기를 사용하는 방식이 대지에 폭력적이라는 사실을 잊고 살 때가 많죠. 빛의 속도로 대지를 사방으로 팽팽하게 찢는 전력의 네트워크. 교외에 산다는 것이 평생을 어떤 삶의 가장자리에 고립되어 사는 거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 상태에서 버스를 탈 때마다, 전선을 볼 때마다, 어떤 동력에 재접속하는 느낌이 들었고요.
그래서 제가 아는 음악들 중에서 교외의 풍경처럼 잔잔한, 하지만 가장 팽팽한 긴장 속에서 만들어진 것처럼 들리는 곡들을 모았어요. 딱히 의식적으로 구성했다기보다는, 시간을 멈춰 두고 교외의 이곳과 저곳을 동시에 거닐어본 것처럼 곡들을 다 먼저 선정하고 ‘아, 이 곡 뒤에는 이 곡이 오면 좋겠어’ 하는 느낌에 기반해서 이어 붙였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별 의도 없이. 그 당시에 유튜브에서 빈 몰(mall) 안에서 들려오는 음악 같은 게 유행했었는데, 그런 형태를 차용하기도 했고요.
프로토-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 같은 느낌이군요.
네, 그래서 어떤 트랙에는 일부러 큰 공간의 작은 스피커에서 들리는 것 같은 리버브를 걸거나, 매장 문 밖에서 들리는 것 같은 필터를 걸어 놓고 붙이기도 했어요. 많이 들어 뒀다가 한 번에 이어붙인 거죠.
시리즈 전체의 관점에서 엮어서 믹스를 설명드리자면… 교외, 신도시, 뉴타운 같은 것들은 자본주의적 공간이에요. 어느 순간 갑자기 인공적으로 생겨났고, 박스 같은 집들이 많이 들어서 있고, 인체의 향상성 유지 – 먹고 자고 싸고 씻는 것만을 위해 봉사하는 자본주의 신체의 곳간이죠. 당연하게도 울타리를 치고 자신의 재산을 수호해야 하는 공간인데, 저는 하우스푸어에요. 집이랑 맥북밖에 없어요. 집을 살 때까진 중산층이었는데, 그 뒤로 집안이 난리가 났죠. 제가 앞서 말씀드렸던 레슨들, 그리고 맥북, 그것마저도 엄마 몰래 학비를 깨서 중고 맥북 사고 레슨을 들었다가 1년 반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서 다시 채워야 했어요. 이러다 보니까, 울타리를 친 공간 뒤에서 제 디스포리아와 이상한 사정이 많은 가정과 함께 고립된 거에요.
밖에 나가도 제 정체성을 아무도 몰랐어요. 차림새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고, 제 젠더 수행에도 신경을 안 써도 됐고. 그렇지만 그건 마침내 사회에서 정체성이 지워졌고 해방이 이뤄진 덕분이 아니라 저와 연이 닿는 사람이 반경 1km 안에 없기 때문이에요. 다들 자기만의 트랙에 갇힌 공간이죠. 제가 돈도 없는데 어느 날 갑자기 사람 만나려고 동네 요가 교실을 끊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 상태에서 재접속을 한참 동안 고민하던 차에 – 일 되게 많이 하고 엄청나게 고립된 사람들이 다들 그렇듯이 항상 긴장된 몸으로 이상한 음악들을 사운드클라우드로 찾아 듣던 차에, 버스 차창의 풍경을 봤어요. 아, 이거였구나. 그 당시에는 이런 식으로 생각하진 않았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 정리해 보면, 내 삶이 자본주의의 가속도에 빠진 이행하는 공간에 있구나. 그런 걸 느끼면서 내가 왜 이런 음악을 들으려고 했는지가 설명이 됐어요. 그렇다면 이 경험으로 다른 디제이들과 연결해 볼 수 있을까? 재접속을 할 수 있을까? 다만 이러저러한 사정은 빼고 우선 미학적으로, 이미지만 가지고 떠오르는 것들을 해 보자 싶어서, 시리즈에 참여해 주신 디제이 분들께 자기가 알고 있는 교외적인 이미지를 보내 달라고 부탁드렸어요. 그렇게 모은 이미지들을 디자이너분께 한 번에 보내드리고 각 믹스의 커버를 요청드렸고요. 그 강렬한 이미지들을 바탕으로 기획을 했어요.
만나(manna, 조한나) 언니, 위지영(Jiyoung Wi) 언니, 최영(Yeong Die) 언니 등이 시리즈에 참여했는데, 제가 가장 염두에 두고 있었던 건 여성과 비남성, 퀴어의 목소리였어요. 적어도 나 자신이 기획할 때는 이 목소리를 가장 많이 담아보자는 생각을 해요. 남성을 라인업에 올리는 기획자들은 숱하고 널리고 깔리고 많았거든요. 그런데 제가 그렇게 짠 라인업 중에 생각하던 만큼 교외 출신이 많지 않았어요. 절반 정도?
경기도에 반평생 이상 산 입장에서, 믹스가 그런 부분을 건드리는 게 있었어요. 이동할 때 끝없이 시장이 연장되는 느낌,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할 때 툭 잘려 있는, 거기에 예속되어 있는 느낌을요.
그런 식으로 각성이 되는 순간이 있죠. 이행의 순간에 각성의 모먼트가 온다는… 참 옛날 철학자들 말이 진짜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지점에서도 저한테 굉장히 동하는 기획이었어요.
[why are you so lost sweetie]는 벨라 님의 작업 중에서 가장 진한 슬픔이 느껴져요. 군대라는, 한국 사회의 정상성에 부합하는 남성성을 파괴적으로 투여/재형성하는 집단이자 공간에서 이 작품이 만들어졌다는 맥락과 떼놓기 어려울 텐데, 작업이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그 때의 감정을 지금 돌이켜 보면 어떨지가 궁금합니다.
군대에 있는 사이버지식정보방(이하 사지방)에서, ‘분명 어떤 외국인이 DAW를 온라인에 만들려 했을 것이다’ 하는 생각을 하면서 시퀀서랑 DAW를 막 검색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온라인 시퀀서가 있더라구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미디로 곡을 만들고, 거기서 주어진 샘플 중에 콘서트 하프 소리가 가장 마음에 들어서 하프를 중심으로 곡을 만들었어요. 사실 다른 것도 만들어 보려 했었는데, 그 시퀀서로는 못 만들어요. 컴퓨터의 업로드 속도가 너무 느리게 제한이 걸려 있어서…
그리고 오다시티(Audacity)를 받고 여러 가지 이펙트를 써서 시퀀싱과 믹싱을 했어요. Audacity – 대담하다는 뜻이잖아요. 대담한 짓거리를 했죠. (웃음) 이걸 쓰려고 한 이유는 별거 아니었어요. 베리얼(Burial)이 사운드포지(Sound Forge)를 쓴다고 하고, 이거랑 비슷한 프로그램이 오다시티라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뭐랄까, 최대한 툴을 탓하지 않으려 한 시도였죠.
