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희 “처사가” 홍보물 이미지 [ⓒ강문식 (배경이미지 *마상처사도)]

돌아온 고라니, 사슴과 벗이 되어 수많은 골짜기와 봉우리를 오가며
사람의 발길 사라진 길은 푸른 이끼로 막혔으니 세상 소식 끊어졌다
아마도 한가한 사람은 나뿐인가 하노라
-처사가 中

 

C. ‘완성되는’ 음악, 음악에서의 사건1

음악(공연)에서 ‘사건’은 어떻게 촉발되는가? 음악에서 사건이라니 당혹스럽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사건의 의미를 단순히 극적 전개를 가능하게 하는 서사의 꼭짓점으로 제한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무대에서 사후적으로 ‘완성되는’ 음악으로서의 사건. 음악공연에서 기대하게 되는 보편의 시·청각적 경험에 혼선을 빚고 결국 그러한 기대로부터 이탈하게 만드는 좀 더 확장된 의미의 어떤 사건 말이다. “처사가”2는 향후 12개의 퍼포먼스로 완성될 박민희의 십이가사(十二歌詞) 연작 중 두 번째 작업으로, 2016년 “무빙/이미지”에서 소개되었던 “길군악”의 후속작이다. 이 글은 아르코미술관 “무빙/이미지” 전시의 일환으로 진행된 박민희 “처사가”의 사건성, 전통 성악곡인 가사(歌詞)를 ‘관람’하는 방식을 추적하는 글이 될 것이다.  

 

B. 실패들: 의도된 훼손에 관하여

“처사가”의 공연 컨셉은 간단하다. 공연 공간에는 여닫이문이 달린 팔각기둥 형태를 한 세 개의 작은 블랙박스가 존재한다. 공연 시작 전 관객은 A, B, C 세 그룹으로 나뉘게 되고 안내를 받으며 각각의 해당 블랙박스로 입장하게 된다. 이렇게 세 구역으로 분할된 관객들은 자신의 왼쪽에 설치된 이어폰을 착용한 후 공연을 관람, 때에 따라 청취하게 되고 이어폰의 내레이션 사운드가 중단되면 안내에 따라 다음 동선, 즉 나머지 구역을 차례로 이동하게 된다. 이렇게 관객들은 서로 다른 동선으로 세 구역을 모두 이동하게 되고 이러한 이동이 종결됨과 동시에 음악 또한 사후적으로 ‘완성’된다. 이 일련의 파편들을 그러모아야 부유하는 박민희의 목소리에 비로소 작품으로서의 확정성이 부여되는 것이다. 

때문에 “처사가”의 ‘사건’은 어쩌면 예견된 일이었다. 퍼포먼스가 이루어지는 공간의 분절적 특수성을 떠올려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듯 “처사가”에서는 일반적인 공연에서 흔히 발생하는 관객과 음악가 사이의 단방향적 관계가 직접적으로 파기되어 있다. 음악가가 완성된 단일의 결과물을 선보이고 지정된 좌석에 앉은 관객이 이를 관람하는 것이 일반적인 공연 관습이라면, 박민희의 “처사가”에서는 이러한 모든 문법이 뒤틀려있다. 박민희의 퍼포먼스는 관객들로 하여금 상대적으로 불균질한 미장센과 내러티브를 경험하게 만들고 나아가 저마다 구성하게끔 고안되어 있다.

