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특정 시기 이후로 내가 좋아하는 대상에 객관적 거리를 두고, 애정이 전면에 드러나는 글쓰기는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해왔다.1 그러한 태도가 글의 신뢰성을 의심케 하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많이 노출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주어서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나와 대상 사이의 의미를 찾기 위해, 일차적으로 내가 보고 들은 것을 성실히 기록하는 행위가 어느 때보다 절실한 것 같단 생각을 자주 했다. 특히, 예술 언어로 잘 다루어지지 않는 창작 현장의 경우는 더 그렇다. 현장에 대한 이론화는 사건에 대한 기록이 존재한 다음에야 가능한데, 문화적으로 주변화되어 있는 장르의 경우는 기록되지도 못한 채 그 독특한 이벤트성만 기억에 남는(혹은 그마저도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안타까움은 내가 연주자가 아니라 연구를 하고자 하는 위치에 서 있기 때문에 드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막상 현장에서 만난 연주자들(특히 노이즈 씬)의 이야길 들어보면, 그들은 이론의 부재보다 현장의 지속성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을 더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는 듯 보였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내가 애정하는 대상이 오랫동안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하는 공식적인 첫 기록이자, 갈 길이 먼 작은 시도가 될 것이다.
첫째 날 : 9월 16일, 우정국
퍼포머 – 투 다이(To Die), 얀 준(Yan Jun), 최준용(Joonyong Choi)
내가 우정국에 입장했을 땐 퍼포먼스가 이미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연주장에 들어선 순간, 멈칫하며 잠시 착각을 좀 했는데 앞쪽 무대에 오늘 연주자 리스트에 없는 사람들이 앉아서 객석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작 연주해야 할 사람이 안 보여 이것이 무슨 상황인가 싶었지만 일단 자리에 앉아 상황을 살폈다. 흰색 반팔 티셔츠를 입은 한 남성이 객석 한가운데서 프링글스 과자를 요란하게 부숴 먹고 있었고, 무대에 있는 사람들은 그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며 이따금 익살스러운 웃음소리를 내기도 했다. 나는 과자를 먹고 있는 남성이 얀 준이라는 걸 그때야 알았다. 그는 조금 우스꽝스러운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고,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과자를 먹기 전까지는 객석에서 익살스런 춤도 췄다고 한다. 그는 객석의 사람들에게도 과자를 나누어줬는데, 나를 포함하여 과자를 받아든 사람들은 흔쾌히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퍼포먼스에 동참했다.
<4분 33초>의 업그레이드 버전인가? 하는 생각이 들 즈음, 앞쪽 무대에 앉아있던 한 사람이 나지막이 “20[twenty]”라 말하며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알렸다. 얀 준은 과자 한 통을 다 비운 뒤, 하모니카를 꺼내 불기도 하고, 침묵하거나 일어서서 움직이기도 했다. 조용한 객석에서는 종종 웃음소리가 났다. 그때 어느새 앞에서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리는 듯한 “30[thirty]” 소리가 들려왔다. 얀 준은 마치 수행하듯 여러 가지 팔 동작을 보이며 연주장 바깥으로 천천히 향했고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바깥에서 큰 웃음소리가 나자 박수와 함께 그의 퍼포먼스가 끝났다.
내가 늦게 도착하여 놓쳤던 투 다이의 퍼포먼스는 그가 만든 하쉬 노이즈(harsh noise)에 고요 속의 외침 같은 격렬한 보이스가 더해진 것이었다고 한다. 투 다이의 소리 없는 외침과 얀 준의 익살스러운 퍼포먼스, 그리고 곧 이어질 최준용 특유의 제스처를 생각해보면, 이 전시에서 퍼포머의 움직임은 청각적 행위를 위해 발산하는 어떤 ‘에너지’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연주장에서 발생하는 갖가지 소리들은 움직임을 작동시키기 위한 청각적 프리즘으로서 역할 한다는 점도 깨닫게 된다. 결국, 관객은 연주장의 시각 정보와 모든 소리를 예민하게 듣기 위해 자신의 여러 신체 감각들을 동시에 동원해야만 한다.