군대는 저한테는 발견의 공간이었어요. 제 얼굴성이 가장 확실해진 지점, 신체성이 가장 잘 느껴진 지점이었죠. 왜냐하면 여기에 배제가 딱 있으니까. (웃음) 선이 내 앞에 딱 그어져 있으니까 어, 내가 경계에 있네? 이런 발견을 했죠. 휴대폰 반입이 가능해졌을 무렵, 데이팅 앱을 깔고 밖에 클럽 갔을 때 찍었던 망사 티 입은 모습을 걸어뒀어요. 근데 부사관일 게 분명한 사람이 꼴린다고 DM을 보내더라구요. 그게 나쁘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라, 제가 이 사진을 왜 걸어뒀겠어요? 뭔가 나 같은 사람이 있나 싶어서 걸어 뒀는데, 걸린 거지. 앱을 깐 사람이 한국군, 미군 할 것 없이 굉장히 많았는데, 정작 데이팅 앱을 깔기만 했지 누군가를 만나는 데 실제로 쓰지는 못했어요. 저는 겁이 많았고, 중간에 휴대폰이 걸려서 영창을 가기도 했고. (웃음)
그런 웃기고 안쓰러운 공간이 군대였죠. 청소년과 사회적 삶 사이에 낀 2년의 시간이 주는 ‘평정’ 같은 게 있어요. 이것도 ‘이행하는 공간’의 특징일 텐데, 모든 이행하는 공간에는 긴장과 동시에 평정이 있어요. 그곳에서 떠도는 모든 사람들은, 다들 어디론가 가려고 하는데 앞뒤에 폭풍이 있어서 살짝 방향감각을 잃은 것처럼 머물어요. 제가 [why are you so lost sweetie]에 담고자 했던 건, 물론 슬픔도 있지만, 잠깐 반짝하는 순간의 2년을 명령 체제 하에서 보내고 ‘자아’를 찾았다는 환상에 빠져서 사회로 나가는 디즈니랜드적인 그림인 것 같아요. 나가면 진짜다, 나가면 실전이다, 여기서는 준비한다, 나는 진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을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 하는 허상 속 분리의 과정에서 오는 신체와 마음의 정렬이라고 할까요?
저는 거기로 빠져들어가는 느낌에 저항하지 않았어요. 막고 싶었죠. 근데 그럴 수 없었어요. 그래서 그냥 뒀고. 그럴 때는 어떤 느낌이 드냐면, 좌절하다가도 내일도 또 똑같은 거라는 사실에 ‘음~ 정말로 반복에 갇혀 있는 느낌’. 다만 이런 느낌을 구체적으로 곡에 표현했다는 건 아니고, 그것을 저라는 사람의 하나의 ‘과도기적 모드’인 것처럼 보면서 이 모드에 다른 여러 가지 감정들을 자연스럽게 담았어요. 그게 마치 필터를 씌운 것처럼 담긴 거죠. 물론 악기 – 콘서트 하프, 오다시티 – 의 제한도 있었구요.

[why are you so lost sweetie]의 카세트 버전. 미국 시카고의 포덩크(Podunk) 레이블에서 제작되었다.
원래 앨범 커버는 졸고 있는 아기 오리 그림이었는데, 카세트 테이프로 나온 버전에는 오리 그림이 남아 있어요. 이건 군대에 있을 때 바깥 친구들이랑 나눈 조크인데, 데이팅 앱에서 누군가 딕 픽(dick pic)을 자꾸 보내요. 그러면 저는 등가 교환으로 덕 픽(duck pic)을 보내는 거죠. (웃음) 혹시라도 제가 사고로 갑작스럽게 죽었을 때, 핸드폰에서 누가 딕 픽을 발견할 일은 없었으면 해서 (웃음) 아예 찍지도, 저장하지도 않거든요. 지영 언니가 일민미술관과의 작업으로 “A Metric Of Distance” 믹스를 냈을 때 주변인들한테 날씨가 어떻냐고 물어본 뒤 그 답변을 오디오 소재로 썼는데, 저는 생활관 화장실에 들어가서 물소리를 내고 ‘어 저기 오리 좀 봐’라고 한 적도 있고요. (웃음)
지금 돌이켜보면 군대를 이전과 별 차이 없이 무난하게 다녀왔던 것 같아요. 이미 예전부터 저의 디스포리아를 억압하면서 살아와야 했던 사람이니까, 제가 커밍아웃 못 하는 건 어딜 가나 똑같죠. (웃음) 음악 씬이 아닌 이상 금융권, 학교, 제도권, 전부 다 제가 커밍아웃을 못 하는 공간이니까. 바깥에 커밍아웃 한 사람들이랑 스크린으로 계속 만나면서, 옷장맨으로서, 고개를 이리 저리 기대면서.
그냥 화가 나면 화를 냈어요. 사람이 너무 멍청하면 저건 정말 악의적으로 순수한 것일까? 하면서. “vicious pure”가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죠. “all words shall fail crossing this river”처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속에 쌓여서 저절로 만들어진 트랙도 있고. 새해 전날 밤에 당직을 서서 너무 힘든데 다음날 아침에 ‘새해야~ 너무 좋다~’ 하면서 만든 곡도 있고. “HNY, AM10:45”에요. 그렇게 다양한 감정들을 앞서 말한 ‘모드’에서 담아낸 것 같아요. 슬픔이라기보다는 그냥 어떤 모드.
앨범을 들으면서 여기서 느껴지는 ‘슬픔’이라는 게, 뭔가 게임이나 드라마 같은 곳의 슬픈 장면에서 나올 법한 과장되고 극적인 인상이 있었던 것 같아요. 들으면서 울기도 했는데 그러다가 이게 너무 슬픈 장면에 흐를 것 같은 음악이라 그게 좀 웃기기도 하고. 벨라 님께서 말씀해 주신 ‘디즈니랜드’라는 비유가 제가 경험한 그런 부분하고 연결된다고 느꼈어요.
제 음악을 듣고 많은 분들이 게임 음악 같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전 게임을 잘 안해서 게임 음악들이 어떤지 몰라요. 정말로! 그냥 만든 거에요. 진짜 무의식적으로 만들었어요. ‘내 삶에 있는 걸 가지고 녹여넣는다’ 같은 생각도 안 하고 그냥 노트를 이렇게 찍으니까 듣기 좋네, 이러면서. 너무 답없는 사람인가? (웃음) 슬프기야 슬펐죠. 우울하고. 그게 그냥 담긴 것 같아요.

정말 어두운 한 해였음에도 불구하고, [2020]을 들으면서 저는 이것이 굉장히 ‘귀여운’ 컴필레이션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점이 좋았어요. 몽글몽글한 사인웨이브가 통통거리는 “Entangled Events”부터 “The Flare”가 일으키는 작은 소용돌이까지 컴필레이션은 귀여운 소리들로 꽉 차 있어요. 그렇지만 그것이 뭉치면서 만들어 낸 거시적 풍광은 아이러니하게도 참 쓸쓸한 느낌이에요. 이런 역설을 의도하신 것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관점으로 창작에 접근하신 것인지, [2020]에 대한 이야기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혼자서도 굉장히 잘 사는 사람이에요. 평상시에 외로움이나 쓸쓸함, 이런 감정들을 느끼긴 하지만 엄청 강렬하게 느끼고, 다른 사람들한테 의존하려고 개인적으로 연락을 할 정도까지 가는 그런 사람은 아니죠. [2020]에 대해서는 구원 님이 말씀하신 ‘역설’과는 다른 관점으로 접근했어요.
[2020]을 구성하는 두 EP, [To Resonate In A Universe]와 [Relict Knowledge, Was it You, The Crook?]은 각각 [Guidelines] 앞뒤로 만들어진 곡들이에요. 일단 [To Resonate In A Universe]는 정말로 외롭고 쓸쓸해서 만들었어요. 할 게 없고, 코로나는 돌고. 온라인 강의만 들으면서 머리에 쌓이는 건 많은데 이걸 같이 나눌 사람은 없었어요. 그렇다고 학교를 다닌다고 누군가와 이걸 나눌 수 있냐 하면 또 그런 시대는 아닌 것 같지만…
여하튼 2020년이 너무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해였죠. 의도한 건 아니지만 그런 외로움이 녹아났어요. 너무 외로워서, 내 살결이 책상과 키보드에 닿는 감각을 분자∙원자적 수준까지 확대해서 살펴보고 싶었던 거예요. 작은 전기 신호들, 원자들 사이에 강하게 밀어내는 힘이 어떻게 지긋이 누르는 감각을 만들어 내서 신경에 영향을 주는지. 그리고 나는 여기에서 어떻게 감정을 느끼게 되는지, 그리고 생각을 하게 되는지. 공기 중 습도를 예로 들면, 습하면 책상이랑 팔이랑 닿는 게 끈적거리고 짜증이 나잖아요. 반대로 건조하면 책상에 딱 팔을 놓을 때 시원하고, 감정적으로 고양이 되고.