이는 일차적으로 퍼포먼스의 공간을 물리적으로 구획지어 재배열해 놓았기 때문이지만 다른 무엇보다 음악을 수행하는 박민희의 신체가 C구역의 블랙박스에만 존재하며 일종의 오브제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박민희는 오직 C구역에만 존재하고 이 구역에서만 노래한다. 때문에 관객들이 C구역을 벗어나 A나 B구역으로 이동할 경우 박민희의 신체는 보이지 않고 오로지 박민희가 C구역에서 부르는 노래만이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내레이션 사운드와 중첩되어 들릴 뿐이다. “처사가”에서 음악을 수행하는 박민희의 신체는 보편적 음악 공연에서와는 달리 지속적으로 매끄럽게 현시되지 않는다. 그리고 C구역을 제외한 나머지 구역에서의 ‘사건’은 오로지 청각 경험에 의해서만 촉발된다. 즉, 이 공연에서 음악가의 경이로운 신체와 그 고유성은 관객 앞에 지속되지 않으며 음악가 스스로가 이를 의도적으로 균열 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박민희가 비단 눈에 보이는 자신의 신체만을 구획지어 분할하는 것은 아니다. 박민희는 자신의 노래, ‘원본’으로 인식되는 전통음악 <처사가> 또한 전략적으로 ‘훼손’하여 불균질한 청각 경험을 의도한다. 앞서 언급했듯 “처사가”에서 관객들은 각 구역으로 이동하며 박민희가 부르는 노래만을 경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비물질적 오브제로 디자인된 사운드를 이어폰을 통해 함께 듣게 된다. 박민희는 창자(唱者)로서 훈련된 자신과 자신의 노래를 매끄럽게 전시하기를 거부하고 여기에 또 다른 직조된 음성을 병치한다. 새롭게 고안된 사운드는 대부분 이지운, 장현아, 정연경, 최현수의 내레이션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국악방송 ‘명인명창 100인의 기록’ 음반 <김경배 12가사>에서 발췌한 소리, 장영규의 사운드디자인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음성의 개입은 일종의 ‘간섭’에 가깝다. 표면적으로는 음악가가 선보이는 음악의 온전한 감상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운드의 병치는 12가사의 한 곡인 <처사가>라는 ‘원본’의 정직한 재현, 다시 말해 정형화된 전통으로서 예견된 음악 또한 ‘실패’하게 만든다. 그런데 박민희의 “처사가”에서는 이러한 일련의 실패들로 말미암아 사건이 유발된다. 일반적인 무대 문법과 규칙을 의도적으로 훼손하고 나아가 음악가 고유의 신체와 목소리를 전략적으로 배치하고 조작함으로써 사건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는 <처사가>의 ‘또 다른 텍스트’를 생산하는 것이기도 하다. 박민희가 사건을 발생시키는 방식은 의도적인 훼손이다. 그렇다면 사운드의 중첩과 공간의 구획 및 재배치로 인한 ‘원본’의 손실에도 불구하고 박민희의 “처사가”는 어떻게 다시금 전통음악 <처사가>로 명명될 수 있는가? 나아가 박민희는 원본의 본질적 실패를 선언하고 자신과 원본 사이에 존재하는 상상의 위계를 어떻게 전복시키는가? 그리고 이러한 전복은 무엇을 의도하는가?

 

A. 작동을 위한 오작동

위의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박민희의 “처사가”라는 제목에서 오는 대담함을 주지할 필요가 있겠다. 박민희의 이전 작업을 살펴보면 <가곡실격>, <각자의 시선> 등 전통을 새롭게 맥락화 하는 과정에서 도출된 단어나 그 조합을 공연의 제목으로 사용하고, 소재가 된 음악 혹은 텍스트를 병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박민희 “처사가”의 경우 실존하는 전통음악인 <처사가>라는 곡이 곧 공연 제목이다. 곡명 자체가 공연의 제목인 것인데, 이에 대한 그 어떠한 부연도, 부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는 우리가 공연장에서 흔히 관람할 수 있는 누군가의 가야금 산조, 누군가의 심청가와 같은 맥락인데, 그럼에도 이 공연은 전통음악을 있는 그대로 강박적으로 재현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음악의 만료된 시효를 파기하겠다는 거창한 선언과 함께 현대적 미감에 쉽게 동화되지 않는 전통음악의 요철을 잘라내고 편집해버리는 각색, 이른바 ‘전통음악의 현대화’ 프로젝트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제스처는 충분히 흥미롭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전통음악을 수행하는 자신의 신체와 목소리를 의도적으로 훼손하는 것이 지시하는 바는 무엇이며, 이는 어떻게 그 어떠한 부연 없이 실존하는 전통음악인 <처사가>로 다시금 회귀할 수 있는가? 이러한 기묘한 전술은 결과적으로 무엇을 ‘작동’하게 하는가? 