투 다이(To die) *사진: 진상태

얀 준(Yan Jun) *사진: 이승린
얀 준의 퍼포먼스가 끝나고 잠시 숨을 고른 뒤, 앞쪽 객석 틈 사이로 최준용이 노이즈를 뿜는 앰프와 기타를 끌며 뒤쪽으로 이동해왔다. 앰프와 기타를 잇는 기다란 케이블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꼬여 질질 끌려다녔다. 최준용이 손으로 앰프를 밀며 이동할 때마다 금속성의 가늘고 앙칼진 노이즈 사운드가 공간을 넘실거렸다. 우정국 바깥의 어느 주민이 이 소리를 들었다면, 당장 민원을 넣고 싶은 소음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이 공간에 있는 몇몇 사람들에겐 더 듣고 싶은 음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네모난 전시 공간 안팎을 기준으로 음악에 대한 인식의 프레임이 나누어져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음악에 대한 인식의 프레임을 생각할 때마다 류한길(노이즈 뮤지션)이 해주었던 말을 떠올리곤 한다. “들리는 것과 들은 것을 구분하지 않고선 소리에 대해 확장된 논의를 하기 어렵다.” 사실, 듣기(hearing)와 청취(listening)는 명확히 구분되는 것 같으면서도 생각보다 구분이 잘 안 될 때가 많다. 귀에는 덮개가 없기 때문에 지금 이 공간에서 들리는 소리가 내게 들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듣고 있는 것인지 구분하기가 모호하다. 작가이자 노이즈 뮤지션인 폴 헤가티(Paul Hegarty)는 듣기와 청취의 모호한 관계처럼 ‘음악’과 ‘노이즈’의 관계 역시 모호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니까 음악과 노이즈 사이의 경계선을 희미하게 둔 것이다. 그는 어떤 음향적 현상이 일어날 때 우리의 감각이 hearing과 listening 사이에서 힘겨루기를 한다고 보았다. 이때 특정 소리를 과잉된 소리로 지각하는 것은 이미 문화적인 판단작용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이 판단은 개인이 어렸을 때부터 체화해온 듣는 방식의 프레임으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그에 따라 개인이 생각하는 음악의 정의와 인식의 범위는 자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노이즈 뮤지션이나 실험음악가들 사이에서 종종 음악교육이 강조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실 인식의 프레임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 프레임은 음악에 대한 인식을 넘어 윤리 의식의 프레임과 삶 전체를 아우르는 라이프(life)의 프레임으로도 확장된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 사이 최준용은 움직임의 반경을 더 키웠다. 그 바람에 바닥에 꼬인 케이블이 객석의 의자를 휘감아 넘어트리며 우당탕! 하는 소리를 만들기도 했다.

최준용(우정국) *사진: 이승린

최준용(같은 셋의 GBN 공연) *사진: 이승린
10여 분의 인터미션이 지난 후, 오늘의 퍼포머 3인의 협연이 시작됐다. 투 다이는 솔로 때와는 달리 앰비언트 사운드와 화이트 노이즈를 만들었고, 얀 준은 2대의 마이크 앞에 앉아 천천히 숨소리를 냈다. 그의 숨소리는 생각보다 커서 뜨거운 콧김이 피부에 느껴질 것만 같았다. 최준용은 주먹만 한 진동기의 스위치를 하나하나 켠 다음 동그란 오디오 스피커에 순서대로 장착하여 진동의 세기를 점점 증폭시켜 갔다. 세 사람이 만드는 소리의 층위는 꽤 뚜렷한 편이었다. 전체적으로 솔로 연주에 비해 정적인 느낌이 강했지만 오히려 소리의 높낮이와 강약, 그리고 길이의 차이가 소리의 동적인 흐름을 잘 포착하게 해주었다. 최준용이 스피커를 객석 중앙과 뒤쪽으로 옮기면서부터는 주로 앞쪽에서 맴돌던 소리가 공간 전체를 채우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맨 앞줄에 앉아 있었으니 뒤쪽의 사람들은 각자 앉은 위치에 따라 또 다르게 들렸을 것이다.