결국 이런 것들이 감정으로 느껴지잖아요. 굉장히 작은 순간들과 사건들이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하고 생각을 하게 만들죠. 나는 우주에 가득 찬 입자들과 그 전기적 힘들의 장이 이루는 한 집합일 뿐인데, 무엇이 나의 피부가 터지고 바닥에 풀죽처럼 흩어지지 않도록 붙드는 것일까. 나는 뭐하는 기계일까. 어떤 빛은 나를 지금 이 순간에도 투과하고 있고, 어떤 빛은 내 몸 안의 원자들과 부딪히고, 어떤 빛 신호는 전기 신호로 바뀌어서 후두부에서 단계별로 처리가 되고, 어떤 빛은 누락되고.
존재론적으로 보는 거에요. ‘왜?’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냥 관찰. 심심하고 외로워서, 심신평행론을 물리적 선에서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책상과 내 몸이 닿는 사건과 신체적 감각과 감정이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연동된다, 하는 것처럼. 그 관찰을 음악으로 담았어요. 원래는 사운드클라우드에 그냥 한 곡씩 올리거나 하려던 것들인데, 아무렇게나 올리려니 보기가 좀 그럴 것 같아서 나중에 EP로 묶었죠. 그랬더니 헬리콥터 레코즈(Helicopter Records)에서 내자고 연락이 와서, 뒤에 나온 [Relict Knowledge, Was it You, The Crook?]과 한번 더 묶었습니다.
[Relict Knowledge, Was It You, The Crook?]는 그 관찰을 생태주의적으로 트위스트해서 다시 한번 살펴보기로 한 거예요. 그 중에서도 특히 지식이라는 기억의 형태에 대해서. 우리가 지식으로 알고 있는 많은 것들이, 물리적 심급에서 보면 지금 이 순간에도 와해되고 있는 뉴런의 배치에서 점화되는 신호들일 뿐이잖아요. 그 점에서 우리를 외롭게 하는 사회의 원인을 찾으려고 하면 안 되는 걸까요?
남자아이는 파란색, 여자아이는 분홍색, 이런 구분도 누군가가 언젠가 시작한 것이고, 그 코드는 와해되는 지식으로서 미디어 수용자들에게 전달된 거에요. 그것이 이루는 파시즘적인 담론 형태는 불안정한 기억이 환경과 교류하는 방식에서 시작된 것이고, 불안정한 인간의 사고는 자본주의 기업들이 인간을 전부 다 분열∙지배하고 소외시키는 전략을 짜고 있죠. 기업들은 결국 자본의 논리에 따라 일을 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불안정한 인간 사고는 자기들 스스로는 세상을 낫게 만든다는 착각을 낳게 만들어요. 현재 모든 인류들에게 안정된 삶을 보장하려면 지구 네 개 분량의 영토가 필요한데, 그 영토를 소모할 만큼의 인류가 구석구석 소외된 채로, 쑤셔박혀진 채로 살아가고 있어요. 그렇게 인류는 현대까지 달려오고 있는데, ‘피라미드를 짓는 것은 노예를 죽을 때까지 부려먹는 일이니까 멈춰야 한다’는 교훈을 피라미드의 웅장한 자태 앞에서 그냥 까먹어버리는 거에요 – 미학과 윤리학이 분리되는 거죠. 지구는 파랗고 작은 우주 안의 한낱 점에 불과한데, 엄청 노력해서 그 사실을 발견해 놓고도 자꾸 까먹고 싸우게 돼요. 나의 엄마는 분명 나이가 들어서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삶에서 사라져버릴 텐데, 아직도 서로의 감정을 잘 조율할 줄 모르기도 하고.
그래서 “Relict Knowledge”는 불완전한 기억 – 주변 장소와 맥락을 전부 다 살피지 못한 기억. “Was It You”는 그 점에 대한 깨달음, 사후적으로라도. “The Crook”은 눈 오는 날 집이 도둑을 맞아서, 바깥에 부스럭거리는 담벼락에 손전등을 딱 비췄는데 산타 모자를 쓴 너구리 도둑이 손을 들고 서 있는 모습. 그런 장면을 상상했어요. 그 장면을 정말 커버로 하고 싶었는데 마땅한 그림을 찾을 수가 없어서 원숭이 사진으로 대체했어요. 생태주의적 메시지를 살리기 위해. “The Flare”, 조명탄은 지구가 망하고 있다. 불안정한 기억을 믿지 말아라.

사운드클라우드에 “The Crook”이 올라왔을 당시 커버로 쓰인 원숭이 사진.
엄청 거창한 것 같지만 전혀 거창한 게 아니에요. 정말 일상 속에서 리마인더로 장착하고 살고 싶어서 만든 곡들입니다. 전혀 모르겠죠? (웃음) 제가 이렇게 막 하는데 아껴 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감사할 따름이에요.
설명을 듣고 보니 [To Resonate In A Universe]와 [Relict Knowledge, Was it You, The Crook?]의 두 사이드를 비교했을 때, 후자 쪽이 좀 더 하나의 선상으로 흐르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었네요. 이런 큰 메시지를 ‘큰 소리’로 그려내시진 않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맞아요, 뒤쪽이 좀 더 절박한 메시지를 담고 있죠. 라이너 노트에도 썼지만, 이 음악들은 어떤 일지 같은 것으로 담아낸 것이에요. 제가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처럼 이걸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 그냥 누군가가 나중에 이 레코드를 발견하고 들었을 때, 음악 자체에 흘러 넘쳐 있는 제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음악적 언어로써 이것을 소화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가장 컸어요.
메시지라는 것을 전달하는 방식은 반드시 클 필요가 없어요. 워크룸 프레스에서 나온 『생활 공작』이라는 책이 있는데, CIA의 전신인 OSS가 펴낸 생활 속에서의 파괴 공작에 대한 책이죠. 그 책을 읽지 않았지만 그 타이틀을 보고 바로 알았어요. 일상 속에 숨어든 공작 – 사람의 행동을 바꾸거나, 혹은 사람과 어떤 접점을 만드는 일은 굳이 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설사 엄청나게 큰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다 해도요. 그런 건 언제나 역치 하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것들이고, 언어∙비언어∙음악 등 온갖 것들을 통해서 소통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 전략을 우리도 쓸 수 있어야 우리도 생활에서의 그들의 공작, 그들의 프로그래밍에 맞설 수 있을 테죠.
특히 제가 만든 곡들의 경우, 아까 ‘음악 속에 흘러 넘쳐 있으면 좋겠다’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만약 이것이 큰 음악이었다면 이것을 듣는 사람은 그 서사를 드라마화하고 대상화했을 거에요. 저는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거든요. 큰 서사의 비극적 몰입이나 눈물 같은 것을 바라지 않아요. 제 개인 작업에 어떤 영화 음악적인, 한스 짐머(Hans Zimmer)적인, 액션 영화 시퀀스같은 요소들을 집어넣는 것에 대해 반감이 있어요. 메시지와 음악에 사회적으로 경직된 코드를 부여하고 싶지 않은 거죠.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벨라 님의 레코딩과는 달리, 제가 DJ 셋으로 현장에서 직접 접했던 벨라 님은 주로 엄청나게 빠른 음악을 트는 (그리고 다른 DJ들의 음악에 신나게 춤추시는) 모습으로 기억돼요. 신도시에서의 《Tears In Heaven》이나 머신 걸(Machine Girl)을 불러왔던 《Quick-Die》 같은 현장에서처럼요. 그것이 단순히 ‘빠르고 신나는’ 것을 넘어서(물론 신납니다), ‘몸을 조각내 버릴 정도로 춤추게 만드는’ 파편적인 소리와 비트의 흐름이라는 게 특히 짜릿하게 느껴지네요. 빠른 음악을 트실 때 어떤 마음가짐을 지니시는지가 궁금해요.