먼저 리플렛에 기재된 박민희의 “처사가”에 대한 설명에서부터 시작하자. 전통음악의 시효가 만료된 듯 보이는 이유는 전통음악이 “유희로서의 노래에서 멀어지게” 되었으며 이것이 “더 이상 오락일 수 없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서구와 자본이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오늘날 전통음악의 음조직과 특유의 색채는 거부감 없이 수용되기 어렵고 이러한 이유로 대중들과의 감정적 공명 또한 쉽사리 와해된다. 대중들로부터 향유될 수 없는 음악은 당대의 지배 가치에 따라 끊임없이 재편될 것을 요청 받고 존립 근거 또한 지속적으로 해명해야할 처지에 놓인다. 이때 전통음악은 거칠게 말해 자신의 정체성을 강박적으로 구현하거나 본연의 질감을 지워나가는 선택지를 고민하게 된다. 그런데 박민희는 이러한 방식의 실패를 미리 예견한 듯 보인다. 그는 전통음악을 ‘과시’하거나 ‘생략’하는 대신 현대에 위치지워진 전통음악의 모습과 그 속에 자리하고 있는 자신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견된 ‘파편’들을 정제된 내레이션으로 새롭게 조합하여 자신의 노래 사이사이에 삽입한 뒤 배회할 수 있도록 만든다.

가령, C구역에서 박민희는 단정한 자세로 노래를 하는데 이때 제도에 의해서만 존속되는 전통음악, 정악과 민속악의 대립, 바른 음악(正樂) 이데올로기, 도제식 교육을 통해 훈련되는 창자(唱者)의 몸 등 논쟁적인 내용이 담긴 낯선 내레이션을 이어폰을 통해 동시에 출력시킨다. 이로써 관객들은 창자(唱者)인 박민희가 전통음악을 공부하고 체득한 환경을 짐작할 수 있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노래하는 박민희를 ‘관람’하는 것은 독특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박민희는 위계적이고 경직된 전통음악의 생태를 상상할 수 있는 잘 조율된 임의의 시공간을 열어젖히고, 여기에 훈련된 자신의 신체를 하나의 오브제로써 적나라하게 전시한다. 단순히 테크닉의 표현으로써 음악가의 신체를 드러내는 것을 거부하고, 전통음악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외면하거나 정당화한 면면과 쉽게 요약될 수 없는 기나긴 역사의 소란들을 자신의 노래에 덧대는 것이다. 이로써 박민희의 신체는 특별하게 발화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정악(正樂)과 이에 포함되는 음악 갈래들의 역사를 개괄적으로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다.정악(正樂)은 흔히 궁중에서 행해지던 음악을 뜻한다. 정가(正歌) 역시 단어를 통해 유추할 수 있듯 정악(正樂)에 포함된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정가(正歌)는 전통 성악곡의 하나로 아정(雅正)한 음악을 일컬으며 가곡(歌曲), 가사(歌詞), 시조(時調)를 포함한다. 박민희가 선보인 가사(歌詞)가 바로 정가(正歌), 넓게는 정악(正樂)에 포함된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에 드러난 정가(正歌), 정악(正樂)의 정의이고, 엄밀하게는 ‘정당화된 역사’로서의 정의이다. 사실 정악(正樂)의 정의와 분류법에는 많은 논쟁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국립국악원의 전신인 이왕직아악부는 조선의 음악, 조선의 음악 중에서도 ‘궁중’에서 행해지던 음악을 전승하던 기관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음악을 ‘정악(正樂)’, 즉 ‘바른 음악’으로 규정했는데, 이는 정악(正樂)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의 음악을 ‘속악(俗樂)’, ‘저속한 음악’으로 배제하는 구별짓기의 자장 아래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타자화의 논리는 이왕직아악부원들이 국립국악원을 장악한 뒤 다양한 방식으로 제도화 되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바른 음악’은 무엇이며 이는 어째서 궁중의 음악으로만 한정될 수 있는 것일까? 가곡(歌曲), 가사(歌詞), 시조(時調)는 형성된 배경과 향유층이 달랐음에도 어떻게 정악(正樂)이라는 바르고 위대한 음악으로 함께 포섭될 수 있었던 것일까? 박민희는 이 질문 앞에서 고민했을 것이다. 필자가 앞서 언급한 ‘전통음악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외면하거나 정당화한 면면과 쉽게 요약될 수 없는 기나긴 역사의 소란들’이란 바로 이와 같은 ‘정악(正樂)’이라는 힘의 역사를 의미한다.