20여 분이 지나고 얀 준은 마이크에서 떨어져 몸을 뒤로 젖힌 채 편히 앉았다. 어느 시점부터 그의 소리는 거의 안 들리고, 무대 뒤쪽에서 진동기 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왔다. 한 사람씩 소리를 빼는 것 같았다. 오늘 공연이 끝나는 것인가 싶었는데 그 상태로 희미하게 들리는 화이트 노이즈와 함께 십여 분을 넘게 앉아 있었다. 관객들은 전반적으로 침묵 속에서도 집중하며 잘 들으려는 분위기였다. 누군가는 명상하듯 눈을 감았고, 누군가는 핸드폰을 만지기도 했으며, 누군가는 퍼포머를 가만히 주시하고 있었다.

투 다이(To Die), 얀 준(Yan Jun) *사진: 이승린

최준용, 투 다이 *사진: 이승린
둘째 날 : 9월 17일, 우정국
둘째 날은 여유 있게 도착했다. 경황이 없던 전날과 달리 입구의 큰 전시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기획자 박다함에 의하면 이 전시는 한국과 한국 바깥의 아시아 실험음악 씬의 현재를 짚어보고자 기획되었다. 전시 제목이자 프로젝트 이름이기도한 “에이-멜팅 팟”은 아시아 실험/즉흥/독립 음악의 음향적 네트워크이다. 그 프로젝트의 첫 시작으로 중국, 대만, 인도네시아에서 활동하는 음악가들을 초청하여 아카이브, 퍼포먼스, 스크리닝으로 구성된 전시를 개최했다. 음악가들은 키퍼슨(Key-Person)으로 소개되었는데, 한 음악가가 기획자, 연구자, 레이블 운영자 등의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하는 것은 국내 사례와도 유사해보였다.
2016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아시아의 소리와 음악” 컬렉션 전을 생각해보면, 비교적 근래에 들어 아시아 소리의 특수성을 논하거나, 소리의 장소성과 사회문화적 연관성에 대한 예술계의 관심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 부분은 나의 관심사이기도 한데, 지리적 장소와 소리의 연관성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기도 하면서 로컬의 개념이 너무 가변적이기도 하여 논의하기가 쉽지 않은 주제로 여겨지곤 한다. 물론, 지역 특유의 분위기가 음악에 반영되어 있는(것 같은)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아티스트의 입장에서는 이 연관성으로 인해 자신이 지역 정체성으로서 쉽게 호명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몇몇 해외 이론가들의 경우는 이런 점 때문에 그 연관성의 실체를 불분명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들은 ‘로컬’과 ‘글로벌’의 개념적 혼동을 지적하면서 이 관계가 더 모호해질 수밖에 없음을 설명한다.2
둘째 날 진행된 토크에서 투 다이와 얀 준은 이 부분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아시아의 소리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예술계의 심리적 현상보다 연주자 개인이 하고 싶은 연주를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 같다고 말했다. 아마도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지역성이 갖는 모호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많은 (아시아)실험음악가의 정체성이 (아시아)지역에 따라 규정되는 것에 대해 간접적인 입장 표명을 한 것이라 생각된다.