이건 웃기는 방식으로밖에 답을 못 드릴 것 같아요. (웃음) 저도 제가 이걸 좋아한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2017년부터 챙겨 보던 드랙퀸 토크쇼가 있어요. 제목이 <UNHhhh>인데, 사람들이 제목을 정할 때 이 쇼는 ‘post-verbal’, 말을 넘어섰다, 말로는 안 된다, 말이 안 통한다고 정한 제목이거든요. (웃음) 여기서 호스트 중 한 명인 트릭시 마텔(Trixie Mattel)이 던진 조크 중에, (남자든 여자든 다른 무엇이든 상관없이) 게이들이 빨리 걷는 이유는 다 머릿속에 브리트니 스피어스(Britney Spears)의 “Womanizer”를 장착하고 있어서 그렇다, 하는 게 있어요. (웃음) 그게 상관이 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지만, 저는 보통 그래요.
처음에 그렇게 빨리 틀었던 이유는… 그냥 워낙 평상시에 빠른 곡들을 많이 들어서 그게 빠른 줄 모르고 튼 거예요. ‘느린 곡도 있고 빠른 곡도 있네. 그럼 다 틀어야지!’ 이런 욕심으로. 근데 나중 가서는 ‘아 이게 빠르구나. 여러분께는 이게 참 빠른 곡이었구나’ 하게 된 거죠. 아까도 말했듯이 디제잉 데뷔 무대였던 프라이드 애프터파티 당일에 힘 헌과 아야의 곡을 섞어서 틀었는데, 나중에서야 ‘아, 그래도 트렁크(Trunk)에서는 하우스나 디스코 나오는데 아무리 쉐이드라 해도 오프닝부터 이런 짓을 하면 좀 혼란스럽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사실 빠른 음악 좋죠. 케이팝에도 빠른 음악이 많고. 그래서 저는 대충 맞춰서 듣겠거니 했는데, 그게 곡이 또 그렇지는 않더라구요. 처음에 저는 160BPM하고 80BPM을 구분하지 않았어요. 그리드(grid)적으로 생각하는 프로듀서 입장에서는 80회 찍으나 160회 찍으나, 그냥 마디가 두 배인 걸 빼면 별 차이가 없거든요. 디제잉을 시작할 때만 해도 그런 구분을 잘 안 했는데, 하다 보니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 이해가 갔어요.
근데 그러고 나서도 변속 자체에 즐거움이 있다는 걸 깨달아 버려서… ‘가속’이 아니라 ‘변속’이요. 곡 앞뒤로 사람들의 바이브가 확연하게 달라질 정도로 심각하고 급격한 변속이 굉장히 즐거웠어요.
‘변속’이 곡과 곡 사이의 속도 차이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다음 곡에 맞춰서 피치를 올리는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피치를 맞추든 안 맞추든 모두 포함해서요. 속도가 갑자기 확 바뀔 때, 혹은 점차적으로 빨라지거나 느려지는 것까지 전부 포괄해서. 그게 너무 즐거운 거에요. 그래서 클럽 주인들이 싫어할 만한 짓을 굉장히 많이 한 것 같아요. (웃음)
그 즐거움이 무엇인가 하면… 순간적인 단절에서 오는 쾌감. 원오트릭스 포인트 네버(Oneohtrix Point Never)의 음악에서 어떤 소리가 갑자기 꺼지고 확 다른 곡이 되었는데 그게 사실 한 곡 안에 있는 구조였을 때, 소피가 만든 “Hard” 엄청 하드하다가 갑자기 스윗해질 때, 콩부가 신도시 노클럽에서 케이팝 컷믹스를 할 때, 딱 알았어요. 디제잉도 이렇게 할 수 있구나. 그리고 BPM이라는 변수를 조작해버린 뒤에 엄청 극렬한 상태로 두는 것도 어떤 해소감이 있구나.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헤드뱅잉을 하고 싶어지는구나. 인간의 음악과 몸에 그런 조건이 있는 건가? 동물적인 감각이 있는 건가? 인간이 참 신기하구나 하는 실험적 생각으로 그런 음악을 틀어요. (웃음)
물론 그 와중에 저도 즐겁죠. 빠르니까 몸이 막 움직이고, 몸이 그렇게 움직일 때는 트랜스에 빠지게 되는구나. 순전히 신체적 감각에 의존해서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빠른 줄 몰랐다니, 근데 저도 빠른 줄 모르겠거든요? (웃음)
전자음악 빠질 무렵에 제일린, 코드나인(Kode9) 좋아했고 이랬는데, 그게 빠르대요. 다들 150 BPM이상이면 빠르다고. 그게 빠른 거야? 난 이해가 안 돼. (웃음) 120 BPM, 심장의 비트, 막 이런 거? 맞는 이야기일지도 모르는데, 어쩌겠어요. 저는 딴 거 좋아하는데.
그런 빠름과 격렬함이 응축되어 있는 것이 벨라 님의 또 다른 활동명인 디제이 귀신(guixine)일 것입니다. 보다 디컨스트럭티드 클럽(Deconstructed club)에 가까운 빠른 철거적 사운드는 물론이고, 인스타그램이나 사운드클라우드 등에서 활용되는 이미지들 – 적나라하고 섹슈얼한 근육질의 게이들을 클로즈업해 잡은 사진들이, 그의 음악에서 느껴지는 육체성(과 그것을 조각내는 것)의 함의를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져요. ‘DJ 귀신’의 아이디어와 경로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그리고 왜 앨범 제목이 ‘2020년 10월 25일까지’인지도 궁금해요!)
앨범 제목은 그냥 그 날짜까지 만들었던 오리지널 곡들이란 뜻이에요. 앨범 커버는 붓펜으로 직접 썼어요. (웃음) 붓펜으로 쓴 걸 찍은 다음에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이미지를 디지털로 다듬었죠.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또 신체랑 연결되겠네요. 저는 논바이너리로서 일정 정도 신체 디스포리아를 가지고 있어요. 제가 말하는 목소리부터 얼굴까지, 모두 다 제 내적인 것이랑 좀 안 맞거든요. 그래서 제가 노래를 안 해요. 많은 논바이너리나 트렌스젠더 등의 퀴어 분들이 이 부분에 대해 공감하실 거에요. 그와 동시에, 저는 남성적 얼굴성을 가진 남성애자죠.
베를린의 테크노 음악은 일렉트로닉 바디 뮤직(Electronic body music)2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 문화에서의 마치스모(machismo)3의 동성애적 편향은 헤렌사우나(Herrensauna)4등에서도 느낄 수 있을 텐데, 그런 플랫폼을 게이들이 운영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이 여러 방향의 동시대적 퀴어 무브먼트와 결을 달리한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 와중에 저는 빠른 음악을 좋아하잖아요. 그래서 테크노를 거세하고 싶어졌어요. 남성의 성기를 숭배하지 않고 그것에 대해, 그것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은 남성을 공격하는 게 되죠. TLC의 “Girl Talk”처럼요. 테크노의 리듬 – 130~140BPM대의 심장 박동보다 조금 빠른 BPM으로 공식화된 – 은 시간을 조절하는 능력을 가진 디제이에게, 언제나 안전함과 동시에 떠나고 싶은 마음을 주는 어떤 구간이에요. 나는 조금 더 탐험해 보고 싶은데, 마치 어떤 사회적 합의가 있다는 환상이 있어서 떠나지 못하는 거죠.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이 힘든 것처럼 BPM 바를 쉽게 올리고 내리지 못하게 되는 디제이 덱 위에서의 순간들이 있어요.