반면 A와 B구역의 경우 박민희의 신체는 존재하지 않고 C구역에서 들려오는 노래 소리와 더불어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내레이션 사운드만이 ‘사건’을 주조한다. A와 B구역은 C구역과는 달리 은밀하고 사적인 세계와 예술가로서의 편린이 보다 지배적이다. 때문에 이 구역에서 관객들은 퍼포먼스를 관람하기 보다는 오히려 ‘번역’된 <처사가>의 이미지를 홀로 ‘청취’하며 내밀하게 상상하게 된다. 전통음악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 중 하나는 가령 이러한 것이다. 전통음악은 자신이 집중하는 주제와 내용을 확장시켜 당대의 삶과 예술에 관한 성찰을 담아낼 수 있는가? A와 B구역에서 발견되는 목소리들의 상호간섭은 이를 적극적으로 선취한다. <처사가>를 재맥락화 하여 새로운 텍스트를 생산해내고 이를 통해 지금, 여기의 친연성을 확보하며 더불어 전통음악의 향유(享有) 가능성 또한 확장시키는 것이다.

박민희는 ‘만들어진 전통’을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균질하게 구현하지도, 현대적인 미감의 규격에 맞춰 굴곡 없이 매끄럽게 조형하지도 않는다. 대신 자신의 신체, 목소리를 물리적인 공간의 구획과 사운드의 병치를 통해 의도적으로 훼손한다. 이로써 전통음악의 정형성 또한 조각나게 된다. 이러한 파손의 결과물을 전통음악인 <처사가>로 다시 명명하는 기획은 고정불변의 원본으로 인식되는 전통이 일종의 신화임을 폭로하는 것이자, 정악(正樂)을 둘러싼 이데올로기에 관해 질문하고 그 위계적인 힘을 균열 내기 위한 하나의 시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박민희가 취한 훼손의 전략들은 전통음악의 정상 ‘작동’을 위해 ‘오작동’을 가장하고 조작하는 기획이며, 전통음악을 현대에 재배치하기 위해 좀 더 건강하고 온당한 방식을 고민하는 과정으로 환원될 수 있다. 

공연이 끝난 후에야 갖게 되는 작은 책자는 퍼포먼스에 대한 그 어떠한 부연도, 정답도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수많은 문헌에서 발췌한 전통음악과 정가(正歌), 가사(歌詞)에 관한 언설들로 가득 차있다. 정가(正歌)에 관한 형식적인 설명 대신 이를 둘러싼 드러나지 않은 역사와 갈등을 유추할 수 있는 텍스트 조각들이 모여 있다. 이 책이야 말로 공연에 대한 그 어떤 설명보다 친절하고 사려 깊다. 


성혜인 | apollo_cs@naver.com
전통예술과 민속을 공부했다.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전통을 사유하는 방식을 살펴보는데 관심이 있다.

각주

  1. 필자는 8월 17일 7시 공연을 C-B-A 동선으로 이동하며 관람하였으며 이 글 역시 이러한 흐름을 고려하였다.
  2. 박민희의 공연 처사가는 “ ”로, 전통음악 처사가는 < >로 표기했다.
Show CommentsClose Comments

Leave a comment