다큐멘터리 상영 – <타이베이의 경련>(2015), <비싱: 인도네시아의 노이즈 음악>(2014)* 이하 <타이베이>, <비싱>
이날 상영된 두 개의 다큐멘터리는 모두 영화 참여자들의 인터뷰 내용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상영관 바깥에서는 참여자들과 연관된 작은 아카이브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전시는 영화를 감상한 뒤 둘러보는 것이 관람의 이해도도 높이고 전체 전시의 순서에도 더 맞을 것 같았다. 왼쪽 벽면에는 얀 준이 공연 전후로 찍은 공연장 사진 컬렉션이, 중앙에는 투 다이(Martinus Indra Hermawan)가 활동하며 남긴 소책자, 음반, 신문기사, 노트, 굿즈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입구 쪽 한켠으로 대만의 퍼포머 황다왕(Huang Dawang)의 개인 자료집이 비치되어 있었다. 나는 잠시 둘러보다가 영화를 본 후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얀 준, 공연 전/후의 현장 오브제 기록 사진, 54점 (2013~2017) *사진: 이승린

투 다이(Martinus Indra Hermawan) 활동 자료, 40여점 (2013~2017) *사진: 이승린

황다왕, 자료집(전단지, 노트, 영수증, 캘리그래피, 지도 등 30여점) (2013~2017) *사진: 이승린
<타이베이>와 <비싱>에는 실험/노이즈 음악에 대한 많은 정보들이 함축되어 있다. 그 정보는 주로 인터뷰 참여자들의 언술에서 유추할 수 있다. <타이베이>의 주인공 황다왕은 대만의 괴짜 퍼포머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퍼포먼스는 종종 웃음을 자아냈지만, 동시에 어둡고 광적인 에너지가 빠르게 소진되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의 사적 공간이나 인터뷰가 진행되는 화광지역 철거 장소 역시 조화로운 세계와는 대척점에 있다. 그가 연신 보여주는 우울함과 꾸깃한 약 봉투에 서린 불안감은 그의 언술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뒤이어 상영된 <비싱>은 인도네시아의 노이즈 음악을 다루면서, 씬에서 활동하는 연주자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연주 실황을 성실히 담았다. 이 두 다큐멘터리는 각기 다른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다루는 대상도 ‘인물’과 ‘음악’이라는 차이점을 가지지만, 음악의 가장자리를 탐색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유사한 언술로서 통하고 있었다.
(황다왕)
“예술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를 하고 싶지 않다.”
“내가 가진 에너지를 모두 소비한다.”
“자신감이 없고 우울하다.”
“고1 때 우울했어요.”
“고2 때 우울했어요.”
“고3 때 우울했어요.”
“대학, 대학원, 군대에서도 우울했어요.”
“(이 음악을 하는 것이)나를 폭발시킬 기회로 알고 있다.”
“정지 버튼을 누르면 이 발산도 정지 된다.”
“버튼을 누름으로써 사회에 어떤 충격을 줄 것인가? 저는 이 버튼을 어디에든 겨냥할 수 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 게임을 지속하는 것뿐이에요.”
(비싱 인터뷰 참여자들)
Q: 노이즈 음악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소리라는 매체를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여 극단적으로 즐기는 방법”
“테라 인코그니타(Terra Incognita)”3
“그냥 노는 것, 즐기는 것”
“나의 불안을 표현할 수 있는 소리가 이것 뿐”
“한계가 없는 음악”
“정해진 연주법이 없다.”
“1~20,000Hz 사이에 내가 원하는 대로 소리를 채울 수 있다.”
“메탈, 펑크, 언더그라운드는 나름의 룰이 있어서 그것을 따라야한다.”
“(하지만)노이즈는 자유롭다.”
“노이즈를 만드는 과정이 좋다.”
Q. 노이즈 음악이 음악인가?
“(감정을 전달한다는 측면에서) 노이즈는 당연히 음악이다.”
“음악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음악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좀 더 형태가 있는 음악을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영감을 줄 것이다.”
지난 6월, 나는 한양대학교 음악연구소 주최의 학술대회 “다시 듣다”에 다녀온 적이 있다. 이 연구소는 소음에 대한 학술적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날 발표자인 김경화가 노이즈의 유토피아적 측면과 디스토피아적 측면에 대하여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4 그는 소리의 한 형식으로서 ‘노이즈가 노이즈로서 지속될 수 있는가’를 질문했는데 그것은 주로 메르츠보우(Merzbow)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그에 의하면 노이즈는 자신의 과잉 에너지를 소비하며 청각적 희생의 과정을 겪는다.5 노이즈는 자신의 폭력성이 재생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음악’이라는 안전지대로 수용되고, 이것이 ‘소리의 해방’이라는 노이즈의 유토피아적 희망을 가져왔다. 그러나 동시에 노이즈는 태생적인 성격상 프레임 안으로 구조화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그 안전지대 안에서 자신의 무질서함을 소진해 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논의에 비추어 보면, 황다왕의 언술인 “내가 가진 에너지를 모두 소비”, “나를 폭발시킬 기회”, “이 게임을 지속하는 것뿐”은 노이즈의 원동력과 정체성을 적절히 드러내주는 말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홍철기(노이즈 뮤지션)는 나에게 노이즈 음악을 추동했던 힘에 사회, 문화, 정치와는 무관한, 어떤 분리된 힘이 존재했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노이즈’가 학술적 연구대상이 되면서 그 의미체계가 복합적으로 이루어진 측면이 있지만, 나는 종종 퍼포머들에게서 그 순수한 에너지의 동력과 힘을 발견하고 또 느낀다. 다만 나는 그 에너지가 ‘음악의 프레임’안에서 발산되고 소진되는 에너지라는 점에 대해서는 조금 다시 생각해보고 싶다. 음악이라는 안전지대는 그 가장자리에도 음악의 프레임을 상정해놓을 수밖에 없기에, 이 프레임에 노이즈를 가져다 놓으면 끊임없이 ‘노이즈가 음악인가 그렇지 않은가’하는 질문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음악’이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노이즈를 열등한 것으로 여기는 문화적 분위기는 음악사상이 줄곧 제창해온 프레임 안에서 형성되어왔다. 그런 점에서 얀 준이 객석에 던진 질문은 이 전시에서 얻은 뜻깊은 수확이었다.