저는 거기서 나이트코어(Nightcore)5를 생각했어요. 나이트코어는 기존의 음악을 단순히 가속해서 피치를 올려버리고, 그러면 비트의 간격이 촘촘해지잖아요? 같은 공간 안에 우리에게 익숙한 많은 물건들을 집어넣는 것은 ‘캠피(campy)’한 언어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어요. 같은 시간 안에 많은 음들을 쑤셔넣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나이트코어는 굉장히 캠피하죠. 그것이 단지 키치하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과장된, 에너제틱한, 과잉의 상태에서 음악과 이미지가 가지는 수행이 바뀌는 거예요. 에너지가 응축됨으로써, 변속함으로써.
130-140BPM이 테크노의 표준 척도라면, 저는 그거를 거세하는 방향으로서 속도를 낮출 것인지 고민했어요. 그래서 귀신의 초기 작업에서는 속도를 종종 낮춰 보았어요. 나중에 믹스를 만들 때 실험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저는 그냥 빠른 게 좋더라고요. 제 생각에는 디제이 러시(DJ RUSH)가 슈란츠(Schranz)6를 만들 때 비슷한 상상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믿음이 있어요. 귀신의 프로토타입은 디제이 러시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정말 좋아하는 디제이고 그를 많이 참고했죠.
그래서 가속을 했더니, 이게 개버(Gabber)7는 또 아니고, 뭔가 킥의 무게감이 덜어지면서 테크노의 감이 덜 사는 거예요. 이것도 사지방에서 오다시티로 만든 건데, 오다시티에서는 속도를 빠르게 하면 음질이 굉장히 안 좋아지기 때문에 피치를 올려야만 했어요. 기술적인 조건이 또 여기에 개입한 셈이죠. 다시 돌아와서… 테크노의 감이 덜 살길래 아예 매시업을 해 보았어요. 트랙 하나는 디트로이트 테크노, 또 다른 트랙 하나는 유럽식 딥 테크노 – 벌트에서 나올 법한 테크노, 이런 식으로요. 딥 테크노의 킥은 초저음역대에 있기 때문에, 조금 변속을 해도 일반적인 킥의 음역대를 벗어나지 않아요. 그렇게 매시업을 하니까 킥이 완성된 거죠. 이것들을 합쳐도 음역대를 이탈하지 않으니까요. 귀신의 매시업들은 어떤 음악적인 질감과 의미를 살리는 방향으로 만들어졌어요. 퀴어적으로 아이코닉한 곡들, 이성애적 테크노, 그리고 거기에만 제한되지도 않는 무고한 곡들로 점철된 끔찍한 혼종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 사지방에서는 업로드 속도 제한이 있어서 음질을 wav 파일로 뽑지 못하고 부득이하게 mp3를 쓰긴 했지만… 아무튼 그렇게 음악을 만들고 나서, 여기에 쓰일 이미지들을 고민해 보니 제가 만들 수 있는 이미지에 한계가 있더라구요. 그림판으로 그릴 수도 없고.
가끔 보면 퀴어들을 위한 파티에서조차 웃통을 벗어제끼는 이성애자 마초들이 있어요. (웃음) 그런 마초-이성애자적 남성성을 어떻게든 조롱하고 싶은데, 마침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자발적으로 몸캠을 찍는 남성들의 몸을, 머리와 성기를 자른 디스포리아적 형태로 전시하자. 폭력적인가요? 남성 동성애자들은 종종 그런 상상을 하기도 해요. 훨씬 덩치가 큰 남성 혹은 짐승과 광기의 섹스를 하고 사지가 절단되어 황야에 버려지는 어두운 상상을. 그냥 게이들, 퀴어들이 그런 상상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신체적인 감각이 억압받을 때 나오는 상상들이기 때문에… <파리 이즈 버닝(Paris Is Burning)> 같은 다큐멘터리를 봐도 아시겠지만, 사실 그게 그렇게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도 아니고요. 근데 그 욕망은 신체 디스포리아와도 연결되어 있고…
그래서 모두가 가엾게도 <스타크래프트(Starcraft)>만 열심히 하고 있는 사지방에서, 저는 몰래 구글로 열심히 이미지들을 물색하고 확대하고 자르면서 굉장한 희열을 느꼈어요. (웃음) 군대에 들어가서 느낀 것이, 남성의 몸이 이렇게나 다양하구나, 상상 속의 이데아를 기준으로 내려다보면 고깃덩어리로밖에 안 보일 수 있구나, 하는 거였어요. 나를 포함해서! 완벽과 비교하면 어떤 부분이든 흠을 잡을 수 있는 거니까요. 여하튼 귀신을 하면서 테크노도 남성의 몸도 전부 다 엉망진창으로, 존엄과는 결부될 수 없는 퀴어적 비체로 만들어냈는데, 클럽에서 트니까 제 주변 사람들이 다들 좋아하시더라구요.
6월 22일 캐나다의 에디션즈 어패런트(Éditions Appærent) 레이블에서 [Guidelines] EP가 발매되었습니다. 전자/실험 음악가들인 피에르 게리뉴(Pierre Guerineau)와 제시 오스본란티에(Jesse Osborne-Lanthier), 윌 밸런타인(Will Ballantyne)이 함께 창립한 레이블이라고 알고 있어요. 사실 제가 처음 음악을 듣고 피드백을 드린 것이 작년 8월이었는데, 정식 발매 소식이 오랜 기간 동안 없어 어떻게 되었나 걱정하고 있던 차였어요. 어떻게 에디션즈 어패런트 측과 연이 닿은 것인지,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부탁드립니다.
저도 걱정하고 있었어요. (웃음) 엎어지는 게 아닐까? 얘들은 왜 아무 말도 없지? 근데 생각해보면, 맨 처음부터 제 작업이 네 번째 릴리즈라고 소개를 받았었어요. 처음 제안을 받을 당시에는 에디션즈 어패런트가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상태였거든요. 원래는 다른 아티스트의 릴리즈가 제 것보다 먼저 나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거의 마감이 늦어지니까 레이블 쪽에서 제 걸 먼저 내기로 해서 지금 나오게 된 거예요. 그래서 그런 걸 감안하면 원래 더 늦어질 수도 있었는데 조금 일찍 나왔구나 싶기도 해요. 학교를 다니면서 바쁘게 살다 보니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도 했고요.
2018년에 상하이의 레이블인 지놈 6.66 Mbp(Genome 6.66 Mbp)가 상하이의 클럽 올(All)에서 주최한 파티에 초청받았어요. 이 때 메인 아티스트였던 시티(City – Will Ballantyne)와 알게 됐는데, 그 사람이 밴쿠버 s.M.I.L.e 크루의 멤버였어요. 제가 여기서 운영하는 s.M.I.L.e 라디오 믹스에 참여하기도 했었죠. 근데 크루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디스코드(Discord)8채팅방을 만들었다길래, 저는 게임도 안 하는데 디스코드 가입해서 들어가 봤어요. 그쪽 프로듀서들하고 디제이들은 뭐 하고 사는지 궁금해서.
들어가니까 인사도 하게 되고, 제가 만든 곡들도 몇 번 홍보하고, 반응 주고받고 하다가, 데모를 어떻게 낼까 고민을 하던 차에 친구들과 다양하게 상담을 거치고 나서 시티한테 한번 메일을 보내 봤어요. 국내에서 내려니 해외 프로모션이 어려운 부분이 있고, 중국이나 일본 쪽 레이블에서 내기엔 이게 한국 전통음악을 가지고 만든 것이다 보니 좀 무섭고. 시티가 들어 보더니, 자기들이 레이블을 새로 만드는데 거기서 이걸 내 볼 생각이 있냐고 물어봤어요. 아예 클린 슬레이트부터, 뭔가 새로운 모험에 동참하는 기분이 드는 거에요. 그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예스를 날렸고, 그 때부터 마냥 기다리다가 EP가 나온 겁니다. 이 다음에는 정규 앨범을 함께 내자고 하던데, 이번 EP가 잘 되면 다음에도 같이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스와인 데일리(Swine Daily)』와의 인터뷰에서, 벨라 님은 농악에 결부된 전통적 가치(및 그 전수에 있어서 발생하는 권위적이고 독소적인 억압)와 남한 독재 정권 하에서의 농악이 지닌 저항적 역사를 언급하시면서, 그것을 “다만 전통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비틀고, 패러디하고, 개량하고, 거대한 사운드 시스템에 맞게 만들고 싶다”고 하셨어요. 제 생각에는, 이러한 접근에 있어서 전통음악을 ‘현대화’하려는 인상적이지 못한 시도 – 국악기가 서양 음악 전통에 억지로 짜맞춰져 있는 – 를 회피하면서도 존중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을 것 같아요. 어떤 계기로 이 작업에 착수하셨는지, 그리고 작업의 개념화에 있어서 제가 말씀드린 것과 같은 문제가 있었는지가 궁금합니다.9
제가 느끼기로는, 농악의 호흡이 가진 특유의 마이크로-변속적인 구조가 있어요. 힛(hit)과 힛 사이에. 특정한 룰에 종속되지 않고 분위기에 따라 변속되는 구조. 저는 정말로 순수하게, 그것을 국악기 말고 다른 소리로도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만을 가지고 이 음악을 만들었어요. 굳이 실물 악기가 아니라. 타악기가 타격하는 그 자리에 다른 ‘n개의’ 소리가 들어갈 수 있다는 거죠.
그게 ‘서양적 악기인 컴퓨터로 내는 소리이기 때문에 서양화된 것이다’고 말한다면… 말리지는 않겠는데, 사실 전혀 포인트에 와 닿지 않는 말이에요. 장구의 두 면을 타격하는 그 순간, 거기에 다른 음이 들어갈 수 있는 거잖아요. 그 음이 굳이 타악기의 성질을 가진 것이어야 한다면 어택(attack)이 짧은 소리들, 그럴 필요가 없다면 그 자리에 패드 소리가 들어간다 해도 괜찮아요. 어떤 결과물이 나오든 조합이 가능한 자리들이 엄청나게 많이 생겨요.
[Guidelines]의 경우에는 기존의 음들을 다른 어떤 소리와 자리를 바꾼다, 이런 감각으로 작업을 했어요. 전통악기의 수행을 억지로 바꾼다기보다는, 수행 자체를 전통악기의 영역에서 살짝 느슨하게 풀어주고 싶다는 감각. 뭐 그걸 가지고 또 ‘왜 굳이?’라고 물어보면 재밌어서 그랬다… (웃음)리듬이 좋길래 좀 다르게 놀아봤다, 이거죠. 음악은 재밌는 거잖아요? 저만의 신명이나 흥이 또 있죠. 퀴어로서의.
전통 다 좋은데, 전통악기를 연주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저런 류의 권위주의적 흐름이 나오는 면이 없지 않다고 하면, 대신 어떤 ‘가이드라인’을 주고 꼭 전통악기만 연주하지 않아도 되게 만들어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었어요. 만일 누가 ‘리듬을 못 살렸잖아!’라고 하면 또… 죄송합니다… 당신이 더 멋있게 해주세요… 가 되는 거죠. (웃음)
사물놀이패가 실제로 연주하는 점고, 칠채, 반길군악/별달거리, 동살풀이, 짝쇠 등의 장단과 벨라 님의 변주를 함께 비교해서 들으면서, 저는 [Guidelines]가 굉장히 ‘원전에 충실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비트의 패턴이나 각 사운드들이 장구, 징, 꽹과리, 북 등에 대응하는 양태를 농악에서 거의 그대로 읽어낼 수 있었거든요. 그런 점에서, 창작의 과정이 이전의 레코딩들과는 어떻게 달랐는지, ‘옮긴다’는 감각이 얼마나 크게 수반되었는지가 궁금합니다.
글쎄요. 그렇게 충실하게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충실하다’고 하는 건 주관적인 것이기도 하고. 그렇지만 한국 전통악기 소리를 많이 참고한 건 맞아요. 어떤 장르에서 음악을 따올 때, 그 장르가 변화하는 초반에는 그렇게까지 큰 변화를 주기가 항상 힘든 것 같거든요.
물론 채편의 ‘따’ 소리를 스네어로 생각하고 만든 트랙도 있어요. EP에서 들리는 징 같은 소리는 징 특유의 윙~ 하는, 조금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피치감이 좋아서 이걸 어떻게 써먹지 고민하다 만든 패드 소리고요. 이 소리는 “반길군악”에도 있고, “변주”에서도 피치를 조금 조정해서 들어갔어요. 그렇지만 장구란 악기를 DAW 안에서 재현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장구와 클럽음악이 딱 중간에서 만나면 이런 방향도 가능하겠다 하는 걸 들려주고 싶었어요. 그림으로 형상화를 해보면, 장구도 드럼머신도 전혀 아닌 이상한 걸 연주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컴퓨터인 셈이죠. (웃음) 장구 소리를 넣고 음역대를 보면 킥이랑 정말 다르거든요. 장구는 날아갈 것 같은 소리인데, 킥은 바닥에 내려찍는 소리에요. 북도 808, 90910 킥의 저음역대나 피치 드롭에 비하면 딱히 내려꽂는 소리는 아니고. 킥이나 음역대 같은, 제가 기존에 익숙했던 코드들이 그 과정에서 작용을 했던 것 같아요.
“변주”들이나 “칠채”, “반길군악” 같은 걸 들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메인 리듬을 제외하면 꽹과리나 징 같은 건 디테일에 크게 신경을 안 썼어요. 너무 악기 소리 그대로 가면 재미없어서 많이 편집해 냈습니다. 제가 재미있어야 하는데, 악보만 베끼고 있으면 재미가 없잖아요. 그냥 베끼는 정도가 아니라, ‘이 미디 노트가 이 마디의 몇분의 몇 지점에 가서 얼마 정도의 서스테인(sustain)이 있어야 한다’를 베끼는 건데… 실제로 연주자들이 악기를 치다 보면 손이 막 가는데 그 느낌을 오히려 살리면서 연주를 해요. 근데 그걸 그대로 미디 노트로 옮기면 공연하는 느낌이 들지, 그 트랙이라는 느낌이 안 드는 거에요. 클럽에서 클럽 음악이랑 만나야 하는데 그게 안 되는 거죠.
트랙을 쌓아가기 위한 일종의 빌딩 블록을 마련한다는 생각으로, 그런 구체적인 부분을 실제 퍼포먼스와 비교해가면서 인상주의적으로 찍고 있으려니 ‘이건 빼도 되겠다, 이런 디테일은 없어도 된다’ 하는 지점들이 생겼어요. ‘그랑 그랑 갱 갱’인 악보에서 ‘그랑 그랑’ 하는 소리를 살려서 넣을 것인가, “변주”에서는 살리고 “반길군악”에서는 빼자, 이런 식으로요. ‘여기에 무슨 소리를 쓸 건데, 그러면 그 소리 때문에 이건 묻힐 거야’ 하는 것도 고려했고요. 전부 다 넣으면 너무 노이지하니까.
처음에 만들 땐 악보를 찾아서 그걸 옮기고, 그걸 바탕으로 이렇게 저렇게 해야겠다. 그렇게 방향을 잡고 몇날며칠 작업을 했어요. 한 2~3주만에 첫 세 곡이 나왔고요. 굉장히 집중적인 작업이었죠.
악보뿐만이 아니라, 공연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도 참고를 하셨을 것 같아요.