“음악이 노이즈인가?”
노이즈는 음악에 대한 배타적 태도로 여겨져 쉽게 ‘저항’의 코드와 맞물리거나 고립된 영역으로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이 배타성은 노이즈보다 음악사상이 더 강하게 보여 왔는지도 모른다. 얀 준은 ‘노이즈가 음악인가?’, ‘노이즈 음악이 음악인가?’하는 질문을 뒤집어 물었다. 그 질문은 모든 음악에 노이즈의 속성이 잠재되어 있다는 평소 나의 생각도 뒤집는 표현이었다.
“음악이 노이즈인가?”
우리가 안전지대라 제창해온 영역의 바깥. 얀 준은 음악이라는 물방울 바깥의 소리의 바다를 말했다. 이 질문이 가능하다면 노이즈는 안전지대의 바깥, 소리의 세계에서 마주하는 첫 번째 영역이 될 것이다.
이승린 | halcyondrum@naver.com
소리문화연구자. ‘소리에는 위계가 없다’는 믿음을 모토로 듣는 행위와 관련된 문화적 현상들에 관심을 갖고 있다. 주로 참여관찰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예술 언어로 잘 다루어지지 않는 창작 현장에 주목한다.
각주
- 나는 이레인 베인스트라(Irene Veenstra)의 애정 어린 글쓰기를 좋아한다. 이 글의 제목인 ‘안전지대 바깥에서의 청취’는 그의 전시 관람일지를 모티브로 한 것이다. 그는 네덜란드의 미술사학자 (1955~)로 2013년 미술가 이주요의 개인전을 9일간 관람하며 『안전지대 밖에서 Buiten De Comfort Zone』라는 관람일지를 남겼다.
- 키스 니거스(Keith Negus) 『대중음악이론: 문화산업론과 반문화론을 넘어서』의 「지리」부분에는 음악과 로컬, 장소성에 대한 이론가들의 논의가 정리되어 있다. 로컬의 개념 혼동은 로컬 음악가가 특정 지역의 공동체를 지칭하는 개념이거나, 혹은 그 지역을 대표하는 스타 음악가를 가리키는 개념일 때의 혼란을 말한다. 후자의 경우라면 때에 따라 로컬보다 ‘글로벌’을 사용하는 것이 더 적절할 수도 있다. 투 다이, 얀 준, 황다왕은 모두 특정 지역을 대표하는 음악가이자 아시아를 대표하는 실험음악가이기도 하다.
- 알려지지 않은 땅, 미지의 나라, 미개척 영역을 의미하는 라틴어
- 김경화(2017), 노이즈의 역설 : 유토피아적 실현인가, 디스토피아적 상상인가, <한양대학교 음악연구소>. *이 논문은 현재 학술대회 자료집에 요약문 형태로만 있고 RISS에는 올라와 있지 않다.
- 발표 내용이 모두 기억나진 않지만 ‘희생’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바타이유와 르네 지라르, 자크 아탈리의 논의가 활용되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