물론 참고했죠. 특정 지역 전통의 전수자들이 어느 농악의 어느 장단을 시범으로 연주하거나 구음(口音)으로 이야기하는 등의 영상들이 있어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참고했어요. 이런 모든 원전을 미디 노트로 옮기는 데까지의 작업은 충실하게 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예를 들면 ‘덩 v v 덩 v v 쿵 v 따 쿵 v v’ 하는 장단을 정간보로 보면 6/8박자, 3/4박자 이런 느낌이에요. 그 블록에 딱 맞게 미디 노트를 찍으면 정말 못 들어줄 게 되어 버려요. 미디 블록을 구성하는 그리드 시스템에 맞게 음표를 찍으면 전부 다 그렇게 되는 거에요. 여러 악기를 같이 쓸 때의 앙상블에서, 우리가 한 노트라고 인지하는 것은 사실 앞뒤로 많이 퍼져 있어요. 장구 연주자 4명이 같이 ‘쿵’을 친다고 해서 그 ‘쿵’이 밀리세컨드까지 맞춰서 똑같은 지점에 찍히진 않는단 말이죠. 그렇지만 프로듀싱은 그 밀리세컨드까지 고려를 해야 하고, 그것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거죠.
제가 앞서 말한 ‘마이크로-변속적’이라는 표현이 그런 류의 밀리세컨드적 움직임, 밀리세컨드적 차이를 가리키는 거에요. ‘덩 덩 쿵 따쿵’이 아니라, 따가 조금 더 뒤로 몰려서 ‘더엉 더엉 쿵 ㄸ쿵’이 되는 느낌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아니면 ‘기덩 기덩’을 살리려면 ‘기’를 ‘덩’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뜨려 놓을 것인가, 하는 종류의 문제. 이런 약속들은 퍼포먼스마다 다르고, 속도마다 다르고, 사람마다 다르고, 전통마다도 다르더라고요. 그걸 제가 어떻게 다 공부해서 만들겠어요. 연주하는 걸 보고 거기에 대한 인상을 담은 거라고 보면 됩니다. 그렇지만 그걸 또 소리 그대로 옮기면 너무 퍼포먼스적이니까, 클럽 음악에 쓸 수 있겠다 싶은 부분을 따 왔어요.
그 대신, 그 소리가 서양 실물 악기일 필요는 없죠. 컴퓨터는 일종의 통합 기계니까 악기를 비동시적으로 연주하거나, 악기를 이루는 개념들에 비동시적으로 접속하고 프린트하는 명령을 수행하는 코드를 짜 놓을 수 있어요. 그건 실물 악기를 연주하는 것과는 다르니까, 굳이 실물 악기의 스네어나 킥, 탐 등에 1:1로 대응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게 무슨 소리지? 정확히 들어 보면 장구는 아니고 징도 아니고 꽹과리도 아닌데 거기에 해당하는 것 같네? (웃음) 그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 느낌에 많이 집중했어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 소리가 기존 농악 악기의 무엇이랑 자리를 바꿨는지는 알 수 있게끔 하는 것. 악기라는 것을 이루는 개념, 소리의 개념을 흔들 수 있도록.
그 말씀대로, 사운드의 질감 측면에 집중해 [Guidelines]을 들으면 헷갈리는 경험이 발생해요. 분명히 장구나 북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한데, 이것이 과연 실제 악기를 샘플링한 사운드인가 아니면 미디의 드럼을 적절하게 손본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 생기거든요. 이야기해 주신 대로 실제 악기에 대응하는 사운드가 명확해서 그런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해요. 어떤 사운드를 쓰셨는지, 질감을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서 부탁드립니다.
실제 악기 소리는 단 하나도 없어요. 전부 다 FM811로 만든 소리들이에요. 딱 하나, “짝쇠”에 나오는 목소리만 빼고요. 그건 키스테이션 88(Keystation 88)12에 딸려오는 기본 가상악기 소리로 만들었어요. FM8만 가지고 논 지 꽤 됐어요. 2017년부터 거의 이것만 썼으니까.
퍼커션으로 쓸 만한 좋은 소리 조합을 찾은 것 같아서, 그리고 컴퓨터로 연주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제가 FM8로 만들어 둔 프리셋을 가지고 쭉 밀고 나갔어요. 킥이라고 생각될 만한 소리, 북이라고 생각될 만한 소리, 꽹과리, 징, 패드, 전부 다 FM8이에요. 심지어 타악기 소리는 거의 다 제가 만들어 둔 한두가지 프리셋에서 변경을 하거나 피치만 바꾼 것들이고요. 일부러 구분이 잘 안 되게 하려고 그렇게 했어요.
엄청 세심하게 디자인했냐고 물으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고, 아니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냥 모든 게 서로를 향해서 새어 나오고, 비집어 나오고, 피어나고, 터지고, 뭉개지고, 모핑(morphing)하려는 ‘찰나’를 잡고 싶었어요. 만들면서 세잔(Paul Cézanne) 생각을 많이 했어요. 형(形)을 잃지는 않은, 하지만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소리들. “반길군악”, “별달거리”를 들어 보시면 열채 부분(따 소리)이랑 궁채 부분(쿵 소리)이 잘 분간이 안 되실 거예요. 그 소리들을 전부 한 트랙으로 만들었거든요. 미디 노트를 잇는 피치 글라이드(glide)를 이용해서 전부 하나의 신시사이저 사운드로 만들었어요. 킥이든 탐이든 충격음을 만들 때는 피치 변조를 이용하거든요. 보통은 그렇게 만든 두 소리가 다르다고 가정하고 만드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트랙으로 구분하지만, 저는 장구라는 악기 하나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를 한 트랙으로 퉁쳤어요.
구분하려는 듯, 구분하지 않으려는 듯, 헷갈리는 소리 만들기. 저는 소피가 모노머신(Monomachine)13으로 내던 소리들, 그리고 아르카가 [Entrañas] 믹스테이프에서 자주 사용한 지지고 볶는 파찰음에서 힌트를 얻었어요. 일종의 윤리적 프로토콜에 따른 어떤 접근법을 제가 그들에게서 뽑아온 것 같아요.
결국 샘플링 없이, 하나의 악기에서 그런 질감이 만들어졌다는 것이군요. 사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걸 알기가 쉽지 않아서, 멋대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악기 안에 있는 복수성 – 7개나 되는 오실레이터를 통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인파를 조작하면 그런 소리들을 다 만들 수 있어요. 오해해도 상관은 없어요. ‘이거 장구 샘플을 쓴 것 같은데?’라고 하면, 아니긴 한데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들어요. “동살풀이”에서 그런 오해를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처음에는 장구 채편, ‘따’ 소리를 스네어 소리로 만들어 보자, 싶어서 인터넷에서 ‘FM8로 스네어 소리를 만드는 법’을 검색하고 그대로 만들려고 했어요. 근데 만들다가 실패했어요.
전혀 스네어 소리처럼 들리지 않았어요!
그렇죠. 그런데 그 ‘실패한’ 소리를 그냥 그대로 넣었어요. 그 소리의 심상이, 미리 만들어뒀던 궁편의 깊은 ‘쿵’ 소리 반대편에서 났으면 하는, 제가 원하는 채편 소리가 된 거에요. 구음, 장구나 꽹과리 등의 원래 악기 소리, 그리고 아예 다른 임의의 소리, 이 셋의 중간에서 만나는 소리를 잡아내는 식이었어요.
최종 질감은 마스터링 스튜디오에서 많이 잡아주었어요. 다소 둔탁했던 부분이 긁어주는 듯한 시원한 소리로 탈바꿈했죠.
[Guidelines]의 거의 모든 곡에서는 BPM이 서서히, 하지만 분명하게 올라가는 현상이 관측됩니다. 사실 사물놀이를 보거나 들은 이라면 이러한 ‘가속’이 낯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럽 음악’의 맥락에서 가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듣는 것은 꽤 재미있는 감각의 전이처럼 느껴져요. 이 가속을 얼마나 고려하셨는지, 그리고 실제 작업 과정에서 이런 BPM의 변화를 어떻게 구현했는지에 대한 설명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단계 속도 구성이 한국 전통음악에 한정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루프 기반 전자음악 이전에는 수많은 장르에서 선호되었던 구성이에요. 팝, 메탈, 서양 전통음악을 가리지 않고요. 다만 우리 음악이 다양한 시간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죠. “동살풀이”의 경우 빨라졌다가, 느려졌다가, 다시 빨라지는 변속이에요. 가속이 아니고. “반길군악/별달거리”에서의 변속은 단절로 드러나요. 느려짐과 단절도 포함하는 시간을 담고 싶었어요.
그 변속을 만든 방식은 곡들마다 달라요. “칠채”의 경우에는 미디는 그대로 넣어 두고 BPM만 쭉 올렸어요. 실제 “칠채” 퍼포먼스에서 오방진을 그리며 모였다 흩어지는 부분이 있는데, 거기서의 카타르시스적 부분이 전달되길 바라면서 BPM을 올렸습니다. “반길군악/별달거리”의 경우, “반길군악” 파트에선 105BPM의 트리플렛(triplet)을 치다가 “별달거리” 파트에선 그 트리플렛의 1/2이 4/4박의 하나가 되는 어떤 템포로 다시 속도를 올렸어요. BPM을 탭으로 재어 보니 158 부근인 듯 해요. 그리드로 보면 진짜 쉬운데, 말로 설명하려니 좀 어렵네요.
그래서 “반길군악/별달거리”는 나름대로 디제잉이 가능하게 만든 트랙인데 (웃음) 사실 어떤 디제이가 [Guidelines]의 곡을 넣어서 셋을 구성한다면 그거 때문에 믹스 셋 전체가 흔들리게 되어요. 제 곡이 다들 템포가 왔다리 갔다리 하기 때문에. 그렇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곡들도 특정 BPM에만 굳이 맞추지 않고, 어떤 일정한 템포의 유포리아(euphoria)만 찾지 않고, 더 다양한 템포의 곡들을 챙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게 제 바람이에요. 그렇지만 사실 곡 하나하나의 서사를 너무 강하게 잡아서, 디제잉용이 아닌 감상용으로 들어도 좋을 거에요.
디제잉을 하는 분들은 또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네요. 제 입장에선 서사가 강하다는 게 엄청 거부감 느껴지는 건가 싶어서요. 변속이 있는 건 디제잉하기 어려운 부분인 건 맞지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테크노도 그렇고 클럽 음악이 특히나 장르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아요. 클럽 음악의 디제잉과 라디오의 디제잉이 갈라질 때 클럽 디제잉은 음악이 끊기지 않고 연속적으로 나오는 것에 집중하게 되었는데, 여기에 트랜스, 하우스 등 장르적인 특징이 발달하면서 ‘분위기가 깨지지 않는 연속적인 디제잉’이 수립되었고, 그게 비닐(vinyl)의 포맷으로 정립된 것 같아요. 그러한 기술과 매체에 의해서 장르가 보다 단단하게 결정되고…
그렇지만 이제는 벗어날 때가 됐죠. 이제는 디제잉 하면서 BPM 바로 볼 수 있고, 한 트랙의 BPM이 두 가지로 구성된다 해도 앞부분과 뒷부분 BPM을 따로 매길 수 있잖아요. 트랙터(Traktor) 같은 프로그램에서.
물론 어렵긴 할 거에요. 그렇지만 이미 몇몇 분들이 제 음악을 틀었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 음악이 사람마다 다르게 다가오는 거구나 싶어요, 그쵸? 저는 ‘내가 셋에 넣고 싶은 사운드가 있다’ 하는 집념이 생기면 그런 욕망을 끝끝내 실현하는 사람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또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요.
정구원 | lacelet@gmail.com
음악웹진 [weiv] 편집장,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대중음악을 듣고 그에 대해 쓰고 있으며, 대중음악의 범위와 효과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각주
- 독일 에이블턴(Ableton) 사에서 개발한 DAW 소프트웨어. DAW는 ‘디지털 오디오 워크스테이션(Digital Audio Workstation)’의 약자로, 디지털 오디오의 레코딩, 편집, 재생 등을 주 목적으로 구성된 소프트웨어 혹은 전자 장비를 말한다.
- 1980년대 초 서유럽에서 발생한 전자음악의 한 장르. 포스트 펑크, 인더스트리얼, 신스 펑크 등의 영향을 받은 4/4박의 비트와 기계적/반복적 시퀀서 사운드를 특징으로 하며, 프론트 242(Front 242), 니처 엡(Nitzer Ebb) 등의 밴드가 대표적이다.
- 과장된 남자다움으로 대표되는 마초성의 문화를 총칭하는 말. ‘마치스모’란 단어는 스페인어에서 비롯되었다.
- 2016년 독일 베를린에서 처음 시작된 퀴어 언더그라운드 테크노 파티. 게이 프로모터들이 주축이 되어 시작되었으며, 2017년부터는 베를린의 유서 깊은 테크노 클럽 트레저(Tresor)에서 정기적으로 개최되고 있다. 헤렌사우나는 독일어로 ‘남성 사우나’를 뜻한다.
- 곡의 피치를 올리고 속도를 10~35% 정도 가속시키는 에디팅 방식. 2001년 동명의 노르웨이 DJ 듀오에게서 에디팅 방식의 이름을 따왔으며, 2010년대부터 여러 팝, 힙합 노래들의 나이트코어 버전이 인터넷 상에 퍼지면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일본 미소녀 애니메이션이 주된 이미지로 결부되는 경향을 보인다.
- 미니멀하고 극도로 반복적인 묵직한 비트와 140-160 BPM의 속도를 특징으로 하는 독일산 하드 테크노. 장르의 어원은 ‘Schrei'(비명)과 ‘Tanz'(춤)의 합성어, 혹은 시끄럽고 게걸스럽게 먹는다는 속어인 ‘Schranzen’의 파생어 등 여러 가설이 있다.
-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로 퍼진 하드코어 테크노의 하위 장르이자 하위 문화. 150-180 BPM의 빠른 속도와 일그러진 드럼 및 신스 사운드가 특징이다. 개버라는 단어는 ‘친구’라는 네덜란드어 은어다.
- 음성 대화, 채팅, 화상 통화 등의 기능을 제공하는 인스턴트 메신저. 채널을 만들고 공유할 수도 있으며, 비디오 게임 중 커뮤니케이션에 주로 이용되지만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 가능하다.
- 인터뷰에서 벨라는 유치원 때 장구를 치는 법을 배우면서 기초적인 장단을 익혔고, 지역 아동센터의 한자 수업에서 전통음악을 실연하는 가족을 둔 친구를 사귀었다고 말했다. 그 후 인천국제공항에서 한복을 입은 연주자들이 서양 전통음악을 한국 전통악기로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러한 이분법적인 관계를 바꿔 보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고 언급했다. “이렇게 자문해 보았다. 지금 현재 가장 전형적인 서양 악기는 무엇인가? 컴퓨터다. 그러면 가장 서구적인 시설인 클럽에서 놀 때 한국 전통음악을 컴퓨터로 연주하지 못할 것은 또 무엇인가?”
- 롤랜드(Roland)의 드럼머신인 TR-808과 TR-909를 의미한다.
- 네이티브 인스트루먼트(Native Instrument)가 만든 가상 신시사이저. 최초의 FM 신시사이저인 야마하(Yamaha) DX7을 옮긴 VSTi다.
- M-오디오(M-Audio)가 만든 미디 건반.
- 일렉트론(Elektron)이 만든 신시사이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